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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4 등록
명석하고 유머 넘치는 ‘인싸’… 학구적인 ‘21세기 아우구스티노’
신임 마산교구장 이성효(리노) 주교의 삶과 신앙, 걸어온 길
12월 21일 제6대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된 이성효 주교를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이들이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대체로 일치했다. 유년기부터 명석했고, 항상 앞장서며 유머가 넘쳤다는 것이다. 더불어 어려운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항상 하느님께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순명할 준비가 돼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인싸’ 이성효 리노
“요즘 말로 하면 ‘인싸’(분위기를 주도하고 소통하는 인사이더)죠. 유머를 잃지 않았고 분위기를 잘 끌고 가고 행사만 있으면 사회를 도맡았어요.”
유년기부터 수원 지동초등학교와 지동성당에 함께 다니고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 함께 봉직한 60년 지기 곽진상(수원교구 서판교본당 주임) 신부는 이 주교를 한마디로 ‘분위기 메이커’라고 했다. 이 주교는 어렸을 때부터 학생회와 청년회 등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성소를 키워나갔다. 곽 신부는 “본당에서 여름캠프를 가면 항상 기타 치고 사회를 맡아 분위기를 잘 휘어잡았다”면서 “본당 신자들도 이 주교를 다 알만큼 똑똑하고 사교성도 좋았는데, 신학교 간다고 하니까 다 놀랐다”고 전했다.
이 주교는 독실한 어머니 신앙을 이어받아 어린 시절부터 성당을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지동본당에서 학생회 활동을 할 때에는 어떻게든 성당에 도움이 되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 당시 지동본당은 푸세식 화장실이었는데 친구들 몇 사람을 모아 손수 똥지게를 메고 나타나기도 했단다.
이 주교의 기타와 색소폰 연주, 노래 실력은 신학교에서도 유명했다. 학교 축제가 있으면 기타리스트로 나서 공연했다. 주교가 된 후에도 틈날 때마다 녹슬지 않은 연주 실력을 뽐냈다. 이 주교가 수원가톨릭대 교편을 잡았던 당시 제자였던 진효준(주교회의 가정과생명위원회 총무) 신부는 “대전에서 열린 생명을 위한 미사 후 색소폰 연주를 해달라는 사람들의 요청에 흔쾌히 무대에 올라 연주를 선보였다”고 말했다.
험난한 성소의 길
이 주교의 둘째 형 이경효(다니엘)씨는 동생이 신학교에 가겠다고 아버지 앞에 섰던 그 순간을 기억했다. “그때 동생은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을 정도로 부르심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다”고 회상했다.
이 주교는 1957년 경남 진주에서 아버지 이홍희(요셉)옹과 어머니 황숙재(라파엘라) 여사 사이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5살 때 대구 삼덕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7살 때 수원으로 이사해 신학교 입학 전까지 지동성당에 다녔다.
청소년기부터 사제의 꿈을 키운 이 주교는 고교 졸업 후 곧장 신학교에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공무원이자 비신자셨던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로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수재로 소문난 아들이었기에 가족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터였다. 이에 이 주교는 아주대 전자공학과 학부 과정을 마친다.
이후 서울대 전자공학과 석사과정에 진학한 그는 당시 서울 연건동 교정 건너편 가톨릭대 신학대를 바라보며 다시 사제의 꿈을 꾸게 됐다. 결정적으로 1984년 5월 여의도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주례로 거행된 한국 천주교 200주년 미사와 기념대회에 참여한 것이 그를 신학교로 이끈 계기가 됐다.
아버지는 막내아들이 다시 신학교를 가겠다고 하자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뜻을 돌리려 했다. 두 형도 집안에 분란이 일어난다며 뜯어말렸다. 흔히 ‘일류 대학’을 나와 탄탄대로를 포기하겠다고 나선 그의 뜻은 이해받지 못했고, 엄동설한에 집에서 내쫓기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주교의 뜻은 확고했다. 이 주교는 1985년 수원가톨릭대학교에 편입해 3학년으로 입학했다. 아버지는 입학 전날까지 아들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오로지 하느님을 향했던 자식을 이길 순 없었다. 아버지는 임종 몇 달 전 스스로 성당에 나가 아들을 위해 기도했고 병자성사를 받고 하느님 곁으로 갔다.
