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모차르트의 오르간 솔로 미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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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우 | 작성일2000-07-31 | 조회수594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요즘 성모승천대축일을 맞아 모차르트의 "오르간 솔로 미사"를 연습하고 있습니다. 마침 악보 앞면에 해설이 나와있어서 한번 한글로 옮겨보았습니다. ---
모차르트의 짧은 생애동안, 1776년은 다음과 같은 작품을 포함해서 교회음악에 있어서 풍부했던 한해이다.
3월: 연도(K243) 작곡 4월 7일: 잘츠부르크 대성당에서 미사 롱가(K262)를 초연 6월: 두 개의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봉헌곡 "모든 이여 오너라"(K260) 11월: 크레도 미사(K257) 작곡 12월: 미사 브레비스(K258, K259) 작곡
위에 열거된 결과물을 살펴볼 때, 우리 중에는 이들 작품을 한데 묶는 놀라운 요소를 발견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보다 대중에게 다가가려는 모차르트의 의도적인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당시 대주교 집전의 미사에서 길이가 짧고 복잡하지 않은 음악이 선호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모차르트가 볼료냐의 파드레(역주, 사제) 마르티니에게 보낸 서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내 아버지는 대성당의 음악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것에 나에게 다양한 교회음악을 작곡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음악은 이태리와는 많이 다릅니다. 기리에, 글로리아, 크레도, 독서후 소나타(역주, 당시에는 독서후에 기악 소나타를 연주한 것 같음), 봉헌곡 (혹은 모텟), 상투스, 아뉴스 데이. 이것들을 다해서 45분을 넘으면 안된답니다. 이것은 심지어 대미사에도 적용이 됩니다... 동시에 미사곡은 모든 악기(트럼펫, 팀파니 등)를 써야합니다.
이같은 편지가 크레도 미사의 작곡 직전인 1776년 9월 4일에 쓰여졌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다. 동일한 편지에서 모차르트는 이런 종류의 미사들이 "특별한 연구"를 필요로 한다고 했으며 이런 작품들이 대중적인 성공을 하게 된 것은 그자신의 치밀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그의 다른 기악음악들은 당시 그다지 빛을 발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의 교향곡, 협주곡, 그리고 세레나데 들은 잘츠부르크의 자그마한 단체들(친구, 후원자(하프너가 등), 대주교 궁정의 연주회)을 위해 쓰여졌으며 어느 경우이든 청중은 한정되었다. 그러나 종교음악의 경우는 실정이 달랐다. 대규모의 주교좌성당, 성 피터 수도원 교회, 혹은 학교내의 교회 등에서 수백의 신자들이 모차르트의 최신작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모차르트의 명성은 곧 잘츠부르크 전역과 북부 오스트리아에까지(즉 대주교 관할권이 미치는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우리는 이들 작품의 초기 판본을 람바흐 수도원, 크렘스뮌스터 수도원, 성 플로리안 수도원, 쉴리어바흐 수도원, 그문덴 본당, 몬트제 수도원의 교회 등 북부 오스트리아의 전역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아이젠슈타트(에스테르하지 왕자 소유)의 하이든이 활동하던 교회에서도 크레도 미사나 브레비스 K258, K259가 발견되었다. 이 사실로부터 잘츠부르크를 포함한 근교의 수천명의 사람들이 교회음악을 통해 모차르트를 알게 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기악곡의 경우는 모차르트가 직접 연주를 했던 지역인 잘츠부르크나 아우그스부르크, 만하임 등을 제외하며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음악의 경우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전지역에서 연주되어진 것이다. 크레도 미사같은 작품은 1800년경에는 오스트리아 전역에 잘 알려졌다. 이들 미사곡이나 교회음악 작품은 악보를 매개로 하여 알려지게 된 것인데 그 누구보다도 아버지인 레오폴드 모차르트의 노력이 크다. 그는 때때로 악보를 몬트제 등에 팔아 넘긴 듯 하다. 어찌되었든, 1776년의 작품들은 가톨릭 지역인 오스트리아와 남부 독일에서 오랜기간동안 진정으로 인기를 얻었다.
반면에, 그것들은 아직까직도(역주, 글을 쓴 시점이 1973년임) 영국이나 미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것에는 많은 복잡한 이유가 있는데 그중에 두 개만 지적해보자면: (1) 19세기에 들어와서 오스트리아 예술의 하나인 종교음악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과 (2) 교회음악이었던 이들 작품이 정작 영국과 미국의 가톨릭교회에서는 연주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규모 오케스트라로 음악이 연주되는 전통은 앵글로-색슨계통의 국가에서는 다소 생경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차르트의 이러한 작품들은 그 중요성 때문에 연구자들 사이에서 몇 장의 음반을 통해 알려졌을 따름이다(역주, 그러나 현재는 많은 음반이 쏟아지고 있으며 특히 그러한 주도권을 영미권에서 잡고 있는 관계로 글의 내용과 상이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하여도 모차르트의 종교음악 작품은 오늘날에도 많이 녹음되어지지는 않는데 그 주요한 이유는 어떤 문화적인 편견이 존재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작품의 간결함에서 오는 예술성의 부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보다 많은 악보들이 교회나 연주회장에서 연주됨으로 해서 앵글로-색슨 대중에게 호소력을 지니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쾨헬번호 259의 다장조 미사 브레비스(역주, 간결한 미사라고 번역되며, 어느 특정 문장이나 단어를 반복하지 않고 한번씩만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는 악보기재의 경제적인 면에서 앞선 작품(K258)의 전례를 따르고 있다: 트럼펫, 팀파니, 현악기, 오르간 그리고 사성부 (솔로진과 합창). 트럼본이 없는데 "콜로레도 전통(즉 간결함)"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이 다른 작품보다 남다른 점은 교회음악의 기준 조인 C장조(장엄미사의 기준조)를 많이 사용한다는 점이다. 작품은 "오르간 솔로 미사"로 알려져있는데 오르간 솔로는 베네딕투스에 나오며 오스트리아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일년 먼저 작곡된 하이든의 미사 브레비스 S. Joannis de Deo는 이와 비슷한 오르간 솔로를 가지고 있다. 모차르트 미사는 전반적으로 매우 오스트리아적이다. 경쾌한 아뉴스 데이를 살펴보면, 노래하는 듯한 제 1 바이올린 파트와 피치카토를 연주하는 베이스 파트는 어찌보면 바로크의 특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특성들 때문에 남부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교회에서 많이 연주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글쓴이 1973년 6월 H. C. Robbins Landon 옮긴이 2000년 7월 김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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