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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민 쪽지 캡슐 작성일2004-12-08 조회수1,579 추천수1 신고

성서번역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처음에 성서(구약성서)는 히브리어로 쓰였고 기원전 3세기 초에 본토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어를 쓰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위하여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어 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그것이 70인역 구약성서였다. 구약성서의 일부(제2경전)와 신약성서는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밀라노 칙령 이후 그리스도교가 공식적으로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자 필연적인 요청에 의해 성서가 여러 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했고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전까지 100여 가지의 성서 역본이 있었다고 한다. 313년 이전에는 아람어 역본, 시리아어 역본, 고트어 역본, 아르메니아어 역본, 그루지아어 역본, 이디오피아어 역본등이 있었다. 4세기말 5세기 초에는 예로니모 성인이 70인역 구약성서와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이를 불가타 성서라고 하는데 7세기부터 교회내에 널리 사용되었으며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공용성서로 정하였다. 그외에 아랍어 역본, 영어 역본의 역사적 조상이라고 볼 수 있는 앵글로 색슨어 역본이 있었고 1382년 불가타 성서를 원전으로 하여 평신도들을 위해 완역되어 널리 사용되던 유일한 영어성서인 위클리프 역본이 나왔다.

교회의 세속화 과정과 함께 사람들이 성서에서 멀어지자 성서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게 되었는데 1500년대 이후 종교개혁 내지 개신교의 출현이 성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자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불가타 성서를 공적인 성서로 인정하였고 1546년 교황 비오 6세는 자국어 성서를 읽게 될 경우 반드시 주교의 허락을 받을 것을 명하였으며 여타의 자국어 성서 번역을 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이 가는 곳마다 성서의 자국어 번역은 불가피한 것이였다. 듀에이 역본(영국), 네델란드 역본, 프랑스어 역본, 독일어 역본, 이탈리아어 역본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1893년 교황 레오 13세는 종교개혁에 대한 반작용으로 성서를 교도권하에 묶어 놓았던 것을 반성하면서 교서 '하느님의 섭리(Providentissimus Deus)'를 통해 교회내의 성서 연구를 권장하였으며 1889년 대사를 베풀면서 신자들로 하여금 성서 읽기를 권장였다. 그리고 교황 비오 12세는 1920년 예로니모 축일에 교서 '보호자이신 성령'을 통해 각 가정마다 4복음서와 사도행전을 갖추도록 권고했다.

우리나라에서 가톨릭에서는 전례용, 신자용, 교회일치용 순서로 성서번역이 진행되었고 맨 먼저 전례용 성서로 역관 최창현이 1790년과 1800년 사이에 연중 주일과 축일 때 읽혀지던 4복음서의 성경구절을 발췌하고 해석을 붙인 한문본 '聖經廣益'과 '聖經直解'를 재편집하여 한글로 옮겼다고 전해집니다. 이것이 필사본 '셩경직해광익'이며 우리 말로 옮겨진 최초의 하느님 말씀이다.

그후 최창현에 의해 "성경직해"가 번역되었는데 처음에는 필사되다가 1892년부터 5년 동안 전질 9권으로 간행되었고 1940년까지 5판을 거듭하다 1910년 한기근 신부에 의해 신자들을 위해 4복음서가 '사사성경'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1922년에 한기근 신부에 의해 사도행전이 '종도행전'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1941년 덕원 분도회 수도원에서 슐라이케르 신부에 의해 '서간·묵시편'이 번역되어 신약성서가 완역되기에 이르렀다.

구약성서는 1958년 선종완 신부에 의해 시도되어 1963년 46권 중 17권이 9책으로 간행되었다. 개신교측에서는 1882년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소속 로스와 멕킨타이어와 의주 청년들과 함께 '예수성교 누가복음젼서'를 내기 시작하여 1887년에는 '신약전서'를 출간했다. 1911년에는 구약전서를 완역 출간하였으며 1938년 '성경 개역'이 간행되었는데 신구약 개역성서 초판으로 2단 종서로 옛날 철자법을 쓰고 있는데 현재까지도 개신교에서 사용되고 있다.

가톨릭과 개신교 교회일치운동의 일환으로 1968년 성서공동번역위원회가 조직되고 번역에 착수하여 1971년 신약성서를, 1977년에는 구약성서까지 완역하여 '공동번역 성서'를 간행하게 되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함께 민중이 알기 쉬운 언어로 성서를 새롭게 옮겼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성서번역은 간략하게 소개하였고 한문본이나 필사본, 낱권 번역은 거의 소개하지 않았다.

