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묻고답하기

제목 이경림 님을 보면서 결국 '자살'을 고민해야 하지않을까요?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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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의형 쪽지 캡슐 작성일2011-02-15 조회수703 추천수0 신고
이경림(zzalee) (2011/02/13) : 상당히 심각한 고민을 하시네요. 얼마 살지 않았지만 본인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순간이 바로 그 주장을 덮어야 하는 순간인 경우가 많더군요. 특히나 하느님에 대한 마음을 정리할 때는 더욱더. 형제님처럼 사회문제나 환경적인 부문을 걱정하시는 분도 많지만 의외로 내 옆에 있는 이웃을 위하고 걱정하며 돌보는 착한 사마리안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어떠한 한가지 방법만이 하느님에게 다가가는 방법은 아니더군요. 보다 폭 넓고 따스한 마음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고 따스함을 나누는 것도. 하시고자 하는 것이 과연 하느님의 일인지 다시한번 고민해보시면 어떨까요. 의외로 하느님의 일인 줄알고 다가가보면 결국 나의 일이거나 세상  
 
이경림(zzalee) (2011/02/13) : 세상의 일인 경우가 많더군요. 분별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이일이 하느님께 합당한 일인지, 하느님이 기뻐하실 일인지 묵상하고 주위의 신앙인들과 나의 신앙을 나누어 검증해보고 더 깊어지는 필요성을 점점 더 느낍니다. 또한 교회는 어느 누구 한사람의 행동이 교회 전체의 행동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현재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판단하고 평가하지만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고 판단했는지는 결국 하느님의 시간만이 말해주던군요. 형제님의 신앙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지 안을까요? 무엇을 위하여 신앙을 가지고 하느님에게 다가가는지에 대한 우리의 끝없는 질문을 계속해봐야하지 않을까요?  
 
이경림(zzalee) (2011/02/13) : 정녕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 말씀에 따라 살고 있는 것인가요.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요. 무엇을 해야 그곳에 갈 수 있나요.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진부한 문구를 다시 언급해서라도 우리는 세상이 알아주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이 알아주시는 사랑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그 기준에 합당한 행위를 추구해야하지 않나요. 세상이 폭력적이라고 몰상식하고 이기적이라고 우리도 우리의 주장을 세우기위해 맞선다면 과연... 세상이 변하기보다는 내자신이 하나하나가 변해갈 때 세상이 변한다는 어느 주교님의 비문이 생각나는 밤입니다
 
 
첫 글에 대한 생각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 인간은 그저 죄인일뿐입니다.
어떠한 판단도 무익하기 때문이지요.
지금 교회는 신앙의 본질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할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만일 자살을 막기 위해서 신앙의 본질을 통해서 자살을 막는 것에 얼마나 앞장서고 있는지 먼저 말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은 자살을 방치하는 있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살을 원치않으시면 자살을 막기위해서, 개인적인 문제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의 방법은 방치와 방조는 절대로 안될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경림의 글을 보고 좋은 신앙인듯 보이지만, 하느님에 충실한 신자는 자살하라고 강요하는 글인 것이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절대 하느님과 인간은 다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죄인이 죽어야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인간 최선의 길이 아닌가요?
첫번 글에 대한 이경림의 글을 통해서 바른 신앙인의 겉모습이고 저도 그렇게 밖에 알 수 없을 줄 압니다. 하지만 신앙의 본질을 흐리는 잘못된 신앙인지? 아닌지? 이에 대한 답이 없이, 진정한 신자의 죽음에 침뱉는 배교 행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두번째 이경림 글에 대한 답변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지키려는 자에게 자살밖에 없는 경우에 결국 자살도 가능한지 묻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없이 그저 자살하면 신앙의 본질을 비난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분명한 예로 든 것은 정의사회구현을 하는 신부님을 징계하고 욕하고 한쪽을 너무 지나치게 몰아가는 가장 큰 교회 권력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힘없이 무너지고 있는 세상의 자본과 권력에 교회 권력이 너무 무능함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님이 답변한 글에서 예는 테레사 수녀님의 얘기입니다.
테레사 수녀님의 희생과 삶은 본받아야 하고 지양해야 하지만 근본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인도인의 가난과 병에서 도와주는 것은 그것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힘과 능력이 되어야 할 대책입니다. 이에 대해 오히려 무능력하게 무기력하게 만든 것이라면 좋은 모습같지만 잘못된 것이 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웃을 위해 빵과 비료와 돈을 주었는데 그 빵과 돈으로 다른 사람에게 비싸게 팔아서 더욱 사람들을 힘들게하고 자기는 더 많은 폭리를 누리면서 다른 이웃까지 가난을 대물림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을 주었더니 이에 반대의견인 사람에게 돈으로 매수하거나 돈으로 무기와 공권력을 이용해서 압제당한 자들에게 무기력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런 도움은 절대로 정당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님의 의견으로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죽는 것이 좋지 않는가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런 본질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님의 이야기에서는 본질을 말하지만 정말 본질이 없는 내용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없다면 본질에 대한 고민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없다면 자살해서 하느님께 바로 가는 것이 좋지 않는가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본질에 대해 잘못된 고민은 결국 하느님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님께서 저를 위해 걱정해 주셨는데 저는 하느님께 바르게 가기위해 자살을 말한 것입니다. 님의 글 방향을 정리하면 자살하지 마라! 그리고 자살을 방조하는 죄를 짓고 영원히 하느님과 멀어지라는 저주같습니다. 저는 인간의 저주와 교회의 저주를 받는 것보다 하느님께 축복받는 길을 선택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두번째 글은 잘못된 글이라고 하여도 괜찮은지 되묻고 싶은 것입니다.
 
