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부활, 부활, 부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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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2-04-05 | 조회수1,735 | 추천수11 | 반대(0) 신고 |
부활 팔일축제 내의 복음들을 살펴보면 각 복음에서 발췌한 다양한 부활기사들로 이루어졌다.
먼저 부활 성야엔 여자들이 무덤에 찾아갔다가 주의 천사를 만나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듣는 마태오의 빈무덤 사화가 나온다. 부활절 당일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알리고 두 제자가 달려와 흩어진 수의를 발견하는 요한의 빈무덤 사화이다.
월요일은 부활 성야에 이어 여자들이 천사가 일러준 소식을 듣고 무서우면서도 기쁨에 넘쳐 제자들에게 전하러 가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마태오의 이야기. 화요일은 빈 무덤 밖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요한).
수, 목요일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이야기와 그 뒤를 이어 제자들의 공동체에 나타나셔서 음식도 먹고 당신이 유령이 아님을 보여주시는 루가의 이야기. 금요일엔 티베리아 호수에 나타나셔서 물고기를 많이 잡도록 도와주시는 이야기(요한). 토요일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예수 부활의 소식을 전하였는데도 제자들조차 믿으려하지 않았다는 마르꼬 복음의 후기의 이야기들이다.
이런 기사들이 일주간 내내 이어지다가 부활 제 2주일에 가면 유다인들이 무서워 한 집에 모여 숨어있던 제자들 한복판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시고..비로소 제자들의 입에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 터져 나온다.
그러니까 "부활이다!"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긴가민가 반신반의하는 의혹과 기쁨이 교차하는 주간인 셈이다. 마치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하면서도 아직은 확고한 부활신앙을 갖고 있지 못하는 많은 신자들의 상태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부활은 믿으면서도 자신은 아직도 빈 무덤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말하자면 반쪽의 부활을 맞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하다.
갈수록 부활 성야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이 적어져서 걱정이시라는 어느 신부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의견을 나누었는데 하필 비가 와서 그랬을 것이라는 궁색한 변호는 40일간의 준비와 간절한 기다림이 있었다면 비가 대수였겠냐는 말씀에 목구멍으로 다시 기어들어 갔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부활이라면서도 막상 이에 대한 절실한 인식, 체험들이 없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견들이 나오고 이런 상태에서 주 5일 근무제가 되면 더 심각한 현실로 나타날 것이라는 예상 밖에는 뾰족한 대책도 없어 답답했다.
팔일축제 복음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 몇 가지가 있다. 무덤이 비어있다는 것도 수의가 흩어져 있다는 것도 모두에게 부활의 증거는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믿으려 하지않는 사람들에겐 그것은 시체를 감춰두고 딴소리를 하는 제자들의 짓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마치 과학적 사실 증명을 중시하는 현대의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을 교회가 만들어낸 신화로 취급하고 있는 것과 같다.
또 한가지는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을 직접 목격했다는 증인들이 있다해도 자신의 체험이 아니면 믿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부활신앙은 객관적 사실의 증거나 증언에 의해 탄생한다기보다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만이 확고한 부활신앙을 ’일으켜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의 선물이 바로 부활신앙인 것이다. 그래서 부활을 ’일으켜지다’라는 수동태로 복음사가들은 쓰셨나보다. 부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능력, 이성의 한계 밖의 일인 ’아버지’의 은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정말 복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누구에겐 은총을 베푸시고 누구에겐 은총을 베푸시지 않는가?
복음서에 나타난 사람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그들은 끊임없이 주님의 주변에 머물렀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간적인 허약함을 가지고 있었고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도망갔던 사람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주님의 빈 무덤 근처에서나마 서성대던 사람들이었다.
비록 그들이 허망한 빈 무덤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고, 한 곳에 모여 시름에 빠져 있었어도, 잠시 낙담하여 발길을 돌린다해도 가슴 가득히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넘쳐있었던 것이다. 주님께 대한 ’사랑의 상처’를 간직한 사람들이었기에 다시 ’사랑의 기쁨’으로 치유시켜주시는 것이다.
그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갈망을 가지고 주님 주변에 끝내 머문다는 것은 분명 능동적인 행위이다. 주님의 부재, 그 절망적인 상태에서도 능동적으로 머물 수 있는 이들이라면 모든 이에게 주시는 주님의 선물을 가장 먼저 수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우리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최선의 행위, 그리고 마지막은 주님께 맡기는 수동적인 자세가 부활이라는 커다란 문턱을 넘어가게 한다는 말은 아닌가.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믿었던 사람들은 공통적인 사명을 부여받는다. 즉 ’어서가서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게 되는 것이다. 개별적인 부활의 체험들은 공동체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그들도 신앙하게 하는 것이 개개인을 ’일으켜주신’ 주님의 궁극적인 의도인 것이다.
각 개인에게 일어난 부활의 체험, 그것이 한데 모여져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부활의 체험들을 통해 커다란 힘을 갖고 그 생생한 부활의 기쁨들을 세상에 알리라는 ’인류의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는 것이다. 즉 나를 일으키신 것은 ’기쁨의 수다쟁이들’이 되어 무기력과 낙심, 허망의 빈 무덤을 아직도 서성대고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주라’는 주님의 명령이심을 되새기는 팔일축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부활, 부활, 부활, 부활 예수님의 부활, 나 자신의 부활, 교회공동체의 부활, 그리고 세상의 부활! 네번 부활의 의미가 우리안에 확고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알렐루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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