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가톨릭의 혼인과 혼종혼(混宗婚)에 대해서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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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03-02 | 조회수896 | 추천수1 | 신고 | |
- 가톨릭의 혼인과 혼종혼(混宗婚) -
; 타종교인과의 결혼에 대한 교회의 입장
개신교와 가톨릭이 관련되는 아픈 점을 솔직히 따지다
"왜 가톨릭 교회에서는 그 신자가 교회 밖의 사람과 결혼하기를 금합니까? 우리 나라에서는 종교적 아량이 넓어야만 하고 또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이렇게 되도 록 힘써야 하는데, 이 문제에 관한 당신 교회의 규칙은 너무나 소견이 좁아 화통 을 터뜨리게 하기가 쉽습니다. 이는 우리 국민 사이에 불필요한 장벽을 쌓는 것 입니다. 이는 신자들을 파벌적으로 따로 갈라 놓는 것이고, 우리 나라처럼 갖가 지 인종과 교파로 구성되어 있는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서 본질적인 일치와 융합의 길을 막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근에 어떤 비신자 친구가 표시한 의견이다. 이 말은 우리를 떠난 형제 들 사이에 공통된 감정을 반영한다. 이 비판에 대답하기 전에 우선, 우리 국민 생 활 전반에 걸쳐 비단 아량뿐 아니라 우애(友愛)와 선의(善意)까지 있어야 함을 충 심으로 동의하기를 비신자 독자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경제나 정치면에 있어서 단 순히 종교나 인종 때문에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민주적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 가톨릭은 그런 차별 대우를 받은 희생자 중 으뜸의 자리를 차지하는 만큼, 이 가톨릭이 부질없는 외고집을 부릴 리가 만무하다. 민족적 완미(頑迷)든 종교적 완 미(頑迷)든, 이는 모두 추악하고 비민주적이며 비가톨릭적이며, 단연 배척을 받아 마땅한 것들이다.
극단으로 쏠리다
그러나 아량이라는 것도 아주 극단으로 쏠릴 수가 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영 역에까지 쳐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예컨대 "둘에 셋을 더하면 몇이냐?"는 물 음에 "구십칠"이라고 대답한다면, 교사가 "다섯"이라고 대답한 사람에게 보내줄 부드러운 미소와 똑같은 미소를 기대할 이는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진리는 오류를 물리치는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아량이라는 것은 사람이 어떤 원리는 참이라 하고 어떤 것은 허위라 하면 반드시 소견 좁은 사람이라고 욕을 먹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고, 그분이 세운 교회가 공포한 교리는 참 된 것임을 믿는다. 또 계시 진리에 어긋나는 것은 그 어떤 것을 막론하고 거짓이 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적 신앙문제를 사업이나 정치 등 전혀 당치도 않 는 분야에까지 끌고 들어가 종교를 달리하는 이라고 차별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한다면 그야 물론 소견이 좁고 완미(頑迷)하고 광신(狂信)적인 것이다. 이는 가톨 릭 교회 전체의 정신과 가톨릭이 내세우는 모든 것에 반대가 되는 짓이다.
왜 교회가 반대하는가?
이제 여기까지 준비를 갖추었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자. 도대체 교회는 왜 혼종혼 (混宗婚)을 반대하는가? 이는 가톨릭이 아닌 이들을 무시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 고, 그 사람들의 행복에 무관심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교회는 그들 비신자들도 우리나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자녀들이므로 사랑하며, 그들의 행 복과 복지에 대해서도 가톨릭 신자나 다름없이 걱정하고 있는 까닭에, 그들은 그 들끼리 가톨릭은 가톨릭끼리 혼인하기를 명한다. 교회는 오랜 세월에서 얻은 경 험으로 종교와 신앙이 다른 각각 열심한 신자들이 결혼하는 경우에는, 그 쌍방의 행복과 결혼의 안정성(安定性)에 위협을 주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교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 충고하는 것은 한 시대, 한 나라의 경험으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 각국에서 세기를 연이어 온 경험에서 말하는 것이다. 이성(理 性)과 상식이 증언하는 바와 같이 인생의 가장 긴밀한 결합이라고 볼 수 있는 결 혼의 결합 -마음과 정신과 영혼의 결합, 포부와 기도의 결합- 에 개재(介在)해서 는 안 될 틈바구니가 반드시 있다.