 
이경림님의 세번째글에 대해 결론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1. 하느님이 알아주시는 사랑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그 기준에 합당한 행위를 추구해야하지 않나요.
2. 세상이 폭력적이라고 몰상식하고 이기적이라고 우리도 우리의 주장을 세우기위해 맞선다면 과연...
3. 세상이 변하기보다는 내자신이 하나하나가 변해갈 때 세상이 변한다는 어느 주교님의 비문이 생각나는 밤입니다.
 
1.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데 어떻게 살까? 결국 어떻게 살다가 죽어야 할까라고 저는 말을 바꾸고 싶다고 했습니다.
자살에 대한 제 의견은 님이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느님이 알아 주시는 사랑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살피고자 하는 질문이고 고민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에 합당한 것을 추구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인간은 결국 하느님앞에서 결백을 주장하고자하는 것이 인간의 최소한의 행위가 결국 어떻게 살다가 죽는가에 대한 고민이라는 것입니다.
2. 세상이 폭력적이고 몰상식한 것은 어린 아이면 그냥 압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교회에서 평화를 말하고 하느님을 말하고 교회가 하느님을 말하지만 결국 그게 인간의 일로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하나요? 라는 질문입니다.
제가 묻는 것은 교황이 주교가 사제가 신앙인이 폭력적이지 않은척하면서 더욱 폭력적이지 않는지 묻는 것입니다. 얼마나 몰상식한 일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살펴 보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되지 않는다면 결국 자살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나 묻는 것입니다.
 
3. 마지막에 " 세상이 변하기보다는 내자신이 하나하나가 변해갈 때 세상이 변한다는 어느 주교님의 비문이 생각나는 밤"이라고 하셨네요. 정말 저도 그랬으면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영적인 문제는 더욱 깜깜하게만한 밤입니다.
 
최선이고 최고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내자신이 변해서 저절로 세상이 변하기만 바라는데, 지금은 세상이 좋은쪽을 향해 변하기 보다 더욱 악덕해지고만 있습니다. 결국 내자신이 변하는 것보다 세상이 악덕해지는 것을 보니, 최소한의 교회마저 이미 말살된 종교의 흔적이 아닌지 되묻고 싶은 것입니다.
제가 자살을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의 모습이 "자살'을 통해서 교회마저 이미 세상의 도구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도구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하고 싶은 맘을 표현하고자 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으로 하느님앞에서의 절규입니다.
 
세상이 너무 악한 이유를 먼저 생각해 보세요.
님의 바람처럼 내자신이 잘 변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더욱 악해져 가고만 있는 것일까요?
 
바른 변화라면 작은 죽음에도 눈물을 흘릴 줄 아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죽음마저 침뱉는 것을 보니, 제가 게시판에 글을 쓸 것을 결심한 것입니다.
 
진정한 하느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욕하는 것이, 더욱 힘들게 탄압하는 것이 지금의 교회권력이라는 의심을 지울사가 없습니다. 제대로 하느님을 믿게다고 하면 더욱 힘들게 해서 죽어버려라고 저주하는 것이 지금의 교회가 아닌가요? 한마디로 좋은 것을 알면서 실천조차 할 수 없는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님의 글에 대해 좀 과장해서 들으면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바른 길을 따르는자, 모두 죽여 버려라고 악마와 함께 저주하는데 합세한 악의 무리 중 한사람의 답변으로만 들립니다.
 
