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 신약성경이 전해주는 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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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3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6-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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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이 전해주는 환대] 1장. 예수님을 맞이하듯
이번 주부터 우리는 신약성경이 말하는 ‘환대’에 관하여 살펴볼 것입니다. 먼저 환대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말 사전에서는 환대(歡待)를 “누군가를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하는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서 ‘후하게 대접하는 일’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개념은 누군가를 ‘반갑게 맞이하는 일’입니다. 환대란 누군가를 기쁘게 맞아들이고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일종의 ‘환대’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1-12).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여부를 ‘맞아들이다’ 또는 ‘받아들이다’라는 표현을 통해 나타내고 있는데, 이 표현들은 누군가의 인격을 온전히 수락하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세상의 빛”(요한 8,12)으로 오신 분을 이따금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기쁘게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신앙이요,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환대란 결국 믿음의 행위에서 파생됩니다. 참된 신앙인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이듯, 다른 이들도 기쁘게 맞아들일 줄 압니다. 마치 예수님을 대하듯 그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예부터 손님을 정성껏 맞이하고 대접하는 일을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 왔습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 가운데 손님 접대의 중요성을 자주 언급합니다(로마 12,13; 히브 13,2; 1티모 3,2; 티토 1,8; 1베드 4,9 참조). 여기서 환대의 개념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필록세노스’(φιλόξενος)의 어원을 살펴보면, 이 단어는 사랑을 뜻하는 ‘필로스’(φίλος)와 낯선 사람 또는 외국인을 의미하는 ‘쎄노스’(ξένος)의 합성어로, 나그네나 이방인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이를 사랑으로 대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환대는 반드시 지인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가 잘 모르는 이를 접대하는 것에서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특히 사회적 약자들이 우리가 환대해야 할 주요 대상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당신의 형제로 삼으셨고, 심지어 당신 자신과 동일하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중략)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38-40).
우리가 예수님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환대’의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그분의 형제로 여겨지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받아들이는 ‘환대’의 덕목을 실천하는 일에도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그들을 기쁘게 맞아들이고 정성껏 대접하다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 가운데 계신 예수님을 접대하고 있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일까요?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 (히브 13,2). [2026년 1월 4일(가해) 주님 공현 대축일 인천주보 2면, 정천 요한 사도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학처장)]
[신약성경이 전해주는 환대] 2장. 하느님의 환대 방식
우리 교회가 ‘환대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면, 대체 그 환대 방식을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요? 바로 하느님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시는”(사도 10,34-35)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초대에 제한이 없다는 사실이 ‘혼인 잔치의 비유’(루카 14,15-24 참조)에서 드러납니다. 앞서 초대받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핑계로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자, 집주인은 초대의 범위를 넓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루카 14,21)은 물론이고,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루카 14,23) 잔칫집을 가득 채우려 합니다. 누구든지 초대에 응하기만 하면, 집주인이 차린 풍성한 음식을 먹으며 잔치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초대는 일부가 아닌 모든 이를 향합니다.
우리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참조)에서 하느님 환대의 구체적인 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가산을 탕진해 버리고, 궁핍한 상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정신이 든 아들은 아버지께 되돌아가기로 마음먹습니다. 더 이상 ‘아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던 그는 아버지 집의 ‘품팔이꾼’이라도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런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반전일 뿐 아니라, 가히 충격적입니다.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먼저 알아본 아버지는 아들이 다다르기도 전에 그에게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가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그를 용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며 ‘아들’이 이전에 누리던 권위와 지위를 다시금 회복시켜 줄 뿐더러,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아 성대한 잔치를 벌입니다. 괘씸한 아들이 뭐가 이쁘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것일까요? 아버지의 ‘미련한’ 모습은 하느님의 환대가 도무지 용서받지 못할 것 같은 죄인에게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신 성품을 닮은 외아들 예수님께서도 풍성한 잔치를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마르 14,24), 곧 우리 모두를 위하여 당신의 살과 피를 기꺼이 내어주는 잔치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54-55). 예수님의 환대는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목숨까지 내어주는 희생이 오히려 사람을 살리고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이러한 내어줌의 잔치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누구나 환대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완성합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성대한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귀한 대접을 받는 손님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잔치의 주인은 참된 양식과 음료로 당신 자신을 내어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직접 손님들의 시중을 들겠다고 하십니다. 이보다 더 큰 환대를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 [2026년 1월 11일(가해) 주님 세례 축일 인천주보 2면, 정천 요한 사도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학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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