그리고 또 교회는 창립자이신 하느님에게서 부과된 의무를 마음에 새겨 교회의 자손들이 신앙을 지키도록 하기에 충실한 만큼, 교회의 자녀들이 신앙을 해치거 나 적어도 냉담하게 될 분위기 속에 살아가야 될 것을 몹시 꺼리는 것도 당연하 다. 교회가 이를 금하는 이유는, 이러한 결혼이 당사자들의 종교 무차별과 또 거 기에서 출생되는 자녀들의 종교 교육을 무시하게 되기가 쉽기 때문이다. 교회의 눈으로 볼 때 인생의 가장 큰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에게 주신 종교 진 리라는 예금(預金)이다. 바로 이것이 가장 값진 진주다. 교회는 그 신앙을 부인 하고 신뢰를 배반하기보다는 차라리 천백 번 죽기를 감수한다. 교회는 그 자녀 중 단 한 명의 신앙이라도 이를 어떠한 부귀 영화나 사회적, 정치적 세력과도 절 대 바꾸지 않는다.
참어머니
예수 그리스도가 세운 종교의 숭고한 가치를 이처럼 확신하고, 인류 만대를 위 해서 그 진리의 재보(財寶)를 완전히 보호하라는 신명(神命)을 뼈저리게 의식하 고 있는 교회가, 그 자녀들의 신앙을 위협하는 모든 위험을 경고함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만일 교회가 자녀들의 생득권(生得權)을 위협하는 어떠한 조건이라도 제거하기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교회는 그 자녀들에게 대해서 성실한 어 머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의 중대한 위험으로부터 자녀들을 보 호하는 교회의 일관(一貫)된 정책 -그 최상의 가치를 확신하는 데만 있을 수 있 는 정책-을 어떤 교파를 믿는 사람이든지 공평한 사람이라면 칭찬하지 않고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만일 가톨릭 교회가 진정으로 가톨릭 신자가 믿는 것처럼 참종교라면, 가톨릭이 아닌 이와 결혼한다 해서 그 신앙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겠는가? 이는 가톨릭 교리의 내적(內的)힘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증거가 아닌가? 가톨릭 교회는 온실(溫室)같은 분위기가 필요하고, 또 이를 위해서 밖으로부터 아무 바람 도 새어 들어오지 못하게 조심스럽게 막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 아닌가?"
비신자 독자 중에는 이처럼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반박은, 남자와 여자가 그저 논리적 추리로만 일관하는 기계가 아니라 지적 사고(知的思考)에 못지 않게 정서와 감정에도 지배되는 살과 피라는 중대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가령 도덕률을 마땅히 지켜야만 한다는 확신을 지닌 젊은이가 있다고 하자. 이 확신은 이성에 바탕을 둔 것임은 물론이다. 그런데 사방에서 유혹의 공격을 받을 환경에 그를 두어 보라. 요염한 옷을 걸친 악덕(惡德)이 그의 상상(想像)을 유혹 하고 감정을 뒤흔들어 정욕에 불을 붙인다. 그는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와도 같다. 날마다의 환경이 인간에게 미치는 감화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경험 있는 이라면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가 그 자녀들을 일생 신앙에 맞지 않 는 환경에 두지 않게 노력하는 것도 위의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까닭이다.
더군다나 학교나 가정에서의 종교 교육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교회의 자녀들 중 그 신앙의 바탕이 확고하게 굳지 못한 이가 많다. 그 결과 못마땅한 비평이나 비웃음이나 사회적 압박이나 정치적 차별이나 그 밖의 많은 외부적 사정에 억눌 려 생득권(生得權)을 죽 한그릇과 바꾸게 되고 만다.