제가 말하는 자살에 요지는 이렇습니다. 인간에게 최선의 선택 방법의 한가지만은 남아있다고 악을 향해 경고를 하고 싶은 심정을 들어내고자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자살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가톨릭 교회가 추구하는 영으로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악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신호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님과 교회가 모두 다 악이라고 말할 수도 없으니 이렇게 '자살'을 통해서 하느님의 일을 들어나고 있다고 마지막으로 보잘것없는 생명일지라도 증명해 보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일에서 자살이 늘고 있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의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고 교회가 하느님의 방향에서 어느 사이에 잘못 하고 있다고 말하기 위해 '자살 금지"한 천주교에 대한 진정한 방향 수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자살 금지는 결국 교회일이면서 사람의 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입장에서 다시 바꾸길 바라는 것입니다. 본질은 자살 금지가 아니라, 자살이 일어나지 않는 세상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말도 전제 해서 어떻게 진정성을 들어내야 하는가에 대해 인간 신앙의 자유에 대해 최소한 보장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유마저 자살이라는 말로 덮는 것은 서양식 판단이라고 주장도 하였습니다.
 
동양, 특히 대한민국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결백을 주장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이에 대해 자살 금지에 대한 한국 카톨릭의 입장이 되어 달라는 주장인 것입니다.
 
 
님과 제 글에 대해 공통점은 이렇습니다.
 
님의 답변이나 제 자살이야기나 결국 들어났을 때에 그냥 방치되면 자살과 같은 안좋은 단순한 일이 넘쳐날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그 우려가 근본적인 해결은 절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하느님 중심에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중심이라고 하면서 인간은 더욱 멀어져 갈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님의 답변과 제 고민에 대한 진정한 결론은 아직 이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님의 답변을 해 주신 것은 고맙습니다. 그리고 좋은 의견인 것도 알지만 신앙 본질에 대해 더욱 서로 고민해야 할 것이라는 것으로 님의 의견을 한쪽측면에서 일축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제 글에 대한 답변과 그리고 제 글의 답변을 통해서 더욱 하느님께 앞으로 가는 것이라면 비록 인간이 하는 일이 죄라지만 그저 추악한 인간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자살이라는 죄인의 아픔을 계속 들어내서 결국 추악한 인간의 모습만은 아님을 들어내고 싶기만 합니다.
 
만일 자살이 되어 하느님께 더욱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제가 이제까지 살아온 모든 것에 대한 신앙의 좋은 답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혼자가 아닌 세상과 교회의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지켜가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름 저만의 방식으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아픔을 품고 싶은 것입니다.
 
또한 가정입니다만 교회에서 이혼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혼이라는 글을 저와 같이 주장한다면 저는 또한 이경림의 글처럼 그렇게 답변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살에 대한 주장은 저는 쉽게 접을 내용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저는 일단 이혼에 대해 진정한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먼저 기준을 찾는다고 말하고 그 기준을 알기까지 침묵할 것 같습니다. 평생 모르면 그게 다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이라면 전적으로 동참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인지 모른다면 침묵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침묵은 결국 내안에 하느님의 존재를 어느 사이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소신껏 대응해서 답변했다면 그것은 완전한 부정까지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님의 의견에 부정적인 견해를 제가 피력했다고 절대적으로 님을 부정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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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의형 (tehlio) 쪽지 대댓글

    이런 자살 논쟁에서 외경에 나오는 어는 죽은 이에 대해 장례를 치뤄주고 고난받는 사람의 얘기라서 힘들어서 그렇습니다.

    2011-02-15 추천(0)
  • 이경림 (zzalee) 쪽지 대댓글

    저의 글에 이렇게 성의를 다하여 답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형제님의 말씀에서 약간의 어색함이 있군요. 진정 자살을 하실려고 그러시는 것인지 아니면 다만 자살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침묵하는 얼어있는 신앙인의 마음에 불을 놓기를 바라시는 것인지요. 혹시 후자라면 이런 어둡고 아픈 방법보다 더 따스하고 아름다운 말들을 나누기에도 이 삶은 너무도 짧지 안나 싶네요. 또한 우리는 죄인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면 어차피 시간이 지나고 그 때가 되면 다 죽지요. 어느누구도 예외없이. 형제님의 글을 읽다보면 저의 우매함으로 자주 줄거리를 놓치네요.