이 주교는 이후 1980~1990년대 오랜 독일·프랑스에서 유학생활에서 언어로 어려움을 겪는 중에도 “자기 자신을 던져라. 그렇게 한다면 하느님이 나를 쓰실 것이다. 그러면 나를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한국 교회 교부학의 권위자
“자신을 내던질 줄 아는 사람이다. 어려운 이웃을 보면 지나치지 않는다. 주교로서의 권위, 교부학 박사로서의 명예도 내세우지 않는다. 때론 강하게 보일지 몰라도 알고 보면 속정이 깊은 사람이다.”
이 주교가 수원교구 1대리구장을 맡았을 당시 옆에서 보좌한 이철구(수원교구 홍보국장) 신부는 “주교님은 항상 ‘이게 다 내거냐, 교회 것이지’라고 말씀하셨다”며 “늘 교회에 순명하는 마음을 지니셨다”고 전했다.
이 주교는 교구 사제들에게 특별히 관심이 많았다. 어려움에 처한 사제들에게는 한걸음에 달려가 도와주고자 했다. 환속 사제들에게는 사재(私財)를 털어 뒤에서 묵묵히 지원하기도 했다.
신학교 제자들과 신자들은 이 주교를 ‘자상한 눈높이 선생님’으로 기억한다. 이 주교가 오산본당 주임 시절 본당 신학생이었던 박필범(광명본당 주임) 신부는 “신부님은 자신을 어려워하고 낯설어하는 신자에게 먼저 이야기를 걸어 금세 편한 분위기를 만드셨다”고 했다. 진효준 신부는 “제자였던 사제들과 모임을 가질 땐 지금도 별명을 불러주신다”면서 “유머와 농담으로 거리감 먼저 없애신다”고 전했다.
이 주교는 한국 교회 교부학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사제들 사이에선 ‘21세기 아우구스티노’로도 불린다. 이 주교도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존경하고 닮고자 평생을 노력했다. 초대 교부학의 권위자인 아우구스티노 성인처럼 늘 책을 옆에 끼고 살며 여지없는 학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형 이경효씨는 “어릴 때부터 학구적이었고 성경을 읽고 묵상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신학에 관한 서적들을 탐독해 가며 복음 말씀을 이해해 나갔다”고 기억했다.
신학 연구를 하면서 학문적 개방성도 놓지 않았다. 이 주교는 학문 간 벽을 넘어서는 공동연구를 중요시했다. 신학교 교수로 재직할 때에도 동료 교수 신부들에게 “한국 교회를 넘어 보편 교회에 도움이 되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4차 산업혁명이 대두할 것을 예상, 신학적 교리연구에만 매진하는 게 아닌 윤리학자와 철학자·과학자 등과의 저술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주교가 펴낸 책들은 「선포와 봉사」(2003), 「교부학 인명(공저)」(2004) 등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관련한 책도 여러 권 펴냈다. 최근엔 인공지능(AI)과의 만남을 주제로 한 「4차 산업혁명과 인류의 미래」(2019)도 출간됐다.
생명윤리와 가정 복음화에 투신
이 주교는 가정 복음화와 생명윤리 수호에도 투신했다. 그는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과 생명운동본부장을 역임했고 가정과 생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낙태와 조력존엄사는 엄연히 살인이라는 교회 가르침을 분명히 전했다. 2022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교회는 주수에 상관없이 어떤 경우에도 낙태죄 폐지에 반대한다”면서 “정치적 이해득실로 낙태죄 공백이 장기화되는 것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고 쓴소리를 냈다.
지난 5월에는 주교회의 차원에서 최초로 펴낸 혼인 교리서에도 공동 집필자로 이름을 올려 모든 부부가 성·생명·사랑·혼인의 가치를 느끼도록 지원했다.
시국이 혼란할 때는 어김없이 강론대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이 주교는 2013년 당시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의혹으로 번진 당시 시국미사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한 방법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며 “정치가 혼탁하다고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지 않는다면 정치는 계속 혼탁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 바 있다.
이준태 기자 ouioui@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