자녀들에 대한 결과
가정 환경이 가장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대상은 아마 자녀들일 것이다. 부모가 믿는 종교가 다르면 그들에게서 출생되는 자녀들이 확고 부동한 신앙을 갖게 되 기는 하늘의 별따기임에 틀림없다. 그러한 집안에서 자란 아이들이 "우리 아버 지 어머니조차도 어떤 것이 참종교인지 서로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데 내가 어떻 게 알아?" 라고 말한다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더군다나 가톨릭이 아닌 아버지가 아무 교회에도 나가지 않고서 아이들에게도 가톨릭 신자인 엄마를 따라서 교회에 가라고 아무리 애쓴댔자 소용없다. 표양은 명령보다 강하다. 명령과 표양이 맞지 않을 때 그 명령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 다. 여기 그 실례가 있다.
어떤 비신자인 아버지가 자기 결혼 때 약속한 것 -곧 자녀들을 가톨릭 신앙으 로 기르겠다는 약속- 을 지키기로 노력하였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이 노력이 어 느 모로 보나 성공된 듯했다. 일요일 아침마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엄마와 함께 성당에 꼭꼭 보냈다. 그러면서 자기는 결혼 때의 약속을 충분히 지킨다고 자랑 했다. 자기는 집에 남아서 세속의 성서 -일요일 신문- 을 읽는다. 아버지의 표 양이 명령과 완전히 반대가 되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이럭저럭 철이 들게 됐다. 드디어 어느 일요일 아침,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성당에 가라 고 깨웠는데 아들 녀석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버지는 놀라며 말했다.
"얘, 웬일이냐? 네가 어릴 때부터 종교 의무를 지키도록 키워 오지 않았니? 왜 오늘은 다른 주일처럼 가지 않는 거냐?"
아들이 대꾸했다. "아버지는 늘 저더러 가라고 하시지만, 아버지는 한번이 라도 가셨나요? 저는 어린애가 아닙니다. 이젠 다 컸어요. 그러니 아버지 는 안 가도 괜찮은데 저는 가야 하나요? 저도 이젠 안 가도 괜찮다고 생 각합니다."
아들의 조리 있는 대꾸에 아버지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자기의 명령만으로 아 이들에게 박아 주려던 신앙의 바탕을 자기의 표양이 근본부터 뒤엎고 있다는 것 을 조금도 깨닫지 못했던 탓이다. 이와 같이 종교 신앙이 일치되지 않는 가정은 모두 그 부모의 표양의 힘이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감수성이 강한 어린이의 지성과 기억에 -아이들이 죽는 날까지 지닐- 착잡한 인상을 새기는 것이다.
표양의 감화력
어찌하여 교회가 혼종혼을 이상(理想)으로 여기지 않는가 하는 이유를 정확히 이 해하기 위해서 -이 점은 극히 중요한 만큼-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어느 큰 도시의 교구(敎區)에서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주일 학교 반이 있었다. 본당 신부는 그 전부터 아이들이 첫영성체 준비를 할 때에는 부모들이 아이들의 양쪽 옆에서 함께 영성체하는 아름다운 풍습을 실시해 왔다. 그 날도 신부는 제 대에서 내려가 첫영성체하는 어린이와 그 자랑스러운 부모들에게 천사의 빵을 내 려 주고 있었다. 위를 쳐다보는 귀여운 어린이들의 얼굴에서 빛나는 아름다움과 순결과 행복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가 여덟 살 된 소녀 앞에 다가섰 을 때 그 소녀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고 슬픈 기색이 가득 차 있었다. 다른 아이 들이 거룩한 기쁨에 넘치는 모습과는 아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한편에는 엄마가 꿇고 있었지만 다른 편에는 자리가 비어 있었다. 무슨 걱정이 그 소녀를 괴롭히고 있음을 눈치 챈 사제는 몸을 굽히고 이렇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라. 예수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강복해 주실 거야." 소녀의 혀 위에 천상의 만나를 올려 놓은 후 사제가 속삭였다. "미사가 끝난 다 음 제의방으로 오려무나." 그 소녀가 엄마와 함께 제의방에 왔을 때 비밀의 진상 이 드러났다.
