제목 | 결박당한 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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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태범 | 작성일2002-03-29 | 조회수2,023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주님 수난 성 금요일 (2002-03-29) - 야곱의 우물에서 독서 : 이사 52,13[1]3,12 독서 : 히브 4,14-16; 5,7-9 복음 : 요한 18,1-19,42
[결박당한 몸] (본문이 길어 필자가 묵상한 구절 중심으로 싣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시고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셔서 거기에 있는 동산에 들어가셨다. 예수와 제자들이 가끔 거기에 모이곤 했었기 때문에 예수를 잡아줄 유다도 그곳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다는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보낸 경비병들과 함께 한떼의 군인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무장을 갖추고 등불과 횃불을 들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신상에 닥쳐올 일을 모두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소” 하자 “내가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를 잡아줄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있었다.
예수께서 “내가 그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 예수께서 다시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소” 하고 대답하였다.
“내가 그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고 있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두어라” 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나에게 맡겨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때에 시몬 베드로가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오른쪽 귀를 잘라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코스였다.
이것을 보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그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고난의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에 군인들과 그 사령관과 유다인의 경비병들이 예수를 붙잡아 결박하였다.
(요한 18,1-12)
나는 참 많은 죽음을 보았다. 그 중에 2002년 1월 1일에 있었던 한 신자의 사망소식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그분의 죽음에 대해 어떤 이는 대축일 미사를 나오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돌아가시려니까 그랬지 그렇다고 변을 당했겠느냐 한다.
대부분은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점점 잊어간다. 그의 존재를’…. 그러나 몸이란 영원한 것이 아닐까?
우주적 시각에서 보면 몸이란 보이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무형적 활동도 몸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을 때와 같은 양식으로 살아가지 않을 뿐이지 몸이란 본시 없어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현재적 의미에서 외화(外化)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외화된 생명들과 더불어 함께 공존하는 데는 변함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칼과 같은 폭력으로도 막을 수 없는 죽음이 결박이나 십자가상의 못박음으로 끝이라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결국 죽음의 절대성만큼이나 몸의 존재는 영원하다. 본시 몸이란 개체로서는 존재하지 않는 이유이다.
나와 너로 이야기되는 관계로 몸을 이해할 때 비로소 참다운 몸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주를 하나의 큰 몸뚱이로 말하고자 함은 아니다.
큰 것이 있으면 작은 것이 있고, 밝은 것이 있으면 어두운 것이 있고, 높은 것이 있으면 낮은 것이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몸이 오늘 우주의 몸으로 돌아가셨다.
어떤 사고나 정해진 운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능동적 살림, 존재론적 삶의 방식인 자기 증여로 인한 참다운 몸 살림을 위해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참 몸이셨다. 세상 것에 결박당한 나의 몸도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윤영길 신부(광주대교구 곡성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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