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사도 바오로는 참수로 알고 있는데 사도행전에서는 왜 끝이 없습니까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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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효숙 | 작성일2008-05-27 | 조회수594 | 추천수1 | 신고 |
아무도 대답이 없으셔서 제가 찾은 것을 올려 놓을까 합니다. 성경자료실 317번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새로 번역한 신약 성서의 사도행전 입문을 한 번 읽어 보십시오. (참고로 그 곳 304 번에 살트르바오로 서울관구 홈페이지에서 옮겨온 사도 행전 입문도 있습니다.) 아래에 317번 사도행전의 일부를 올립니다. 참고하십시오. ================================================================ 사도행전 입문
사도행전도 셋째 복음서처럼 바오로 사도의 동료인 루가의 작품이다. 루가는 사도행전에서 자기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일들을 이야기한다. 200년쯤 되었을 때, 온 교회가 ‘사도들’에게서 유래하는 이 작품을 성서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진리와 신앙의 규범이 된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늦어도 4세기부터는 부활 시기의 성찬 전례 중에 이 사도행전이 봉독된다. 이렇게 사도행전은 초기 수백 년 동안 교회의 신앙에 빛을 비추어 준다. 또한 세례에서부터 시작하여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하나인 스데파노’가 그 첫 본보기를 보인 순교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활력을 부여하고 방향을 제시한다. 사도행전에 그려진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은 당시에 갓 태어나기 시작하는 수도 생활에도 큰 영감을 준다. 그 뒤로 모든 개혁 운동이나 선교 운동에는 반드시 복음과 바오로의 권고와 함께, 사도행전이 상기시키는 ‘사도적 삶’에 대한 향수가 섞여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18세기부터는, 이렇게 오래 된 ‘해석’을 바탕으로 하는 여러 가지 확신이 이른바 비평적 성서학에서 문제시되기에 이른다. 이 비평적 학문에는 그 동안 과도한 점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의 업적이나 장점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곧 이 현대적 성서학은 사도행전의 이해에 꼭 필요한 도구이다. 다만 이 학문을 엄격히 적용시켜, 학자들이 연이어 제기하는 가설들을 절대적 가치를 지닌 교의로 변질시키는 실수는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 학문이 지니는 한계를 뚜렷이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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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저자와 집필 연대
지금까지 말해 온 것처럼, 저자가 누구이며 그가 언제 이 책을 집필하였는지 규명하지 않고서도 사도행전에 관하여 길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독자가 누구이며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가라는 문제처럼, 이 책을 충분히 이해하고 해석하려면 저자와 저술 연대에 관한 고전적 문제도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제3복음서의 저자와 같다. 이러한 전통적 견해는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저자가 같다는 것은 두 작품의 머리말을 비교해 보면 확실해진다. 둘 다 데오필로에게 헌정되는데(루가 1,3; 사도 1,1), 사도행전의 머리말은 루가 복음서의 머리말을 가리킨다(1,1 각주). 또 이 두 작품의 말과 생각에 관한 연구가 저자의 동일성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 저자는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사도행전에는 “우리”를 주어로 하는 단락들이 있는데(13쪽), 이 사실은 저자가 바오로의 일행 가운데 한 사람임을 시사한다. 이렇게 저자를 은밀하게 가리킨다는 사실, 이 책에서 바오로의 선교에 부여하는 위치, 바오로의 사상과 중요한 점에서 일치한다는 사실 등은, 저자가 바오로 곁에 있던 사람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 “사랑하는 의사 루가”가(골로 4,14; 필레 24) 유일한 가능성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다른 자료들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예컨대 사도직의 개념이라든가(13,31 각주) 율법의 역할 같은 중요한 사항과 관련해서까지, 사도행전의 생각과 바오로의 여러 서간에 나타나는 생각의 일치 여부가 적어도 계속 문제로 남는다. 그리고 사도행전이 말하는 어떤 것들이나 또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 어떤 사항들은 참으로 놀랍다. 예컨대, 바오로의 동료라는 저자가 다른 데에서는 이교인들의 개종 문제에 관하여 그토록 명백하게 관심을 보이면서, 어째서 갈라디아 교회의 위기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가? 이는 간과할 수 없는 실제적인 문제이다. 그렇다면 제3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가 바오로의 동료일 수 없고 그에 따라서 루가가 유일한 후보자일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다고 결론을 지어야 하는가? 이는 적어도 논의가 계속되어야 하는 사항이다. 이 책의 집필 연대와 관련해서 한 가지는 확실하다. 머리말에 따르면(1,1) 사도행전이 루가 복음서 다음에 저술되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정확한 연대를 규명하는 일은 쉬운 문제로 여겨졌다. 저자는 바오로가 팔레스티나에서 받은 재판에 관해서는 길게 이야기해 놓고서, 정작 로마에서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이는 저자가 바오로의 로마 도착 “이 년”(28,30) 뒤에 자기의 작품을 저술하였기 때문에, 그 결말을 알 수가 없었음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러면 집필 연대가 바오로의 재판이 완결되기 전인 62-63년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 루가 복음서, 그리고 그보다 앞서 집필된 마르코 복음서의 연대가 훨씬 이전으로 올라가게 된다. 이는 전체적으로 보아 현대 성서학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이다. 이 밖에도 저자가 왜 재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책을 집필하지 않았는지(28,30 각주), 왜 적어도 종결 부분만이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바오로가 유죄 판결을 받든(20,22-24; 21,11-14 참조) 무죄로 석방되든(26,32. 그리고 필레 22 참조), 사도행전의 독자들에게는 두 경우 다 놀랄 일이 아니다. 사실 바오로가 로마에 도착한 다음부터는, 저자의 관심이 재판에서 이 책의 더욱 중요한 주제로 옮겨 간다. 곧 “땅 끝에” 있는 로마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다(28,30 각주). 바로 바오로가 예루살렘에서 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하라는, 곧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받은 것이다(23,11). 사도행전의 끝 부분을 이렇게 해석하면, 이 책 편집의 정확한 연대를 더 이상 규명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현대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제3복음서는 70년 이후, 그리고 사도행전은 그보다 십 년 가량 뒤인 80년경에 집필된 것으로 생각한다.
7. 사도행전의 의의
사도행전은 어떤 의미로 신약성서에서 현시성이 가장 큰 책이다. 이 책에서 펼쳐지는 “말씀”의 시간과 공간이,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1,11)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열려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형제들” 곧 모든 그리스도인이 인내심을 가지고 다 함께 이 책을 읽는 법을 알게 된다면, 다양성 속에서도 하느님의 유일한 백성을 이루는 교회 안에서, 자기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땅 끝까지” 공동으로 증언해야 하는 사람들임을 다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주 예수님께서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베풀어 주시는 성령께서 그들에게 그러한 ‘일치된 결정’을(15,25) 불어넣으시어, 다 함께 “주님의 길”을 걸어가도록 이끌어 주실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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