그 날 흰옷으로 곱게 단장하고 화관을 쓰고,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 의 미소를 띠면서 미사에 참례하러 가기 직전, 그 소녀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 첫영성체할 때 옆에 와 계셔 주세요. 아버지, 꼭이요 네?"
그러나 아버지는 소녀에게 이렇게 쏘아붙였다.
"난 그따위 것은 믿지 않는다." 그리고는 성큼 나가 버렸다. 그 소녀의 아버지가 단도를 뽑아 어린 딸의 가슴팍에 꽂았다고 하더라도 이보다 더 아프게 그 소녀의 마음을 찢을 수는 없었으리라. 학교의 수녀들이나 엄마에게 서는 성체 안에 계시는 구세주를 영한다고 배웠는데, 아버지는 -비록 그가 딸의 마음을 상하게 할 뜻은 없었다 하더라도- 딸의 급소(急所)를 찌른 것이나 다름 없 었다.
가정의 영향
값이 있는 것은 표양(表樣)이다. 가정의 영향은 학교의 그것보다 강하다. 이는 말뿐 아니라 실천으로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자연은 부모를 자녀 들의 가장 힘 있는 스승으로 마련했다. 따라서 이 두 스승이 종교 문제에 관해서 일치하지 않고서 제자들이 종교에 대한 혼란과 갈피를 잡지 못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바랄 수는 없다.
하기야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가족 생활의 행복이나 일치가 영향을 받지는 않 는다."라고 말하는 이가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이 만일 아버지의 비수 (匕首)를 품은 말이 어린 자녀들에게 끼치는 파괴력을 목격하기만 했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그저 이론의 세계에서만 살았지, 피와 살이 있는 현실에 서 살고 있지는 않았음을 깨달을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종교의 차이라는 칼 로 두 쪽이 난 가정은 눈물을 쏟고 마음을 짓누르는 괴로움을 맛보게 마련이다. 종교는 가정의 행복을 좌우한다. 이것은 결합의 끈이 되기도 하거니와, 이들을 찢어 놓는 칼이 되기도 한다. 이는 가정의 위기에 결합의 끈을 자른다. 물론 예 외도 있다. 그러나 그 예외는 이 원칙을 증명할 따름이다.
혼종혼(混宗婚)
"교회에는 혼종혼을 금하는 법이 있다면서 왜 그다지도 관면(寬免)을 자주 주어 이런 결혼을 허용하는가?" 이런 질문이 비신자 친구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교 회는 가톨릭 신자끼리 결혼한다는 이상(理想)을 굳게 지키지만, 이것이 모든 환 경에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님도 이해한다. 10억이 넘는 방대한 수효의 신자 들이 세계 각국에 퍼져 있으니 말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외교인(外敎人)들과 날마다 접촉하는 가톨릭 신자들이 비 신자들과 사귀어, 그 우정이 발전하여 구혼하고 결혼하게 되는 경우도 있음을 교 회는 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비신자와의 결혼이 불가피하다는 것도 안다. 교회 는 불쾌한 현실을 모른 척하려고 머리를 모래 속에 처박지는 않는다. 교회는 현 실에 그대로 솔직하고 정정 당당하게 직면한다. 교회는 그 자녀들의 행복과 복지 -현세의 것과 아울러 영원한 그것- 를 항상 염두에 두고서 현실의 조건에 비추어 교회법을 적용하고 있다.
관면받을 조건
사정에 따라 이상(理想)이 실현될 수 없을 때에는, 교회는 그 다음으로 최선이 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법을 세운다. 교회는 비신자와 깊은 연애에 빠져 있어 그와 결혼해야만 일생 행복하겠다고 여기고 있는 교회의 자녀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그와 결혼할 수 없다."고 잘라 버리지는 않는다. 그 대신 보다 더 자애 깊은 태도를 드러낸다. 이는 인간의 행복을 고취하고 신자들의 신앙을 보존하기 를 아울러 걱정하는 교회의 태도를 반영하는 정책이다. 교회는 충분한 근거가 있 는 경우에는 어느 개인에게 관면을 주어, 개신교 신자 또는 전혀 종교를 갖고 있 지 않은 이와의 결혼을 허락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가톨릭인 배우자와 그 출생할 자녀들의 신앙을 합당하게 보호할 확증을 얻은 경우에만 허락한다.
