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국악성가를 전례 안에서 부를 수 없다니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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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수근 | 작성일2004-08-08 | 조회수2,333 | 추천수17 | 반대(0) 신고 |
+ 찬미 예수님! 안녕하십니까? 로마에서 무지카 싸크라 입학을 준비하고 있는 예수 고난회 강수근 신부입니다. 며칠 전 한 자매에게서 이런 메일을 받았습니다. 이 자매는 국악을 전공하고 오래전부터 전례음악의 토착화를 위해 헌신해 오고 있는 아주 열심한 신자입니다. 다음은 메일의 주요 내용입니다. “3박4일로 성음악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성 세실리아 음악협회에서 주관 ) 머리에 그레고리아 성가가 가득차 맴돌고 있습니다. 저로써는 처음 접해보는 성음악 연수였는데요, 너무 많은 것이 한꺼번에 쏟아져 저에게 덮쳐 버렸습니다. 그레고리아 성가만이 성스러운 전례에 맞는다고 믿고 황홀해하는 교수님들의 외침... 사방에서 모인 지휘자,반주자, 성가대들... 이들 속에서는 그 외의 모든 미사곡과 성가곡들은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레고리아 성가 이상의 곡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더구나 현재의 국악은 전통 음악 외에 나머지는 아예 존재하지 말아야 하고 현재 행하는 서양 음악이 우리나라 음악이다 라는 이야기 앞에서 저는 할말을 잊은 채 가슴속에서는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런가요, 신부님? 서양성가를 사랑하는 열정의 십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이라도 우리 것을 알아보려는 자세는 그만두고라도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자신들의 것을 비웃고 있는 이들 모습 속에서 ... 슬픔, 분노, 그리고 반성의 마음... 지금 저의 이 미숙한 마음들이 씨앗이 되어 점점 성숙해 질까요...? 거룩하고 성스러운 음악이란... 인간적이지 않고 인간과 신 사이의 음악이란... 저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교회음악을 이끌어간다는 사람들이 "국악은 교회 성음악으로 연주할 수 없다 (적합하지 않다)" 라고 한 말이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이 메일을 읽고 처음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쳤다가 곰곰 생각해보면서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 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런 얘기를 가끔 듣곤 하지만 너무 무지한 생각이다 싶어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사적인 자리가 아니고 공식적인 연수회 안에서 이런 언급이 있었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전례적으로나 성음악 이론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을 벌여 그 정당성이나 허위성을 밝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전례음악 안에서의 국악사용에 대한 타당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교회 전통 성음악이 현재의 한국 전례 안에서 가지는 비중, 그리고 끝으로 한국 성음악 진작을 위하여 무엇이 필요한지 등에 대한 제 나름의 의견을 피력해볼까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첫 번째 문헌인 전례헌장 제6장 “성음악” 부분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전 성교회의 전통적 음악은 다른 모든 예술적 표현 방식보다 뛰어나며, 그 가치를 다 평가할 수 없는 재보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특히 말과 결부된 거룩한 노래로서, 성대한 전례의 필요하고도 불가결한 구성 요소를 이루기 때문이다.”(전례 112항) 물론 여기서 “전 성교회의 전통적 음악”이란 그레고리오 성가와 다성 음악을 일컫는 것이고, 그 언어는 라틴어 입니다. 즉 라틴어 전례 안에서는 그레고리오 성가나 다성 음악이 그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보다 주의해야할 부분은 “말과 결부된 거룩한 노래” 라는 표현인데, 즉 성가는 그 성가가 담고 있는 가사 즉 전례문에 봉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 가락과 가사가 서로 잘 어울려 지금 노래하고 있는 전례기도문을 그 전례에 참여하는 이들이 영적으로 더 깊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라틴어가 아니라 한국말로 미사를 드리고 있는데, 한국어로 된 전례문을 우리에게 잘 전달해줄 수 있는 음악기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독일음악일까요, 이태리 음악일까요, 오스트리아 음악일까요, 프랑스 음악일까요, 영국이나 미국음악일까요, 아니면 그레고리오 성가나 다성음악 기법일까요. 아니면 국악일까요. 모두 다 가능성이 있지만 한국말은 한국 가락에 얹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국악을 전례 안에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인지요? 같은 항에 이런 언급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교회는 필요한 성질을 갖춘 건전한 예술의 모든 형태에 찬동하며, 또한 그것을 전례에 도입할 것을 허용한다.” 