(이상 바오로딸)

 

    성서 번역의 필요성

    선교·전례·연구 등의 필요성으로 성서를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련의 작업을 성서 번역이라 한다.
    본래 구약성서는 히브리어로(일부는 아람어와 그리스어), 신약성서는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따라서 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다른 지방이나 민족에게 전파될 때, 그 가르침을 전하려면 해당 언어로 옮겨야 한다. 또 시대에 따라 같은 지역의 언어도 변하므로 새롭게 성서를 번역해야 할 필요가 있고, 성서 원문에 대한 이해 또한 달라지므로 새로운 번역이 필요하다.
    그리고 새로운 사본의 발견 등의 이유로, 성서의 번역 원칙의 차이 때문에, 그리고 ‘반역’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번역의 한계와 결함 때문에 성서 번역은 계속해서 이루어진다. 현재도 성서는 세계 각국어로 가장 많이 번역되고 있는 책이다.

 

    우리말과 성서의 첫 만남(1784-1881년)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에도 하느님의 말씀이 찾아들었다. 1784년 이승훈의 세례로 시작된 한국교회는 당시 당쟁 등으로 불어닥친 박해의 위험 속에서도 공동체 예배, 곧 전례를 통하여 서서히 전파되었다. 전례에 필요한 책은 중국에서 들여온 [성경직해(聖經直解)]와 [성경광익(聖經廣益)]이었는데, 이 책들은 주일과 축일에 읽던 4복음서의 성경 구절을 발췌하고 해석이 붙어있던 한문본들이다. 1790년경 역관 출신인 최창현(요한, 1754-1801년)이 이 두 권을 합쳐서 필요한 부분만 번역하고 재구성하여 [성경직해광익(聖經直解廣益)]을 펴냈다. 비록 성서 전문이 번역된 것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 나라 사람이 우리 글인 순 한글로 옮겼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본격적인 성서 번역 시기(1882-1911년)

    1882년부터 어느 정도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자 교회도 활력을 되찾고 성서 번역도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필사되어 오던 [성경직해]를 1892년에서 1897년 사이에 활판본으로 간행하여 대량 보급하였다.
    1910년에는 한기근 신부가 라틴어 성서인 불가타 역본에서 4복음서 부분만을 한글로 번역, 해설을 첨가하여 [사사성경(四史聖經)]을 발행하였다. 각 장 끝에는 성구 주해가 ‘풀님’이란 이름으로 붙어있다. 이 성서가 한국 가톨릭 교회의 첫 한글 4복음서 번역본이다.

 

번역과 개정 작업(1912-1945년)

일제시대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성서는 계속해서 한글로 옮겨지면서 빛과 희망이 되어주었다.
이 시기에는 1922년 한기근 신부가 [종도행전(宗徒行傳)](지금의 사도행전)을 번역하여 [사사성경]과 합본, [사사성경 합부 종도행전(四史聖經 合附 宗徒行傳)]을 발간하였다.
1939년 재판 때에는 조선어학회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1933년)에 따라 띄어쓰기를 시행하였다. 1941년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슐라이허 신부가 불가타 역본을 참조하여 그리스 원어에서 옮긴 [신약성서 서간·묵시편]을 발간함으로써 비로소 완벽한 신약성서를 갖추게 되었다.

 

한국어 성서와 공동번역 성서(1945-1977년)

일본의 압정에서 벗어나고 민족의 분단과 한국전쟁을 치르는 등 격동의 세월 가운데서도 성서는 끊임없이 발간되었고 계속해서 다듬어졌다.
1955년부터 선종완 신부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구약성서를 옮기기 시작하여 1958년부터 1963년까지 [창세기]를 비롯 구약 16권과 제2경전 바룩서를 발간하였다.
이것이 한국 가톨릭 최초의 구약성서 번역본으로 입문과 주를 단 주해성서이다.
이어 최민순 신부가 1968년에 불가타 역본에서 옮긴 시편은 아름다운 우리말로 시의 운율을 살린 번역문이어서 전례문에 널리 사용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사용하고 있다.
성서를 원문에서 직접 현대어로 옮기려는 노력은 공동번역으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황청 성서위원회와 연합성서공회가 공동번역을 합의함에 따라, 우리 나라에서도 1968년 ‘성서 번역 공동위원회’를 조직하여 세계 최초로, 1971년에 [공동번역 신약성서]를, 1977년에는 위의 개정판과 구약 완역본을 합본하여 [공동번역 성서]를 펴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함께 민중이 알기 쉬운 언어로 성서를 새롭게 옮겼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70년대 이후 신자수가 급증하면서 성서의 독자층도 넓어져 분도출판사에서는 성서 원어를 정확하게 직역하고 각 권마다 해제와 주석을 붙인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를 기획, 간행하였다. 1988년 한국 주교회의는 좀더 원문에 충실하고 성서의 본뜻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성서 번역을 결의하여 새로운 번역에 노력한 결과 1999년 성탄절에 [마카베오 상·하]를 펴냄으로 구약의 번역을 마무리하고, 현재 신약의 새 번역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상 경향잡지)