이 확증은 사제의 입회 아래 비신자인 상대가 서명하는 다음과 같은 서약서에 드러나며, 교우도 마찬가지로 서약한다.
소견이 좁은가?
"교회가 모든 자녀에게 반드시 가톨릭 신앙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우기는 것은 소견이 좁은 억지가 아닌가? 아들은 아버지의 종교를 따르게 하고, 딸은 어머니의 종교를 따르게 하면 더 공평하지 않겠는가?" 비신자들에게서 자주 듣는 질문이다. 대답은 이렇다. 이러한 질문의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은 비신자들이 흔히 말하는 것 처럼, 모든 종교는 모두 대체로 비슷한 것, 곧 모두 다 좋고 모두 다 참되 다는 가정(假定)이다. 이 가정으로 따지면 성교회는 분명히 한편으로 치우친 아 주 독선적인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이 가정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아니 이 가정(假定)은 맞는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허위이다.
이미 앞의 글 -종교 무차별론의 허구성 (1), (2)- 에서 말했거니와 종교 무차별 론은 그 어떤 논리로도 즉 냉철한 이성과 지성에는 물론이거니와 그리스도의 계 시 진리에 비추어 보아도 명백히 거짓인 것은 이미 판가름 났다는 것은 이제 독 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그리스도는 여러 교회를 세우지 않고 오직 성교회 하나만 세웠다. 가톨릭 신자 들은 가톨릭이 바로 그 성교회임을 믿는다. 현실의 사실과 역사적 진리에 근거 를 둔 교회의 정책은 우격 다짐이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진리를 위해서 오류를 배척할 권리를 요구하는 오직 하나의 것이다. 만일 교회가 타협을 하여 성교회 밖에서 교육하기를 허락한다면,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친 진리를 모든 인류 에게 가르칠 신명(神命)을 어기는 것이 된다. 성교회는 그 자녀들과 그 후대 자 녀들의 신앙을 보호할 의무를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다. 교회는 하느님께로부터 온 기원(起源)과 임무를 믿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신앙을 실천에 옮기는 용기를 갖고 있다.
같은 이유로 교회는 혼인이 마땅히 가톨릭 사제 앞에서 행해져야 할 의무를 느 낀다. 만일 교회가 그 자녀들이 가톨릭이 아닌 목사 앞에서 가톨릭이 아닌 이와 결혼함을 허락한다면, 이는 곧 교회가 하나의 인간이 세운 그런 열교파(裂敎波) 들을 예수 그리스도가 세운 가톨릭과 동등시함을 함축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이는 교회가 이의 지성적 순결의 대가(代價)를 치러야만 가능하다. 더욱이 가톨릭 교회는 혼배를 성사로 보지만, 가톨릭이 아닌 목사들은 거의 다 그렇지 않다.
나는 가톨릭이 아닌 독자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 뜻이 조금도 없지만, 성교 회(聖敎會)는 하느님께로부터 온 기원(起源)과 임무를 명확히 자각하고 있 는 까닭에, 창립자이신 하느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오류를 인정할 수가 없다 는 말은 해야겠다.
한 가지 반역
마르틴 루터나 칼뱅, 존 녹스, 존 웨슬리, 메리 베이커 에디 부인이나 에이미 샘 플 맥퍼슨 허튼 부인 등이 세운 교회를 그리스도께서 세운 성교회와 같은 자리에 두고 같은 권위를 인정한다면 이는 곧 성교회에 대해서 배교 행위가 될 것이다. 성교회가 그 자녀들이 열교파의 목사 앞에서 결혼하기를 금하는 이유가 이 것이다. 이 엄중한 법률을 알면서 일부러 어기는 못마땅한 신자는 성교회로부터 파문의 벌을 받는다. 그들은 교회에 크게 불순명했을 뿐더러 예수 그리스도 의 신앙을 반역했기 때문이다.