즉 국악도 충분히 필요한 성질을 갖춘 건전한 예술이며 전례에 도입될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토착화에 관해서 언급한 119항에서는 이 점이 더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좀 길긴 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전체를 인용해 보지요. “어떤 지방, 특히 포교 지방의 국민들은, 그들의 종교생활이나 또는 사회생활에 있어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 고유한 음악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종교적 감정을 형성하기 위해서나, 그들의 특성을 전례에 적응시키기 위해서, 제39조 및 제40조의 정신을 따라, 그들의 음악에 정당한 평가와 합당한 자리를 부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에게 음악적 소양을 습득케 하는 데 있어서는, 그들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그 국민의 전통적 음악을 학교에서나 거룩한 행사에서 장려할 수 있게 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전례 119) 그런데 한국에서는 국악을 전례 안에서 사용하면 안된다니요? 전례헌장의 성음악 규정을 보완하기 위하여 1967년에 발표된 <성음악에 관한 훈령>에 보면 “멜로디로 장식되어야 할 그러한 부분들, 특히 성영집을 모국어로 번역함에 있어서 전문가들은 그 모국어 번역이 라틴어 본문을 충실히 따르고 성가에 적절히 사용되게끔 배려할 것이다. 또 전문가들이 이 사업을 할 때에는 각 언어의 성질과 법칙이며 또한 각 민족의 특유한 성품과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음악인들은 새로운 멜로디를 작곡할 때는 성음악의 법칙과 함께 이러한 전체적 여건을 유의해야 한다.”(성음악 훈령 54) 여기에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되어있지요. 한국말에는 어떤 음악이 어울릴까요? 내친 김에 61항도 봅시다. “성음악의 올바른 적응은 특유한 음악의 전통이 있는 지방, 특히 전교지방에서 전문가 측의 각별한 준비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거룩한 것에 대한 감각을 적절한 방법으로 옳게 그 민족의 정신과 전통과 특이한 표현양식과 현명하게 연결 및 일치시킬 수 있는지가 문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명과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전례와 교회의 음악전통, 또한 그들이 일해 주는 각 민족의 언어와 민요 및 특수한 표현양식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성음악 훈령61) 이 규정을 자칫 전례음악 토착화를 규제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전례헌장 119항에서 천명한 “그 국민의 전통적 음악을 학교에서나 거룩한 행사에서 장려할 수 있게 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취지에서 보면 오히려 전문가들이 잘 준비를 해서 토착화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준비는 여기 제시된 대로 전례, 교회의 음악 전통, 국악에 대한 충분한 지식입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 전례음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전례나 교회전통음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반해 국악에 대한 지식은 현저하게 부족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그러면 이제라도 팔을 걷어붙이고 서양음악을 공부하던 열정만큼 국악을 공부하여 토착화에 기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지한 상태에서 국악은 전례음악에 합당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리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오늘날 국악이 제 자리를 잃게 된 이유는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근대사(특히 36년간의 일제 강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 잘못된 역사를 계속 고수해야 합니까? 이제는 그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할 때가 아닌지요. 특히 교회 안에서 예언자적인 소명을 가지고 국악이 제 자리를 잡아가도록 한다면 우리는 한국 사회 전체에 큰 문화적 공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 소망은 아름다운 우리 성가들이 많이 만들어져 전례 안에서 불리워지는 것을 보는 일입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남의 나라 성가를 번역해서 부를 것입니까? 굳이 우리가 부르지 않아도 그 성가들은 제 나라들에서 잘 불리워질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락으로 주님을 찬미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200년을 다 채우고 300년대로 향해 나아가고 있는 한국교회가 아직도 자기 전례음악 하나 책임지지 못하고, 늘 이 나라 저 나라 것을 꾸어 쓰고 있다면 참 초라한 노릇이 아닙니까? 국악은 하느님께서 우리민족에게 베풀어주신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는 그 가락으로도 당신을 찬미해주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등한히 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는 일이 될 것이고, 나중에 그 책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쯤으로 국악이 전례음악에 도입되어야 하는 당위성이 설명되었다고 보고, 이제는 그레고리오 성가와 다성음악이 현재 교회 안에서 가지는 역할을 살펴볼까 합니다. 