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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엘리야? 카테고리 |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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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글 질문 마태복음 내용중 질문입니다.  
작성자김진태 쪽지 캡슐 작성일2014-01-06 조회수1,532 추천수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찬미 예수님

가르쳐 주십시요.

2013.12.23(월) 제1독서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3-23)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1)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2013.12.27(금) 복음

요한이 거룩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7~8)

예수님의 얼굴을 쌌든 수건은  아마포와 함계 놓여있지 않코, 따로 따로 한곳에 개켜져(2)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 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2014.01.02(목)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9-28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3)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질문(1) 2013,12,23 제1독서의 밀라키 예언서의 엘리야는 제생각으로는 앞으로 오실 임마누엘( 주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주님의 길을 딲을 세레자 요한을 지칭한것으로 이해를 했읍니다.

그런네 2014년 01.02 복음에서 세레자 요한이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부인했읍니다.

따라서 주님이 오시기 전 엘리야는 누구입니까?  혹시 세례자 요한이 겸손한 말씀으로 자기가 아니라 했읍니까?

아니면 제가  잘못 이해를 했읍니까?

 

질문(2)

2013.12.279금)

개켜져 있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 뒤에 제자들이 보고 믿었다라는 말씀이 있읍니다 .

우리나라 말에 이런 표현은 처음 들어 봤읍니다.

쉽게 가르켜 주십시요.(무었을 참조하라는 말씀을 하지 마시고  초보자가 쉽게 이해 하도록 배려 해 주십시요)

 

질문(3)

개인질문입니다.

저희가 보는 가톨맄 기도서에는 주님게 큰 은총을 받아 감사드릴려고 기도서를 보니 해당기도가 없읍니다.

그녕 체계없이 하는것 보다  주님께 드리는 감사 기도서가 있으면 좋겠읍니다. 검토해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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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임 (kr3217) 쪽지 대댓글

    † 찬미 예수님! 김진태님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주석 성경 각주 발췌 신약성경으로 넘어가는 시대의 유다교 문학에서는, 엘리야가 메시아의 선구자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 역활이 세례자 요한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신다 (마태 11,9-13과 병행구, 그리고 루카 1,17 참조). 거룩한 모습으로 변모하신 메시아 곁에 엘리야가 나타났다는(마태 17,1-8) 사실도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2014-01-06 추천(0)
  • 이정임 (kr3217) 쪽지 대댓글

    2) 답변 주석성경 각주 발췌 마리아 막달레나와 달리, 이 제자는 무덤이 비어 있고 아마포가 잘 개켜져 있다는 사실의 깊은 뜻을 바로 파악한다. 곧 믿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시신을 누가 도둑질해 가거나 다른 데로 옮겨 간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부활하셨음을 기리키는 표지로 이해한다. 개키다: [명사] 같은 말 개다 , 옷이나 이부자리 따위를 겹치거나 접어서 단정하게 포개다.

    2014-01-06 추천(0)
  • 이정임 (kr3217) 쪽지 대댓글

    3) 감사기도 체계적인 감사기도가 필요하시면 시편 기도를 참고하시면 좋습니다. 그런데 제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정형화된 기도문보다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기도가 더 아름답지 않을까 합니다. 제 체험입니다. 저의 아들이 학생 때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제가 맛난 거를 많이 해 주었습니다. 그때 제 아들이 저에게 "엄마, 너무 고마워요!" 이 한마디를 했습니다.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도 우리가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표현할 때 그리 거창하고 유창한 언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표현하는 한 마디가 주님은 더 행복해 하시지 않을까 하는 제 개인적인 마음입니다. 고맙습니다.