민법(民法)으로만 결혼하려는 가톨릭 신자가 있다면 이는 대죄를 범하는 것일 뿐더러 그 결혼은 종교상 무효다. 그러나 파문의 벌을 받지는 않는다. 이는 신 앙을 배반하거나 반역하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오 10세 교황의 칙령(勅 令) ’네 테메레’ -1908년 4월 19일 부활 주일부터 발효- 가 반포된 이래 가톨 릭 신자의 결혼은 가톨릭 사제 앞에서 거행된 것이라야 유효하다. 이 법은 가톨 릭 신자에게만 적용된다. 가톨릭이 아닌 이를 위해서 이렇게 입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주 욕을 먹는 일이지만, 교회는 개신교 목사 앞에서나 또는 민법으 로 맺은 개신교 신자의 결혼은 유효함을 인정한다.
"가톨릭 교회는 겉으로는 혼종혼을 반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돈만 넉넉히 내 면 관면을 주고 있음이 사실이 아닌가?" 우리를 떠난 형제들은 거의 모두 이러 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허무맹랑한 소리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관면 혼인을 주는 경우에 는 반드시 무료로 주라고 규정했다.(Sees IV. DeRef. Mat. 5). 이와 똑같은 법 규는 종래 교황들이나 성성(聖省)에서 여러 번 반포된 바 있다. 다만 교구 본부 와 로마 당국의 비용 때문에 약간 기부하는 것은 허락한다. 문서를 발행하고 이 를 기록하고 또 그런 일을 맡고 있는 사무원과 서기 등 비용이 드는 것은 뻔한 일이고 이것은 응당 그런 일을 해 달라고 청하는 이가 부담해야 할 것이다. 그런 데 그 금액은 아주 적고 그나마 가난한 이는 이것도 부담하지 않아도 된다. 이것 은 교회법에 명시되어 있다.
진리의 우월성
개신교, 유다교, 가톨릭 신자들이 상호간의 시민 관계에 있어 불필요한 알력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 일리노이 대학에서 개최된 선의(善意)의 우호적 세미나 때에 개신교 대표가 일어서 우호적인 태도로, 가톨릭 교회의 혼인법이야말로 적개심을 야기시키는 원인이라고 꼬집었다.
"가톨릭 신자가 개신교 신자와 결혼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가톨릭 신부 앞에서만 거행하고, 거기서 출생되는 자녀들은 모두 가톨릭 신앙으로 교육되어야 한다고 가톨릭은 고집한다. 많은 개신교 신자들은 이를 분개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는 고집일 뿐 아니라 가톨릭 교회가 우리 교파의 많은 이를 자기네 교회로 끌어들 이려는 속임수로 여겨진다. 개신교측도 혼인 주례사를 선택하고 그 자녀들의 종 교 교육 문제에 있어서도 동등한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어떻게 이 조건을 좀 완화할 수 없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김에 다시 다짐하는데, 앞서 지적한 대로 이 문제 하나만 따로 떼어놓고는 적합하게 대답할 수가 없다. 더 깊이 파고들어가, 전체의 관점 (觀點) 밑에 있는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할 필요가 있다. 곧 모든 종교가 동등하 게 유효하고, 똑같이 좋고 참된가?
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운 교회는 오직 하나뿐이고, 이것만이 사람이 세운 어 떠한 교파도 주장할 수 없는 권리와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객관적 증거 에 의거해서 이를 증명하고자 한다. 역사적 사실로, 그리스도의 언행(言行)으로,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성전(聖傳)의 소리로, 사도 전승(使徒傳乘)의 중단 없는 계 속으로, 모든 종파의 공평한 역사가들의 압도적 증언으로, 가톨릭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운 교회일뿐더러 개신교가 탄생되기 15세기 전부터 존재해 왔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일생 동안 줄곧 신앙의 통일을 고집하 였다. 교회도 창립자의 본을 따라 똑같이 주장한다.