제가 지금 입학하려고 하는 “무지카 싸크라”는 바로 이 음악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곳입니다. 저 역시 그 중요성을 알고 있고 그래서 좀 더 전문적으로 배우려고 늦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 공부를 시작한 이유는 누군가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국악을 포기하고 서양음악으로 전환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전통 성음악을 어떻게 국악과 접목시킬 수 있는지를 연구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앞으로 한국에서의 성음악 활동은 서양의 성음악과 국악을 동시에 알아야 한다는 전통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앞서 밝힌 대로 교회의 이 전통 성음악들은 라틴어 전례 안에서 그 빛을 발합니다. 그러나 이미 라틴어 전례는 옛 전례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 세계 각국의 전례는 모두 자기 나라 말로 진행됩니다. 한국에서도 물론 한국어 전례가 상식화되어 있습니다. 만일 지금 다시 모든 미사를 라틴어로 지내야 한다고 한다면 아무도 그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어 전례 안에서 오직 성가만은 라틴 성가를 그것도 아주 옛날의 성가였던 그레고리오 성가와 다성음악을 도입해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유럽 교회라면 이것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유럽의 언어들은 대개 라틴어에서 파생되어 나왔고, 또 대개 학교에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본적으로 라틴어를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라틴어가 그리 생소하지 않습니다. 마치 우리가 한국어 고어를 대하는 것과 흡사하지요. 그래서 거기서는 라틴어 성가를 부르면 대강 그 뜻을 이해합니다. 이태리에서는 특히 그러하지요.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전혀 다릅니다. 라틴어 성가를 부를 경우, 대부분의 신자들이 전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것을 전례 안에서 부를 경우, 말과 결부된 거룩한 노래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지요. 즉 뜻도 모른 채 그저 선율만을 감상하는 음악 감상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면으로 전례원칙에 위배되는 상황입니다. 물론 이 성가들을 이해하고 거기서 영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례 안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상황이고, 일반 본당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전례 안에서 이 성가들을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오히려 전례원칙을 거스르게 되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라틴어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국말로 번역해서 부르면 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가능하지요. 그러나 이것 역시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올바른 해결책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라틴어를 유럽의 언어(특히 이태리어)로 번역하는 일은 비교적 쉽습니다. 우선 단어가 비슷하고 어순이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어는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특히 어순이 다르지요. 그러면 번역하여 부를 경우, 선율과 가사가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보지요. 부활성야 빛의 예식 때, 초를 들고 입장하면서 세 번 반복해 부르는 아주 간단한 노래가 있습니다. 라틴어로는 "Lumen Christi" 하고 노래합니다. 한국어로는 “그리스도의 광명”이라고 부릅니다. 보시다시피 단 두 단어뿐인데도 어순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립니다. 그러면 멜로디와 가사가 정 반대로 붙게 되는 것이지요. 짧은 가사가 이렇다면 긴 가사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이 멜로디와 가사가 불일치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 노래들은 말과 결부되어 작곡된 것이고 그것이 곧 생명력인데 이와 같이 그 말이 달라질 경우, 결국은 그 생명력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거꾸로 뒤집어 생각해봅시다. 만일 한국의 가곡이나 가사나 시조, 판소리, 민요 등을 영어나 이태리어나 독어로 번역해 부른다고 가정해봅시다. 과연 그 맛이 얼마나 제대로 전달되겠습니까? 바로 이런 이유로 번역한 성가들은 원곡의 취지를 제대로 살릴 수 없게 되는 것이고, 따라서 모든 성가는 원어로 부르는 것이 원칙이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레고리오 성가와 다성음악만을 고집하는 이들은 성음악의 훈령을 언급하며, 전례음악의 규정과 원칙이 그러하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그러합니다. 