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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열두 소예언서의 지혜: 하까이 예언서

860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5-09-04

[열두 소예언서의 지혜] 하까이 예언서

 

 

시대 배경의 이해 

 

지난 호, 유다의 멸망을 배경으로 삼았던 오바드야서에서는 시대를 짐작할 만한 구체적인 날짜 언급이 없었던 것과 달리 하까이 예언서는 시대 배경을 상세히 표현해 줍니다. “다리우스 임금 제이 년 여섯째 달 초하룻날”(1,1) 다리우스 임금 제2년은 현대 달력으로 환산하면 기원전 520년이 됩니다. 이 시기는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 키루스의 칙령으로 유배 중이었던 유다 백성이 본국으로 귀환한 이후입니다. 

 

키루스의 귀환 조치를 유다 왕조의 회복과 백성의 자유라는 구원의 메시지로 여기며 들뜬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지만, 바빌론에 머물던 유다인들 모두가 귀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고국으로 반드시 돌아가라.”라는 명령이 아니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고국으로 돌아가도 좋다.”라는 권고에 가까운 허락이 칙령의 주된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49년이란 시간을 바빌론에서 보낸 유다인들 가운데서는 정착한 유배지에서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이어간 사람도 있었기에 그런 사람들에게는 폐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예루살렘의 상황이 더 암담해 보이기도 했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세스바차르가 이끈 1차 귀향 공동체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이후 기원전 520-518년 다윗 왕실의 후손인 즈루빠벨과 대사제 예수아를 지도자로 세운 집단이 2차로 귀환합니다. 이 두 번째 집단이 귀환했던 시기가 바로 하까이 예언자가 활동했던 시대입니다. 그럼, 하까이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주님의 집을 짓는 일”(1,14) 

 

유배에서 돌아온 귀환 공동체의 가장 시급한 일은 폐허가 된 예루살렘 도성을 복구하고 무너진 성전을 다시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빈곤과 흉작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과 다양한 사회 계층 안에서의 갈등과 분열로 시급한 당면 과제는 자꾸 미루어졌습니다. 물론 자신의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성전 건축 사업을 후원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백성의 처지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1,4) 아마도 유다 백성이 자신의 집은 장식으로 덧씌운 집에 살면서도 하느님의 집에는 관심이 없었나 봅니다. 성전 재건 사업을 미루고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지만 그렇다고 살림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은”(1,6 참조) 이유가 성전 재건을 미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경고하십니다. 

 

하까이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유다의 지도자들과 백성은 과연 귀여겨들었을까요? 

 

아마 지금까지 소개된 예언자들 가운데 예언자의 신탁을 귀여겨들은 경우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말씀을 듣기를 거북해하며 예언자를 비난하고 박해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까이 예언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과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와 나머지 모든 백성은,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과 주 저희 하느님께서 보내신 하까이 예언자의 말을 잘 들었다.”(1,12) 놀랍게도 예언자의 설교를 순순히 받아들인 이들은 주님의 집을 짓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1,14 참조). 이날이 “여섯째 달 스무나흗날”(1,15)이라고 하니 하까이의 예언이 전해진 지 24일 만에 백성이 성전 재건을 착수한 것입니다.

 

 

“이 집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2,9) 

 

하지만 성전을 새로 짓기 시작한 지 약 한 달이 지났을 때, 기초가 놓인 성전의 모습에 사람들은 실망했습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지은 첫 번째 성전에 비해 너무나 초라했기 때문입니다. 화려하고 장엄했던 첫 성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노인들은 두 번째 성전이 도저히 마음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런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시며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이 집의 옛 영화를 본 사람들이 남아 있지 않느냐? 지금은 이 집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너희 눈에도 있으나 마나 하지 않느냐?”(2,3)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낙담한 백성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며 당신께서 그 집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고 평화를 주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새 성전이 비록 겉모습으로는 솔로몬의 성전보다 화려함이 턱없이 부족할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현존을 통해 그 안에 자리할 영광은 이전의 성전을 압도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집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2,9) 결국 성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뛰어난 설계나 화려한 재료 혹은 압도적인 크기와 웅장함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현존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제 성전이 세워지고 이스라엘 백성이 적법한 제물을 하느님께 봉헌하면,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축복하시고 풍요롭게 해주실 거라 예고하며 이렇게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오늘부터 내가 너희에게 복을 내리리라.”(2,19)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루키즘(Lookism)이라 하고, 우리말로 번역하면 외모지상주의가 됩니다. 하느님이 주신 신체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가꾸어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에 집착하여 외면을 꾸미고 치장하는데 지나치게 몰입하면, 자칫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는데 소홀해질 수 있습니다. 집회서도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사람을 칭찬하지 말고, 겉모습을 보고 그를 혐오하지 마라.”(집회 11,2)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까이 예언서는 우리에게 성전의 외적 화려함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가득 찬 ‘하느님의 현존’임을 가르쳐 줍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7 참조). 이 성전에도 중요한 것은 화려한 외관이 아니라 내면에 머무시는 ‘하느님의 현존’이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사람들의 시선과 외적인 평가에 연연해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심으로 예수님을 몸 안에 품으셨고,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조차도 마음속에 머무시는 하느님을 의식하며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참조 루카 2,19.51)하셨습니다. 이렇듯 성모님의 우선순위는 외부와 겉모습이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자기 내면이었습니다. 성모님을 따르는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의 현존으로 충만히 채워진 성전이기를 기대합니다. 

 

[성모님의 군단, 2025년 8월호, 여한준 롯젤로 신부(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대구 Se.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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