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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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헌 쪽지 캡슐 작성일1999-07-20 조회수2,614 추천수11 반대(0) 신고

류 오민님,

꼭 이렇게 시비조로 질문을 하셔야만 되는 건지 모르겠군요. 제가 오민님께 무엇 잘못한 게 있나요?  상당히 도전적으로 들리는데 아마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이겠죠?

 

 

제가 한번이라도 클래식적인 음악만이 전례음악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나요? 아니면 한번이라도 즐겁고 밝은 분위기의 성가를 배척한 적이 있었던가요?  마찬가지로 국악미사 음악을 전례음악이 아니라고 한 적이 있었던가요? 제가 새로운 노래들의 필요성에 대해서 반대한 적이 있는가요?  청년들이 좋아하는 장르의 음악이 전례음악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제가 언제 말했던가요?  제 청년성가집에 관한 글을 잘 읽어보세요. 어디에도 이런 표현이나 내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전례음악을 전공한 저에게 이런 질문은 듣기가 좀 거북하네요... 이제껏 제 글이 그런 뉴앙스를 주었던가요?

 

여기서부터는 마음을 풀고(?) 편히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답을 하려고 하니 제가 한 말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답변할 것이 없습니다.  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대답뿐이네요. 먼저 저는 청년성가집 안에 있는 곡만(!!)을 다루었고 이 책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한 곡도 이번에 다루지 않았으며(!!)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몇 가지만 적겠습니다. 그러나 류 오민님이 부담느끼실 내용은 전혀 아닙니다.

제가 청년성가집 출판에 대해 글을 쓰면서 느낀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제가 지적한 문제점 6가지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제가 지적한 문제점이 옳다면 옳고 잘못된 점에 대해 시인하는 것이 젊은이다운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또 제가 잘못 생각했다면 사과하고요....     무한 슬픔님 말고는 모두가 진지하지 못했어요. 변명하고 빈정대고...  그런 태도는 별로 좋게 보여지지 않는군요.

 

성가의 내용이 찬미와 감사라 해도 반박이 없었습니다. 제 말이 맞는 모양이죠? 성가는 미사 안에서 봉사적 기능을 해야 한다해도 아무 반응이 없어요. 제 말이 맞는가요?  제가 성가라 할 수 없는 곡이 너무 많다고 해도 묵묵부답.  입당 때 말고 사용할 수 있는 성가는 서너 곡 뿐이라 성가집이라 할 수도 없다해도 유구무언.  그럼 일단 제가 문제점으로 지적한 것은 거의 맞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요?  여러분들의 반응은 오로지 기분 나쁘다는 것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 느낌은 많을 글에서 차갑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일년동안 준비한 성가집을 늙은이가 매몰차게 비판하는 바람에, 다 된밥에 재를 뿌린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감정만을 전달받는 기분입니다.  지금까지 쓴 글에 대해 류시창신부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이 청년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껴안는 것을 강조하셨는데 음악을 분석하는데 왜 이렇게 따뜻한 시선이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분석은 학문입니다. 순수한 동기와 열정이 있다고 해서 작품의 됨됨이까지 훌륭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엔 아직도 음악적으로 더 성숙할 수 있는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문제를 지금까지는 적어도 전례 음악적으로 즉 학문적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급기야는 미국서 배운 것 아는 체 말고  사이트하나 열어 강의나 하는 것이 낫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된 것이지만요.  격려해 주고 이런 인재들을 양성하는 것과 작품의 분석과는 다른 것입니다. 더구나 12월 출판을 위해 여론을 듣겠다는 태도는 그야말로 저에겐 속임수로 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관계되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글들이 여론을 듣는 태도를 전혀 보여주지 않았거든요.  일단 작품이 되어 나오면 오직 작품만이 있으면 되고 다른 변명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하지 못할 형편이면 더 많은 습작과 사고를 통하여 예술성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제 말이 기분좋을리야 없겠지만 여러분이 그렇게 동정이 필요한 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청년성가집에 관한 글을 쓰면서 상당히 자유롭게 임했습니다.  분석을 하느니 만큼 첫째 아무런 선입견 (그렇다고 배려도 하지 않았습니다) 없이 청년성가집의 음악 그 자체만을 다루었습니다.  있는 음악 그대로 보았다는 겁니다. 예술가는 아무런 설명이나 변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작품으로 자신이 꼭 말하고 싶은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예술가 아닌가요?  이렇게 만든 성가를 전통성가라 하든 생활성가라 하든 아니면 어떤 이름으로 이 성가를 지칭하든지 저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성가집에 포함된 노래들이 과연 성가의 내용을 담고 있는가? 음악적으로 그런 대로 눈감을 만 한가 (그런 대로 따뜻한 시선 아닌가요?)? 전례 안에서 음악의 봉사적 기능을 수행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가 다루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반응을 보이고 있는 음악의 형식 문제만 해도 그렇죠.  교회에서는 전통성가와 현대적인 것과의 균형을 요구하는데 이 성가집에서는 전통성가를 전적으로 배제하여 균형을 잃었다는 것을 제가 지적한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런 형식의 노래들이 거의 100% 기도의 노래라기 보다는 연주를 위한 것이라고 지적하며 비판했습니다. 젊은이들이 좋아한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전례에 맞지 않는 노래들이기 때문에요. 심지어는  그 중의 20여 곡은 제가 성가라 부르기를 거부했습니다 (문제점 2-끝).