현행규정에서는 그레고리오 성가와 다성음악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라틴전례 안에서 라는 조건이 붙어 있는 것이고, 모국어 전례 안에서는 그 가능성을 열어놓았을 뿐 의무적으로 사용해야한다는 규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직접 인용해보지요. “영혼의 사목자들은 지방의 형편 및 신자들의 사목적 유익, 그리고 각 언어의 성질을 고려해서 과거 수세기 동안 라틴어로 쓰여진 가사를 위해서 작곡된 성음악의 유산 일부를 라틴어로 집전하는 전례의식 외에 또한 모국어로 집전하는 의식에도 사용할 수 있다.”(성음악 훈령 51) 이 규정이 어떻게 전례 안에서 그레고리오 성가와 다성음악을 반드시 불러야 한다로 둔갑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오히려 그 다음에 나오는 항목들은 새로운 전례음악의 작곡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작곡에 더 많은 항목을 할애함으로써 그 비중을 더 높이 두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한 대목만 들어보지요. “작곡가들은 새로운 자기 작품에 책임성 있는 노력을 기울이어, 경신례를 위해서 참된 유산의 재보를 교회에 바쳐온 음악적 전통을 이어 받도록 할 것이다. 그들은 옛 작품 및 그 종류와 특성을 연구해야 하지만 그러나 또한 거룩한 전례의 새 법칙과 요구들도 깊이 생각하고 지켜야 한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형식은 현행 형식에서 어느 정도 유기적으로 발전되며 또 새로운 작품은 교회의 음악적 재보의 새로운 부분을 형성하게 되고 옛 유산의 대열에 끼는 일이 부당하지 않게 된다.”(성음악 훈령 59) 이건 무슨 뜻인가요? 이미 옛날 성가는 옛 전례에 관계된 것이므로 그 형태를 그대로 모방할 것이 아니라 개혁된 새 전례의 지침에 맞추어 새롭게 작곡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까? 그리고 새로운 작곡이 지금으로서는 새로운 곡이지만 그것이 나중에는 교회음악의 한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된다는 뜻이지요. 만일 우리가 새로운 곡들을 만들어 부르지 않고 옛날의 노래들만 부르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현실을 살지 못하고(물론 미래도 없지요), 과거에 자신을 가두어 놓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상의 이유로 그레고리오 성가나 다성음악은 교회의 중요한 음악유산이긴 하지만 한국교회의 현실에서는 그것이 주류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다만 전통을 배우는 한 부분으로서 고유한 역할을 지닐 수는 있겠지요. 예전에 교회에서 이런 음악들을 불렀으므로 우리도 특별한 경우에 이런 음악을 부르면 좋다는 정도의 교육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이 음악만을 고집하여 모든 전례음악을 이런 식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좀 무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 전례음악의 먼 미래를 생각할 때 현실적으로 무엇이 가장 시급한 일이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전례음악의 레파토리를 늘리는 일이 가장 절실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실제로 레파토리가 너무 부족해서 개신교회의 성가들을 무분별하게 전례에 도입하는 것이 오늘의 성가대 현실 아닌지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양질의 전례성가들이 많이 만들어져 보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이 새로운 곡들이 한국음악적 요소를 담고 있으면 좋겠구요. 즉, 90% 서양음악적인 요소에 10% 국악적인 요소를 가미한 곡부터, !0% 서양음악적인 요소에 90% 국악적인 요소를 지닌 곡까지 다양한 모습의 우리 성가들이 많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진작하기 위한 의식 개혁과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이상의 설명은 제 자신의 진솔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며, 성음악에 종사하는 이들을 폄하하거나 비판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누구나 다 자기 분야는 소중한 것입니다. 따라서 전체적인 한국교회의 성음악 발전을 위하여 서로 존중하고 돕고 협력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내가 하는 일만이 소중하고 다른 이들이 하는 노력은 성음악에 맞지 않다는 편협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면 쓸데없는 갈등에 힘을 소진하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 지날 달 가톨릭 신문에서 성음악 분과 위원회 결성에 대한 소식을 읽었습니다. 저도 진작부터 그런 생각을 가져 왔었기에 진심으로 이 위원회의 탄생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고, 앞으로 다양한 활동으로 한국 성음악의 전폭적인 향상을 주도하는 기폭제가 되어주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도 기회가 된다면 작은 힘이나마 기꺼이 보탤 것입니다. 쓰다보니 길어졌네요.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고, 다양한 의견 개진을 기대해봅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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