 

……기원전 250년경에 이집트에 사는 이스라엘 교포들이 히브리 어로 된 구약성서를 자기들이 쓰는 그리스 어로 옮겨 사용했다(이 성서를 ‘70인역 성서’라 한다). 이 70인역 성서는 예수님 시대와 초대 교회 때 아주 널리 쓰이면서 그리스도교의 성서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1세기 말경에 유대인들이 자기네 성서 목록을 결정하면서 히브리 어로 쓰여지지 않았다는 등 몇 가지 이유를 들어 70인역 성서 중에서 7권을 성서로 인정하지 않았다. 유대교 전통을 따른 개신교도 그 7권을 ‘외경’이라 부르며 성서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가톨릭은 초대교회의 전통을 따라 사도시대부터 지금까지 그 7권도 성서로 인정하고 있다.

 

(이상 굿뉴스 성서입문 서비스)

 

[한국 근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 교회 4] 우리말 성서 번역사
한국 천주교회의 우리말 성서번역사와 우리말 성서번역의 의미

이성우(가톨릭대학교 인간학연구소 전임연구원)
 

이 논고는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 이루어진 우리말 성서번역의 역사를 정리하고 그 의의를 고찰한다. 연구자는 우리말 성서 번역사를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성서번역을 기준으로 하여 4기로 구분한다.

제1기는 ’성경직해광익’(1790-1800년)부터 한기근 신부 번역의 ’사사성경’이 출판되기 직전까지(1909년), 제2기는 ’사사성경’(1910년)부터 ’복음성서’(1948년)까지, 제3기는 선종완 신부의 구약성서 번역(1958-1963)부터 ’공동번역성서’까지, 제4기는 ’200주년 신약성서’부터 ’신약성서 새번역’까지로 분류한다. 이 분류는 한국인의 한글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성서번역의 성격 변화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우리말 성서 번역사와 그 의미에 대한 선행연구는 대부분 우리말 성서번역의 신학적, 국어학적 고찰에 그치고 있고, 그 중 신학적 연구는 하느님 말씀으로서의 성서전파와 번역된 성서의 분량 및 전문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와 달리 이 논고는 한국인의 자기 언어인 한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정도에 따라 성서 번역사를 정리하고, 자기 언어에 대한 자각으로 표현되는 주체적 자의식과 성서번역의 연관성에 대하여 고찰하는 점에 차별성을 둔다. 연구자는 이 관점을 ’정신사적 관점’이라고 표현하고, 우리말 성서번역의 신학적 의의보다는 정신사적 의의에 대한 고찰을 중점적으로 시도한다.

1977년 ’공동번역성서’가 출판되기 전까지 한국 천주교의 성서번역은 개신교와 비교할 때 매우 부진했다. 천주교의 성서번역이 부진한 원인은 무엇보다도 교회가 성서의 중요성과 가치를 강조하지 않은 데 있다.

천주교 최초로 구약성서를 원문에서 번역한 선종완 신부는 신자들이 놀랄 만큼 성서 지식이 없고 복음 정신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낙담했고, 교회가 가장 중요한 성서번역 보급사업을 도외시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이렇게 천주교 성서번역이 부진한 근본적 원인은 성사와 교리중심의 구원관과 신앙관에서 찾아야할 것이다. 성서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개신교 신앙생활과 달리 천주교 신앙생활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 1566년에 발행된 ’로마 교리서’에 근거한 교리교육과 성사거행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교회가 예비신자나 신자 교육에서 가장 중시한 것은 교리암기와 성사생활이었고, 성서에 대한 내용은 부차적으로 여겼다.

가톨릭 교회의 구원관은 성사 중심, 특히 성체성사인 미사 중심이다. 이런 배경 하에서 ’성경직해’의 번역은 성서번역이라기보다 미사 전례서 번역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천주교의 성서번역이 개신교에 비해 부진했던 원인은 천주교의 신앙관 및 구원관 자체에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성서의 중요성과 가치를 새롭게 부각시켰고, 이 신학적 변화가 한국 천주교 성서번역에 결정적인 계기를 부여하였다. 실제로 한국 천주교는 이 공의회 이후부터 성서번역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그 결과 지난 30여년 동안 3가지 번역본을 출간했다.

’공동번역성서’는 개신교와 공동으로 성서를 번역했다는 점(교회일치)과 한국 천주교 최초로 신구약성서의 완역본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신학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와 ’구약성서 새번역’, ’신약성서 새번역’은 가톨릭 성서학자들의 힘으로 원문에서 직접 번역했다는 점과 ’본문’에 충실하게 번역했다는 점에서 천주교 성서 번역사의 신기원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성서번역의 핵심적 관건은 하느님 말씀인 신구약성서를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온전하게 번역하여 전파하느냐이다.

