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 부 “저는 믿나이다” - “저희는 믿나이다”
- 제 2 부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
- 제 3 장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
- 제1절 저는 믿나이다
- III. 신앙의 특성
제 1 부 “저는 믿나이다” - “저희는 믿나이다”
- 신앙은 은총이다
- 153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마태 16,17)라고 밝히신다.16)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초자연적인 덕이다. “이와 같은 믿음이 있으려면 하느님의 도움의 은총이 선행되어야 하며, 성령의 내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성령께서는 마음을 움직이시고, 하느님께로 회개시키시며,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고 ‘진리에 동의하고 믿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을 모든 이에게 베푸신다.’”17)
- 신앙은 인간 행위이다
- 154 믿는다는 것은 성령의 은총과 내적인 도움으로만 가능하다. 그렇지만 믿는 것이 참으로 인간적 행위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따르는 것이 인간의 자유나 지성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관계에서조차 우리가 상호 일치를 위해 타인이나 그 의향을 믿고,(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가 혼인할 때처럼) 그 약속을 믿는 것이 우리의 인간적 품위를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계시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우리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종을 신앙을 통하여 드러내고”,18) 하느님과 친밀한 일치를 이루는 일은 결코 우리의 품위를 해치는 것이 아니다.
- 155 신앙 안에서, 인간의 지성과 의지는 하느님의 은총과 협력한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움직여진 의지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의 진리에 동의하는 지성적 행위이다.”19)
- 신앙과 지성
- 156 계시된 진리들이 우리의 자연적 이성에 비추어 참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이 신앙의 동기는 아니다. “스스로 그르칠 수 없고 우리를 그르치게 하지도 않으시는, 계시하시는 하느님 바로 그분의 권위 때문에”20) 우리는 믿는다. “그럼에도 우리의 신앙적 동의가 이성에도 부합하도록, 하느님께서는 성령의 내적 도움이 당신 계시의 외적 증거들과 함께 주어지도록 하셨다.”21) 예를 들어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기적,22) 예언, 교회의 확산과 그 거룩함, 그 풍요함과 확고함은, “모든 이의 지성이 파악할 수 있는, 계시에 대한 확실한 증거들이며”,23) 신앙의 동의가 “결코 정신의 맹목적인 작용이 아니라는 것”24)을 보여 주는 믿음의 동기들이다.
- 157 신앙은 확실한 것이며, 그것이 거짓 없으신 하느님의 말씀 자체에 근거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인식보다 더 확실하다. 물론 계시된 진리들이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에 비추어 모호하게 보일 수는 있으나 “자연적 이성의 빛이 주는 확실성보다 하느님의 빛이 주는 확실성이 더 크다.”25) “만 가지 어려움도 하나의 의심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26)
- 158 “신앙은 이해를 요구한다.”27) 믿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믿는 분을 더 잘 알고자 하며 그분의 계시를 더 잘 이해하고자 한다. 한편 더 깊은 이해는 다시금 더 강하고 점점 더 사랑에 불타는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신앙의 은총은 “마음의 눈”(에페 1,18)을 열어 줌으로써 계시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게 한다. 거기에는 하느님의 계획 전체, 신앙의 신비, 신비들의 상호 관계, 계시된 신비의 중심이신 그리스도와 이루는 관계에 대한 이해가 포함된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계시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도록 당신의 은총으로 항구히 신앙을 완성시켜 주신다.”28)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금언대로 “믿기 위하여 이해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29)
- 159 신앙과 과학. “신앙이 이성보다 우위에 있기는 하지만, 신앙과 이성 사이에 진정한 불일치는 있을 수 없다. 신비를 계시하고 신앙을 주시는 바로 그 하느님께서 인간의 정신에 이성의 빛을 비춰 주시기 때문이며,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시거나 진리가 진리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30) “그러므로 모든 분야의 방법론적 탐구가 참으로 과학적 방법으로 도덕규범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결코 신앙과 참으로 대립할 수 없을 것이다. 세속 사물이나 신앙의 실재는 다 똑같은 하느님에게서 그 기원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오히려 겸허하고 항구한 마음으로 사물의 비밀을 탐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의식하지는 못하더라도, 만물을 보존하시고,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손에 인도되고 있는 것이다.”31)
- 신앙의 자유
- 160 신앙이 인간적인 응답이 되려면, “인간이 하느님을 자유로이 믿고 응답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억지로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해서는 안 된다. 사실 신앙 행위는 그 본질상 자유로운 것이다.”32)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당신을 섬기도록 부르시므로 인간은 이에 양심으로 매이지만 강제당하지는 않는다.……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33)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신앙과 회개로 초대하시지만 결코 이를 강요하지 않으신다. “진리를 증언해 주셨지만, 반대자들에게 그 진리를 힘으로 강요하지는 않으셨다. 그분의 나라는……진리를 증언하고 들음으로써 굳건해지며 사랑으로 넓혀진다.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랑으로 인간을 당신께 이끌어 들이신다.”34)
- 신앙의 필요성
- 161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 구원을 위하여 그분을 보내신 분을 믿는 신앙이 필요하다.35)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고’(히브 11,6), 하느님 자녀의 신분을 얻지 못하며, ‘끝까지 견디지’(마태 10,22; 24,13) 않고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36)
- 신앙의 항구함
- 162 신앙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무상으로 베푸시는 선물이다. 우리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이 선물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훌륭한 전투를 수행하십시오. 믿음과 바른 양심을 가지고 그렇게 하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양심을 저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이 파선당하였습니다”(1티모 1,18-19). 신앙 안에서 살고, 성장하고 마지막까지 항구하려면 하느님의 말씀으로 신앙을 키워야 하며, 주님께 신앙을 키워 주시도록 간구해야 한다.37) 이 신앙은 “사랑으로 행동”(갈라 5,6)하고,38) 희망으로 지탱되며,39) 교회의 신앙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 신앙 - 영원한 생명의 시작
- 163 신앙은 우리가 이 지상에서 순례해 가는 목표인 ‘지복 직관’(visio beatifica)의 기쁨과 빛을 미리 맛보게 해 준다. 그때에 우리는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 보고”(1코린 13,12), “그분을 있는 그대로”(1요한 3,2)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이미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 우리가 비록 지금은 신앙의 축복을 거울에 비친 것처럼 바라보지만, 그것은 장차 누리도록 신앙이 우리에게 보증해 주는 놀라운 것들을 이미 소유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40)
- 164 한편 지금 우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며”(2코린 5,7),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1코린 13,12) 하느님을 알 뿐이다. 우리가 믿는 그분께서 신앙을 비춰 주신다 해도 우리의 신앙은 종종 어둠 속을 지나기도 한다. 신앙은 시련에 처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흔히, 신앙이 우리에게 보장해 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한다. 악과 고통, 불의와 죽음의 경험은 ‘기쁜 소식’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며, 때로 신앙을 흔들기도 하고, 유혹이 될 수도 있다.
- 165 그럴 때 우리는 신앙의 증인들, 곧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 믿은 아브라함, “신앙의 나그넷길에서”41) 당신 아드님의 수난과 그 무덤의 어둠을 함께함으로써42) “신앙의 어두운 밤”43)에까지 도달하였던 동정 마리아와 그 외의 많은 신앙의 증인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러면서 우리의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히브 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