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주교회의 > 교구종합

그날 그 빛의 의미를 새기며
[월간 꿈 CUM] 꿈CUM 수필 (21)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종교에 관심이 많았다. 친구 따라 예배당에도 다녀 보고, 원불교당에도 다녀 보았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정착을 못하고 말았다. 방황이 길어질수록 영혼은 목말랐다. 어딘가 안주할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어린 시절 기억 속에서 자주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한국전쟁 후 어렵게 연명하던 시절, 어둑한 뒷방에 기거하던 ‘인덕 할머니’의 모습이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전주에서 동란을 맞았다. 초대 전주시장을 지낸 아버지는 공산당 손에 학살을 당하셨다. 집까지 그들 손에 빼앗겨, 우리는 그들이 선심 쓰고 내준 한 칸 방에서 3개월 동안 지옥을 체험했다. 9·28 수복을 맞아 그들이 모두 달아나자, 어머니는 방방이 세를 놓아 생활비를 마련했다.
그때 인덕 할머니라는 분이 작은 뒷골방에서 세 들어 살았다. 어쩌다 어머니 심부름으로 그 방에 들어가면 할머니는 작은 유리알이 꿰어진 목걸이 같은 줄을 손에 들고 무어라고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때 그분의 모습은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어 말을 걸 수도 없었다. 그분이 손에 쥐고 돌리던 줄이 묵주라는 것도, 그분이 다니던 곳이 유서 깊은 ‘전동 성당’이란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가슴에 박힌 대못으로 병마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내가 전주여고에 입학하고 얼마 안 되어, 한 많은 세상을 떠나셨다. 애비 잃은 손자들 때문에 애태우시던 조부님께선 며느리까지 떠나자, 우리를 숙부님이 계신 광주로 옮겨 주셨다. 나는 친구들과의 이별을 슬퍼하며, 광주여고로 전학을 했다.
그 무렵 나의 외로움은 절정에 달했던 것 같다. 친구 따라 예배당으로 원불교당으로 전전했다. 그러던 중 차츰 성당으로 관심이 쏠렸다. 당시 ‘성당’에 대한 나의 지식은 너무나 짧았다. 뾰족한 첨탑과 새벽녘 저물녘에 들려오던 은은한 종소리, 그뿐이었다. 그런 나에게 인덕 할머니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며 자꾸만 성당으로 마음이 쏠렸던 것이다.
대학생 시절, 광주 남동 성당 곁을 지나다가 용기를 내어 안으로 들어갔다. 성스러운 기운에 둘러싸인 성당 마당을 조심스럽게 돌다가 한쪽에 서 있는 성모님의 석상을 보게 되었다. 자석에 끌린 듯 바짝 앞으로 다가갔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취하여 위에서부터 아래로 차근차근 훑어보다가 성모님의 발치에 시선이 꽂혔다. 긴 치맛자락 끝에 살짝 내비친 맨발! 성모님의 맨발은 내게 묘한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얘야, 어서 오너라. 어딜 갔다 인제 오느냐?”

두 팔을 벌려 나를 안아 주시는 것만 같았다. 이리저리 방황하다 밤늦게 돌아온 딸을, 맨발로 뛰어 나와 반겨 주시는 어머니! 나는 맨발의 성모님에게서 강한 모성을 느꼈다. 내 볼에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 일이 있은 후, 천주교에 입교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6개월의 교리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대학 졸업 후,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고향 광양군청 공보실에 근무하면서였다. 성당을 찾았지만 없었다. 조그마한 공소가 있었을 뿐이다. 나는 공소를 다니며 낯선 라틴어로 미사 예절을 배우고, 일요일마다 순천 저전동 본당까지 넘어 다니며 교리 공부를 했다. 막바지에 이르러 수녀님은 세례명을 짓자며 몇 분을 소개했는데, 그때만 해도 성인전 구하기가 흔치 않아 구체적으로는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단지 ‘조용한 동정녀’라는 말이 좋아 ‘실비아’로 택했다.
드디어 천주님의 딸이 되는 날! 생각만 해도 기쁘고 영광스러워 새벽 4시, 통금 해제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일어나 정성껏 묵주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아침이 되기를 기다려 공소에 나가 주일 미사를 드리고, 교우들의 축하 인사를 받으며 전날 밤 고이 싸둔 옷보자기를 들고 대모님과 함께 순천으로 갔다. 저전동 본당에는 마당이 그득하도록 많은 교우들이 모여 있었다. 대모님을 따라 그곳 회장님 댁 안방에서 준비해온 흰옷을 갈아입고 마당에 늘어선 150여 영세자들 속에 내 자리를 찾아 들었다.
예식은 마당에서 하는 절차, 실내에서 하는 절차, 두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보속을 뜻한다는 자색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줄줄이 열을 지어 타원을 이루며 세 분 신부님들 앞에 섰다. 경문을 외우고, 이마며 목이며 귓불이며 코끝에 십자 성호를 새겨 받고, 모든 맛의 근원이요 영원불변의 소금을 혀끝에 녹이고, 마지막으로 사도신경(당시에는 종도신경)을 외우며 실내로 들어갔다. 실내에서는 모든 걸 주임 신부이신 아일랜드 출신의 다이아몬드 신부님 혼자 하셨다. 남녀 혼성의 성가소리가 은은히 들리는 가운데, 신부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이마에 물을 부으며 예식을 거행할 때,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그날 다이아몬드 신부님의 강론 중 한마디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여러분의 영혼을 지금 볼 수 있다면 너무 깨끗하고 맑아서 눈이 부시도록 황홀할 것입니다. 이로써 여러분은 모든 원죄와 본죄를 씻고 천주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강론을 듣고 있던 나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 내 하얀 치맛자락 위에서 선명한 십자가 형태가 눈이 부시도록 빛을 뿜어내고 있지 않는가. 눈물 때문에 그러는 거겠지, 하며 눈을 부비고 다시 보았지만 십자가 빛은 너무나 또렷했다. 나는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그 빛 때문에 더욱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1964년 12월 20일 일요일 오후의 일이다.
그날 이후 나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며 단 한 번의 권태기 없이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도 누구에겐가 ‘인덕 할머니’의 역할이 되기를 바라며 늘 깨어 있으려고 노력한다.
글 _ 안 영 (실비아, 소설가)
1940년 전남 광양시 진월면에서 출생했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장편소설 「영원한 달빛, 신사임당」 「만남, 그 신비」, 소설집 「가을, 그리고 山寺」 「가슴에 묻은 한마디」 「비밀은 외출하고 싶다」, 수필집 「아름다운 귀향」 「나의 기쁨, 나의 희망」 「나의 문학, 나의 신앙」, 시집 「한 송이 풀꽃으로」, 동화 「배꽃마을에서 온 송이」 등을 펴냈다. 2023년 9월, 장편소설 「만남, 그 신비」로 ‘황순원 문학상 작가상’을 수상했다. 한국소설가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가톨릭문인협회 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