’성경직해’는 비록 신약성서 중 일부이지만 최초의 한글 성서번역이라는 신학적 의의를 지닌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성서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자극 받아 실현된 ’공동번역성서’는 한국 천주교회가 최초로 신구약성서 번역본을 갖게 되었다는 의의를 지닌다.

그리고 ’200주년 신약성서’와 ’구약성서 새번역’ 및 ’신약성서 새번역’은 한국 천주교회가 성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데 필요한 본문에 충실한 번역본을 갖추었다는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다만 성서의 우리말 번역작업이 내포하고 있는 본질적 문제, 즉 과거의 언어로 기록된 성서를 현재 살아있는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이 안고 있는 과거 언어와 현재 언어 사이, 그리고 외국 언어와 우리 언어 사이에서 생기는 의미상의 거리를 연결시키는 문제는 과제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본문에 충실한 번역이라도 그 번역된 성서를 읽는 일반 독자는 현재 통용되고 있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고, 바로 이들에게 본문의 의미가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우리말 성서 번역사를 정신사적 관점에서 고찰할 때, 각 번역본의 의의는 다르게 평가된다. 성서번역은 한국인의 자기 언어인 한글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정도에 따라 변한다. 서양 근대의 성서 자국어 번역이 보여주듯이, 성서를 자기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주체적 자의식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글본 ’성경직해광익’의 의의는 재평가되어야 한다. 18세기 말에 이루어진 한문본 ’성경직해’와 ’성경광익’의 우리말 번역은 성서를 자기 언어인 한글로 번역했다는 주체적 수용의 의의와 아울러 조선 후기 몇몇 실학자들에게서 주체적 자의식이 태동하였다는 획기적인 현상으로 평가할 수 있다.

19세기 말에야 한국의 몇몇 선구자들이 자기 언어의 중요성을 인식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보다 1세기나 앞선 성서의 부분적 한글번역은 주체적 자의식 태동이라는 정신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그러나 자기 언어로서의 한글에 대한 인식이 확산된 것은 1960년대이다. 1960년대에 국민 절반 이상이 문맹에서 벗어났고, 이는 한글이 한국인의 문화어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1950년대까지 이루어진 성서의 우리말 번역은 천주교와 개신교를 막론하고 한글의 중요성에 대한 깊은 인식 없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즉 1950년대까지 이루어진 천주교와 개신교의 성서번역은 외국인 선교사들 중심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한국인의 자기 언어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성서번역은 획기적인 변화의 양상을 보인다. 1958-1963년에 출판된 천주교 선종완 신부의 구약성서 번역과 1967년에 출판된 개신교의 ’신약전서 새번역’은 우리말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최초로 드러나는 우리말 번역이다.

외국인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 한국인들이 성서를 원문에서 직접 번역하였다는 것은 자주의식의 증거이다. 또 성서체의 한글 문장이 아닌 한국인의 생활감정이 담겨있는 살아있는 한글 표현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은 자기 언어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증거이다.

이런 변화는 1977년 출간된 ’공동번역성서’에서 꽃을 피워 우리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거의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성서번역이 이루어졌다. 정신사적 관점에서 ’공동번역성서’는 우리말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주체적 자의식이 어우러져 나온 최초의 번역성서라는 의의를 지닌다.

1970년대부터 유럽에서 서양 성서학을 배운 성서학자들이 귀국하면서 성서번역은 새로운 양상을 띈다. 로마 가톨릭 성서학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년) 이후에 본격적으로 ’역사비평적 성서연구 방법론’을 수용하였고, 이 방법론에 의거한 성서학을 배운 학자들은 ’공동번역성서’가 우리말에 치중한 나머지 본문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판단하에 본문에 충실한 새로운 번역을 시작한다.

이렇게 완성된 ’200주년 신약성서’(1991년, 보급판)는 자연스러운 우리말 표현보다는 성서 본문을 중시하여 직역에 가깝게 번역되었다. 성서 본문의 본래적인 의미에 충실하여 성서 전문가들의 해제와 주석에 도움이 되는 전문가들을 위한 번역이다.
2002년에 완료된 ’구약성서 새번역’과 ’신약성서 새번역’ 역시 원칙적으로 성서 본문에 충실한 번역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200주년 신약성서’와 성서번역의 원칙에 대한 인식을 같이 한다.

즉 197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이루어진 성서번역은 우리말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보다 성서 본문에 충실한 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에 무게를 싣는 양상을 띄고 있다. 결국 우리말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에서 나오는 우리말로 번역하기는 아직 과제로 남아있다고 하겠다.

(이상 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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