만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에 어긋나는 어떤 신조(信條)를 타협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즉시 교회는 그 두터운 신임을 배반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하기 야 교회가 그 가르침의 진리에 관해서 독선적 태도를 고집하는 그것, 자기와 모 순이 되는 신조에 대해서 동등함을 인정하기를 단연 거부하는 그 태도가 가톨릭 이 아닌 이를 각별히 불쾌하게 할 수도 있다. 아까 그 개신교 대표의 말대로 화 를 나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그 창립자의 태도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분은 엄숙하게 선언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 (마르 16, 16).
속임수
개신교 대표의 둘째 비난 -성교회의 혼인법은 개신교 신자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끌어들이려는 속임수라는- 에 대한 대답 역시 뻔하다. 이것이 참말이라면 성교회는 혼종혼을 금하기는커녕 장려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실은 이를 경 고하고 있다.
과거에는 이 혼종혼은 성당에서는 거행할 수 없고 사제관(司祭館)에서만 거행할 수 있었다. 이는 교회가 이를 찬성하지 않음을 뜻한다. 최근에는 여러 교구에서 이런 혼인도 성당에서 거행하기를 허락하고 있는데, 이는 결혼이란 그저 사회적 국가적 예식(禮式)일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종교 예식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 중요한 진리를 강조할 필요성 때문에 모든 혼배를 성당의 제대 앞에서 거행하 는 풍습이 전국적으로 전파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혼의 혼인 공시는 생략된 다. 혼배 반지를 축복받지도 못하고 혼배 강복도 못 받는다. 이 모든 것은 교회가 그 자녀들에게 혼종혼이 이상(理想)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기 위한 것이다. 교회는 오랜 경험에 비추어 이러한 결혼에서 출생되는 자녀들은 아무 교 회에도 안 나가고 드디어는 모든 기성 종교(旣成宗敎)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된다 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교회로서는 아무 것도 안 믿는 신자보다는 어떤 교회에라 도 속하여 있는 편이 훨씬 낫다.
더군다나 교묘한 농간을 부려서 사람을 올가미에 걸리게 한다는 것은 교회 정 신과는 아예 맞지 않는다. 교회는 자기의 자유 의지로 오는 이만, 또 교리 공부 를 철저하게 마쳐서 교회에서 가르치는 진리를 깊게 확신한 다음이 아니면 누구 라도 신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강요당한 빛이 보이거나, 그냥 한때 충동으로 결심하였거나 지성의 확신이 전혀 없는 이를 받아들일 생각은 꿈에도 없다.
교회의 눈으로 볼 때 신앙의 우리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더할 수 없는 보배다. 그러나 이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성과 의지에서 와야 한다. 그러기 에 개신교 친구들은 가톨릭 교회가 혼종혼에 관한 법률로써 올가미를 씌워 가톨 릭으로 잡아 끌려 한다고 걱정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교회는 개신교 신자들이 자기들끼리 결혼함을, 마치 가톨릭 신자들이 자기들끼리 결혼하는 이상(理想)을 기뻐하듯 즐겨 한다. 신조와 신심 행위가 다르면 신앙이 약해질 테지만, 끼리끼 리 결혼하면 신앙 행위가 일치 단결되는니 만큼 싱싱하게 되기 때문이다.
근본적 차이
미국에서 개최된 그리스도교 연합회의는 혼종혼에 관한 가톨릭의 요구 조건을 비난했다. 미국 성직자 집행 위원회 위원장은 이 비판에 대답하여, 성교회는 이 러한 혼인을 장려하지 않고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끼리 혼인하기를 강조하는 점 에 있어 비가톨릭 지도자들과 발을 맞추고 있음을 지적했다. 혼종혼을 못하게 하 고 같은 종교인끼리 결혼하기를 권장하기 위해서는 성교회는 지금 하고 있는 이 상의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가톨릭이 아닌 이들은 거의 모두가 이 요구 조건 에 서명하기를 종교적으로 거의 또는 전혀 꺼리지 않는다. 이 사실은 그들이 자 기 교파를 그야말로 우습게 여기고 있다는 증거다.
