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 특집기획
2024.12.24 등록
대부분 읽지도 쓰지도 못하지만 찰고 때 ‘요리문답’ 술술 암송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11. 찰고(察考)
요리문답 제대로 외우지 못하면 불호령
1909년 성 베네딕도회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선교사들이 한국에 진출해 1911년 서울 백동수도원을 설립하기 전까지 조선대목구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교황 파견 선교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한국인 성직자도 있었다. 1911년 당시 한국에서 사목하던 한국인 신부는 불과 15명이었다.
“독일인 새내기 선교사들은 신자 7만 1252명, 프랑스인 사제 41명, 한국인 사제 15명, 수녀 59명, 신학생 41명인 아주 작지만 매우 활기찬 대목구의 공동 과업에 즉시 합류해야 했다. 대부분의 본당 사목구에는 외교인 20~30만 명 속에 신자 2000~3000명이 살았다. 그래서 광대한 영역을 돌보아야 하는 사제는 신자들을 기껏해야 1년에 한두 번 정도 방문할 수 있었다. 모두가 교리 문답서를 외우고 정기적인 찰고 내용을 암송하긴 했지만, 종교적 지식은 늘 빈약했다. 뮈텔 주교는 특히 신자들의 어린 자녀들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새 시대의 역군으로 키워내야 했다. 대대로 물려받은 신앙이야말로 참되고 확실한 법이다.”(「분도통사」 67쪽)
‘찰고(察考)’는 예전에 비해 그 강도가 엄청 약해졌지만 아직 세례를 앞둔 예비신자와 판공성사를 받으려는 신자들이 치르는 교리 시험이다. 과거엔 질문·답으로 치러졌으나 지금은 필기로 한다. 불과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제가 “사람이 무엇을 위하야 세상에 났느뇨” 하고 물으면 찰고자가 “사람이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났느니라”라고 답해야 했다. 또 “사람이 천주를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려면 반드시 어떻게 할 것이뇨”라고 되물으면 “사람이 반드시 천주교를 믿고 봉행할지니라”라고 응대했다. 만일 요리문답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면 불호령은 물론 부모까지 공동 벌을 받기도 했다.
본당 사제들, 1년에 두 차례 공소 사목방문
“건장한 남자, 원기 왕성한 젊은이, 그리고 열두서너 살 먹은 소년 등 꽤 많은 신자가 모였다. 그들은 매년 두 차례씩 사제가 실시하는 교리 시험(찰고)을 치르고 싶어 했다. 대부분 읽지도 쓰지도 못하지만 이 곤고(困苦)한 사람들이 교리서를 술술 암송하고, 아이들까지 교리를 훤히 꿰고 있는 것을 보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자녀를 가르치는 것은 부모의 당연한 의무다. 밭일 나가는 엄마가 치맛자락에 매달려 아장아장 걷는 아이에게 신앙의 진리를 가르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02쪽)
찰고 날이다. 공소 마당에는 멍석이 깔리고 찰고자들이 긴장한 얼굴로 순서를 기다린다.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5월 22일 황해도 청계본당 팔상공소에서 치르는 빌렘 신부의 찰고를 참관했다.<사진 1> 1911년 주님 부활 대축일이 4월 16일이었으니 성령 강림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찰고가 있었던 듯하다.
“한낮의 열기가 잦아들어 한결 그윽한 봄날 저녁, 다들 공소 앞마당에 모였다. 멍석을 깔고 사제를 중심으로 한쪽에는 남자, 다른 쪽에는 여자, 가운데는 아이들이 앉았다. 어눌하고 답답함이 어찌 없겠는가마는 그래도 대부분 답변들을 시원시원하게 해 주었다. 어려운 질문이 나오면 유창하던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 (?) 호기심 많은 외교인들이 빙 둘러서서 오가는 문답들을 들었다. 그들은 자주 그랬다. 한마디 말이 그들 마음에 닿아 조금이라도 그리스도교에 가까워졌으려나, 우리도 그들과 더불어 말 없는 청중이 되어 신자들의 자신감 넘치는 답변에 경탄하고, 사제를 쳐다보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빛에 기뻐했다. 검게 탄 남자들과 할머니들이 그들의 빈한한 가사를 작파하고 공소까지 먼 길을 달려와 파릇파릇한 소녀들과 외운 교리 실력을 겨루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감동이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453~454쪽)
본당 사제들은 이처럼 관할 사목구 공소를 1년에 두 차례씩 방문할 때마다 그 기회를 이용해 신자들의 찰고와 고해성사를 하고, 미사를 거행했다. 공소 방문은 ‘사목 여행’이었다. 선교사들은 사목 여행 내내 한국인들과 더불어 한국인처럼 산다. 한식을 먹고 한옥 공소에서 묵는다. 얇은 돗자리 하나 깔린 딱딱한 바닥에서 잔다. 조랑말이나 나귀를 타고 다닌다면 안장을 베개로 삼기도 한다. 탈것이 없으면 내내 걸어 다닐 수밖에 없다. 녹초가 되어 본당 사제관으로 돌아오면 본당 신자들이 반겨주지만 새로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본당 성당에서 몇 달을 바쁘게 지내고 다시 관할 공소 순방에 나서는데 늦가을 여정이 특히 힘들다.
베버 총아빠스 일행, 첫 한식 밥상 받아
누가 언제 어디에서 촬영했는지 알 수 없으나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에는 ‘마을로 들어가는 선교사들’이란 제목의 유리건판이 보관돼 있다.<사진 2> 수단 모양으로 보아 파리외방전교회 두 선교사가 산골 교우촌으로 가고 있는 모습이다. 짐도 없는 차림새로 보아 이 교우촌에 상주하는 선교사들인지, 아니면 이미 짐을 풀고 산책을 갔다가 되돌아오는 중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사진 제목과 달리 선교사들보다 그들에게 예를 표하는 청년이 눈에 띈다. 거름 가마니인 듯한 지게 짐을 내려놓고 선교사들이 가는 길에 방해되지 않도록 길 가장자리에 비켜서서 두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으고 차렷 자세로 서 있는 청년의 모습이 사뭇 경건하다.
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1911년 4월 17일 안성의 한 교우촌에서 첫 한식 밥상을 받았다.<사진 3> “30㎝가 채 안 될 정도로 낮고 소담스런 소반에 접시 너덧 개가 놓여 있었다. 젓가락은 포크와 같은 용도로 쓰여 그걸로 마른 생선도 집어 먹고, 한국인들이 없으면 죽고 못 산다는 김치도 집어 먹고, 잘게 썬 깍두기도 짠 국물에서 건져 먹는다. (?) 음식 맛의 다양성은 인상적이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70~271쪽)
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과 한국인으로 살아야만 했던 공소 사목 여행을 체험한 것이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