    2014-01-06 추천(0)
  • 이정임 (kr3217) 쪽지 대댓글

    2) 개인적인 묵상,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요한 20,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이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는 표현으로 이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시어(부활하시어) 걸으셨구나... 일어나 걸으시고 당신 손수 당신 얼굴을 쌌고 있던 수건을 개서 따로 놓아 두셨구나.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 아마 제가 느낀 것과 비슷한 어떤 것을 느끼시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2014-01-06 추천(0)
  • 이정임 (kr3217) 쪽지 대댓글

    200주년 기념 주해서 각주 발췌 이 빈무덤사화의 과정에서 돋보이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눈으로 본 대상들이 점점 극적으로 고조되며 묘사된 점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입구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았고, "애제자"는 무덤 안에 놓인 "염포들"을 보았으며, 베드로는 "염포들"과 "수건"을 보았다. 이런 묘사는 저자의 의도가 담긴 문학적 기교로 여겨진다. 즉 베드로의 권위와 역활이 반영되며 (5절 주석 참조), 그들이 눈으로 본 대상들은 예수의 부활을 알리는 일종의 표징으로 여길 수 있다. 부활한 예수는 새로운 천상적 실존을 취했기 때문에 "염포들"이나 "수건"을 남겨놓고 무덤을 떠나간 것이다.

    2014-01-06 추천(1)
  • 이정임 (kr3217) 쪽지 대댓글

    "염포들" 옆에 "수건"이 "따로 한 곳에 개켜져 있었다"는 묘사는 "애제자"가 믿음을 가지게 된 맥락 (8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소생한 라자로의 얼굴이 수건으로 감겨져 있었다는 묘사(11,44)와 비교할 때, 예수는 소생한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부활했다는 표징적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애제자"는 무덤 안에 들어가 정황을 보자 즉시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21,7 참조). 무덤 안의 정황은 예수 부활의 표징이요 동시에 증언의 역활을 하게 된 셈이다.

    2014-01-07 추천(1)
  • 소순태 (sunsoh) 쪽지 대댓글

    위의 200주년 기념 주해서 각주들에서, [이런 묘사는 저자의 의도가 담긴 문학적 기교로 여겨진다.] <----- 문학적 기교??? 그리스도교 전통적 의미의 "예수님의 부활"을 교묘하게 부정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예수는 소생한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부활했다는 표징적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 소생한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부활??? 그 정의(definition)를 알 수 없는 이상한 표현들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며, 그리스도교 전통적 의미의 "예수님의 부활"을 교묘하게 부정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2014-01-07 추천(0)
    문경준 (nolguitne) 쪽지 2014-01-07 추천(0)

    소순태님, 첫번째는 이미 설명드렸고, 두번째는 님의 오독이므로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소생한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부활하신 것>>으로 읽고서도 같은 생각이실지요...

  • 이정임 (kr3217) 쪽지 대댓글

    등장인물들의 눈으로 본 대상들이 점점 극적으로 고조되며 묘사된 점<= 이 표현을 이런 묘사는 저자의 의도가 담긴 문학적 기교로 여겨진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입구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았고, "애제자"는 무덤 안에 놓인 "염포들"을 보았으며, 베드로는 "염포들"과 "수건"을 보았다. <= 이 표현들의 문학적 기교를 의미한다고 이해합니다.

    2014-01-07 추천(1)
    박윤식 (big-llight) 쪽지 2014-01-07 추천(1)

    이정임님 의견에 공감합니다. 우선 마태/마르는 이 내용을 끝내 두려움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루카는 베드로가 아마포만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워만 했답니다. 그렇지만 요한 복음 사가는 애제자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고, 베드로가 먼저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고 얼굴을 쌌던 수건은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는 걸 확인했죠. 그리고 먼저 간 요한이 들어가 보고는 믿었답니다. 그들이 믿은 건 확실히 빔무덤이고, 스승님 시신은 없어진 것일 겁니다. 그리고 스승님 시신을 누가 손 댄게 아닌, 스승님 스스로 부활하심을 믿었겠죠. 비록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라는 걸 깨닫지 못했지만요. 이 얼마나 섬세한 표현입니까? 감사합니다. ^^+

  • 이정임 (kr3217) 쪽지 대댓글

    그들이 눈으로 본 대상들은 예수의 부활을 알리는 일종의 표징으로 여길 수 있다. 소생한 라자로의 얼굴이 수건으로 감겨져 있었다는 묘사(11,44)와 비교할 때, 예수는 소생한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부활했다는 표징적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 예수는 소생한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부활했다는 것을 표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이해가 됩니다. 라자로의 소생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고 이해합니다. 수건이 개켜져 있다는 그 표징을 사용해서 예수님께서 참으로 생명으로 부활하셨음을 설명하고 있다고 이해합니다.