이는 개신교의 중추 원리(中樞原理), 즉 종교에 있어 개인의 사사로운 판단이 최 고의 권위를 갖는다는 원리에 기인한다. 이 원리 위에서 행동하는 개신교 신자들 은 자기가 먼저 믿던 신조를 버리고 더 매력을 느끼는 다른 신조를 믿어도 양심 에 아무런 거리낌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교파가 언제까지라도 자기를 얽 매어 둘 수 없음을 안다. 즉 개신교의 원리에 의거하면 -이로부터 수백 가지교파 가 생겨났는데- 개인의 판단이 다시는 상소(上訴)할 데가 없는 최고 재판소가 되 는 까닭이다.
이와는 반대로 가톨릭 교회에서는 개인의 판단에 대치(對峙)하는 권위의 원리가 최상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이름으로 가르칠 권능을 받은 교회의 권위 가 종교 신앙 문제에 있어 안전하고 믿음직한 지침이다. 그러므로 가톨릭 신앙의 근본 원리는 가톨릭이 아닌 이가 그다지도 쉽사리 교파를 옮기는 그런 뼈대 없는 짓을 용인하지 않는다. 워낙 가톨릭이 아닌 교파는 자칭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운 유일한 참교회라고 우길 자신이 없을 것이다. 오늘날 모든 개신교 교파들에게는 불안감이 큰 특징이 되고 있는데, 이는 스스로 그들보다 더 큰 진리에 대해서 안 절부절못하고 이를 열망하고 있다는 사실에 반영된다. 이런 특징은 이름만 걸고 있는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에게서 역력히 드러난다. 이런 사실은 혼종혼으로 말미 암아 야기될 종교적 양자(養子) 관계의 이동에 대해서 정직하고 공평하게 연구하 는 모든 이가 명심해야 될 요인(要因)이다.
하느님과 사람의 사랑
요컨대 가톨릭 교회는 혼종혼을 기화로 삼아서 가톨릭이 아닌 편의 신앙을 빼앗 음으로써 자기 신자를 불린 적도 없거니와, 불릴 생각도 없다고 말해도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교회는 신자들이 어떠한 교파의 신자와도 평화롭 게 지내기를 바라고 있다. 교회는 신자들과 다른 종교인들의 시민 관계에 존재하 는 모든 불필요한 알력의 원인을 없애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교회에 혼인법 이 있음은 자기 신자뿐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모든 이의 행복과 복지를 진심으 로 염려하는 때문이다. 교회는 가톨릭이 아닌 이로부터 자기가 사랑하고 있는 사 람과 결혼할 일체의 가능성마저 몽땅 빼앗아 버림으로써 그의 행복한 꿈을 여지 없이 깨뜨려 버리려 하는 것은 고사하고, 신앙을 보존하기 위한 합당한 보호가 보장된다는 조건 아래 이런 결합을 허락하고 있다.
이러한 어머니다운 태도야말로 진리에 대한 불변의 충성과, 가톨릭이든 아니든 모든 인류의 행복에 대한 자애 깊은 걱정이 함께 감탄할 만큼 융합되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가톨릭 교회가 비신자에게도 부부의 애정과 행복의 꿈을 실현시켜 주기 위해서, 하느님께로부터 맡은 사명을 배반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있음을 보는 우리 동포들은 혼종혼에 대한 교회의 태도가 정당하다고 판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제까지 흉금(胸襟)을 탁 터 놓고 공평 무사한 태도로 이 문제를 다루어 온 비신자 독자 여러분은, 이 말썽 많은 문제에 대한 교회의 태도 속에, 창립자에 대한 교회의 사랑과 충성과 아울 러 신자들에게 대한 교회의 사랑과 헌신(獻身)이 훌륭히 반영되고 있음을 깨달았 을 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The Faith of Millions (억만인의 신앙)’ 中에서 -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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