 

 어떤 분은 제가 지적한 노래들을 자꾸만 생활성가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노래들은 성가집에 수록되어 있을 뿐 성가가 아닙니다. 제가 쓴 문제점 (2-끝)의 글을 보시고도 아직도 수긍하지 못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제 글에서 한번도 생활성가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제 글에 대한 비판은 여러분이 직접 제가 지적한 작품들을 한번이라도 보고 사실인지 확인을 한 뒤, 제가 글에서 다룬 주제를 가지고 비판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시원찮게 글을 쓰는 줄은 알지만 그래도 잘 보시고 이런 글들의 교환은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다는 심정입니다.

 

저는 분명히 말하지만 전통 성가건 생활 성가건, 무슨 성가건 그 명칭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명칭이 굉장히 잘못 되어 있다는 것도 여러분의 반응에서 느낍니다. 생활성가라고 불리는 것들 중에도 전례용이 많기 때문에 이런 곡에는 우리가 아는 생활성가라는 이름을 부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명칭이 어떻든 성가로서 갖추어야할 특질들을 갖춘 음악은 다 받아들입니다. 또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성가이든 간에 성가의 특질들을 못 갖추었다면 비록 전통성가라고 되어 있더라도 저는 이의를 달 것입니다. 저도 미사 때 성가대를 지휘하면서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전통성가곡이 있었는가 하면, 많이 애용한 소위 생활성가들도 있었습니다.  밝고 신나면서도 음악적으로 훌륭하고 봉사적 기능을 다 하는 곡들이라면 사용해야죠. 무슨 성가라는 명칭, 더구나 잘못 된 명칭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복음의 내용이나 그날의 축일 혹은 전례시기의 주제가 ’기쁨’이라면 당연히 즐겁고 밝은 분위기의 성가를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분위기의 성가는 전통성가에도 있고 생활성가 등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활성가는 밝고 신나는 곡이고 가톨릭 성가는 우중충하고 재미없는 것이라는 구분을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제대로 못 불러서 그렇지요. 어떤 성가라는 명칭에 구애받지 마시고, 정말 이 성가가 신자들의 기도를 도와주는 것이며, 교회 전례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지(내용 면에서), 성가로서의 특질을 가졌는지 잘 살피셔서 사용하시면 되겠습니다. 정말 꼭 표현하고 싶은 것을 음악으로 만들어 낸 것과 이런 곡을 쓰면 아이들이 환장하겠지 생각하며 작곡하는 것은 음악의 소재에서나 동기에서나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면에서는 제가 아마 다른 글에서 생활성가를 언급했을 것입니다.  생활성가 전부가 아니라 위의 경우와 같이 전례음악의 특질을 못 갖춘 음악을 저는 전례 때에 사용하지 말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말이 난 김에 신부님들 이야기 좀 해야겠습니다. 제가 올리는 글하고 본당에서의 현실이 달라 고민하는 분들의 글을 보았습니다. 전례음악이야기만 하겠습니다. 신부님들은 전례음악에 대한 기본적인 것을 신학교에서 배웁니다. 사제가 되기 위해 많은 것을 배워야 하다 보니 전례음악에 배당되는 시간은 학부 1학년 1,2학기 때 일주일에 한 시간씩일 겁니다. 신학교 전체 6-7년 생활을 통해 2학점 정도입니다. 그리고 매 주에 한번씩 다음 주일에 부를 성가연습을 합니다.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겠죠.  신학교마다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제가 가르친 곳에서는 그랬습니다. 만약 이것으로 족하다면 아무나 신학교에서 전례음악을 가르칠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교회음악을 더 깊게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나가는 신부님들이 계시고 귀국 후에는 공부한 것을 한국 교회에 제공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흥미를 가지고 계속 연구하시어 전문가 못지않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사목에 바빠 전례음악에까지 신경을 못쓰시는 신부님들이 더 많을겁니다. 예를들어  제가 이 게시판에 올린 글들의 여러 내용은 제가 신부되기 전까지는 한번도 배운 적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면 이해가 되겠습니까? 신부님들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 하고 틀린 조치를 하신다면 그 이유는 사목적인 것 때문입니다. 사목상 신자들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느끼시면 원칙을 응용하셔서 본당에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여러분의 표현대로 죄가 되는 성질의 것은 아니겠죠?  그러나 원칙의 적용이 잘못되는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가 승인하지 않고 금하는 변형된 ’주님의 기도’ (예: 에레스 투?)를 사용하는 것 말입니다. 저 역시 전례음악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어 계속 공부하듯이 다른 신부님들도 계속 생각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청년게시판의 어떤 글을 읽으면서 우리 가톨릭 청년들의 문화는 이 정도인가? 하고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류오민님의 글을 읽고 모두 그렇지 않다고 해서 한 시름 놓았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이제 저도 굿 뉴스에서 은퇴할 것을 천천히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부족한 표현으로 여러 사람들을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든다면 청년 성가집에 관한 글 이전에 쓴 글들도 똑 같은 혼란만 불러일으키지 않을는지 걱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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