    2014-01-07 추천(1)
  • 이정임 (kr3217) 쪽지 대댓글

    소순태 형제님의 생각을 200주년 기념 주해서를 출판한 곳과 성서 위원회에 보냈습니다. 각각 그곳에서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답변이 오겠지요. 만약 소순태 형제님의 생각이 맞다면 200주년 기념 주해서는 더 이상 가톨릭 신자들이 봐서는 안 되는 해설서가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이곳 성경 묻고 답하기에서만 다룰 수 없지요. 답이 올지 안 올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기다려 보겠습니다.

    2014-01-07 추천(0)
  • 이정임 (kr3217) 쪽지 대댓글

    요한 복음서는 이영헌 신부님께서 해제. 역주 하셨다고 나오는데 이영헌 신부님께서 어느 교구 신부님이신지 신부님께도 직접 메일을 보내보겠습니다. 일단 신부님께서 어디 계신지 알아보는 것이 우선인데 어떻게 알아봐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출판사에 알아봐야겠지요?

    2014-01-07 추천(1)
    박윤식 (big-llight) 쪽지 2014-01-07 추천(3)

    이정임님 답답합니다. 뭘 보내겠다는 말씀인지요? '그리스도교 전통적 의미의 "예수님의 부활"을 교묘하게 부정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라는 그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 것이지 아시는지요? 그 말의 표현이 무엇을 뜻합니까? 그리스도교 전통적 의미의 "예수님의 부활"의 내용이 무엇이기에, 이것을 교묘하게 부정하고 있다고 주장하는지 그 속내를 진정 아시고 질문하려는 겁니까? 믿음은 듣고 보고 마음으로 따른다는 결심입니다. 수학적으로 따지면서 믿는 게 결코 아닙니다. 더더구나 온갖 구질자레한 것으로 '번역오류' 따위를 주장하면서 교도권 위에 군림하는 양하는 이의 말의 허구성에 놀아날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고 그 방대한 번역 작업자를 공개적으로 모독하는 건 정말 꼴불견입니다. 다시금 생각해 볼 걸 말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 문경준 (nolguitne) 쪽지 대댓글

    문학적 기교가 맞습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복음서의 진화(?)'에 따라 제자들의 역할이 점점 극적으로 변하는 건 맞습니다. 제일 먼저 기록된 마르코복음에서는 제자들은 아예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여자들도 무서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요. 마태오복음에서도 제자들은 꿈쩍하지 않습니다. 그냥 갈릴래아로 가지요. 루카복음서에 가서 변화를 보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믿지 않고 베드로만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초대 교황이 됐을 겁니다. 마지막, 요한복음에 가서 애제자와 베드로가 - 나머진 그대로 숨어있고 - 무덤으로 가지요.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어납니다. 거기서도 애제자 - 요한인지는 아무도 확인할 수 없음 - 가 먼저 도착했지만 무덤에 먼저 들어간 건 베드로입니다.

    2014-01-07 추천(2)
  • 문경준 (nolguitne) 쪽지 대댓글

    위 성서해설의 관점도 극적으로 고조되고 있지만, 예수의 부활을 믿고 확인하는 것도 극적으로 고조되지요. 그것도 순차적으로 기록되는 복음서의 순서에 따라... 확실한 것은, 예수의 부활 시점을 본 복음사가는 한 명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문학적 기교'가 맞습니다.

    2014-01-07 추천(2)
  • 문경준 (nolguitne) 쪽지 대댓글

    소순태씨가 200주년 기념성서 주해서에 대해 반감을 갖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정양모 신부가 주해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지요. 정양모 신부에 대한 소순태씨의 반감과 모욕은 정도를 지나쳐 가톨릭을 모욕하는 데에까지 이르렀지요. 뭐든지 눈에 거슬리면 이이의 이빨에서 견뎌내기 힘들어집니다. 대신 본인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서는 극도의 관대함을 보이고 있다는 아주 희한한 세상을 우리는 맛보고 있답니다.

    2014-01-07 추천(3)
  • 이정임 (kr3217) 쪽지 대댓글

    박윤식 형제님의 질문입니다. 이정임님 답답합니다. 뭘 보내겠다는 말씀인지요? 소순태 형제님의 생각을 200주년 기념 주해서를 출판한 곳과 성서 위원회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영헌 신부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현재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2014-01-07 추천(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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