    2011-02-16 추천(0)
  • 이경림 (zzalee) 쪽지 대댓글

    교회가 참 신앙인들을 박해한다고 하시는데 글쎄요. 누가 참신앙인인지 제 눈에는 그리고 인간이 행한 행동으로 저희의 신앙의 중심인 교회를 정의한다면 그 교회는 그사람들의 것이지요. 신부님도 수도자도 교황님도 잘못을 하십니다. 물론 저는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은 우리의 역사가 증명해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희는 그사람들을 보면서 신앙심을 유지하거나 앞날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되는 군요. 큰강이 흘러가다보면 어떤 물은 썩기도 하고 쓰레기를 담기도 하지만 결국 그강은 흘러갑니다. 그럼 우린 가만히 앉아서 눈물만 흘려야하나요? 각자가 할 수 있는 바를 행해야 겠지요. 그 행위가 본인이 믿는 하느님의 범위안에서

    2011-02-16 추천(0)
  • 이경림 (zzalee) 쪽지 대댓글

    형제님처럼 약간의 어두운 색깔을 가지고 계신분이 있으면 반대로 약간은 밝은 색깔을 가지고 계신분도 주위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의외로 아직까지 여전히 저희의 교회가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켜나가려고 노력한다고 믿고 따르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신앙때문에 저의 신앙이 흔들린다면 너무 슬퍼지네요. 저자신의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혼돈과 갈등만으로도 하느님에게 다가가기에 힘드는데 그 사이에 그런 사람들을 세우다니요.

    2011-02-16 추천(0)
  • 이경림 (zzalee) 쪽지 대댓글

    형제님 분노보다 용서와 사랑의 실천이 훨씬 힘들더군요. 주위에 잘못한 사람때문에 제 자신이 힘들어 질때 그사람을 용서하고 다시 품을 수 있다면 그 순간 현실안에서 천국을 보게 되리라는 말씀을 되세기지만 이런 의지를 가지고 하느님에게 의탁합니다. 제가 용서 못하더라도 하느님의 힘으로 성령의 힘으로 용서할 수 있도록해달라고. 하느님이 제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실까요. 분노하고 어두워 자신을 책망하고 사회를 원망하며 내 한 목숨 바쳐 그들을 각성시키시길 바라실까요? 하느님의 뜻은 왜 이리도 더디고 느릿느릿 드러나고 이루어 지는 걸까요. 하느님의 교회라고 하는 우리의 공동체안에서도 너무도 많은 부조합들이 많이 있고

    2011-02-16 추천(0)
  • 이경림 (zzalee) 쪽지 대댓글

    저 자신은 바로 그 가운데에 있습니다. 저 자신이 어리석나요? 다만 형제님과 조금 목소리가 다를 뿐이지요. 교회의 외형이나 시스템보다 저 자신이 너무도 소중합니다. 이 소중한 제 자신이 다른 어느 것보다도 하느님에게 향하여 걸어가고 싶습니다. 제 안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움으로 가득 채우고 싶을 뿐입니다. 태산의 모습이 마음에 안들면 바로 앞에 있는 한개의 돌멩이를 옮겨야 하지않을 까요. 애고 너무 두서없이 글을 남깁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2011-02-16 추천(0)
  • 이의형 (tehlio) 쪽지 대댓글

    샬롬! 이경림 님, 혹시 아무런 댓글이 없을 것을 예측했는데 제 예측을 빗나가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얘기의 시작과 끝은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각자 한사람씩 모여서 생긴 것입니다. 이 교회가 전체의 합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권력을 잡으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됩니다. 그 사이 말과 언어와 인간적인 면이 두 사이 단절을 경험했습니다. 이 단절의 극복이 '자살'이라는 화두를 던진 것입니다. 이게 답은 한사람이 교회 전체와 일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작은 모습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2011-02-17 추천(0)
  • 이의형 (tehlio) 쪽지 대댓글

    교회가 참 신앙을 박해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들어나고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심각함을 극단적인 문자적인 표현이지 실제는 작은 심각성입니다. 하지만 일치를 깨고 있는 교회권력의 실수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을 기준하고 판단하는 것은 결국 각자의 신앙과 믿음입니다. 이에 인간이 하는 교회권력이 괜찮아 보이는 작은 실수가 서로 일치를 깨버리고 개인의 신앙마저 말살할 수 있는 엄청난 결과도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예는 노무현 대통령 서거와 정의구현사제에 대한 인사발령과 게시판에 이에 대한 정치적 의견으로 무단삭제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신앙으로 얻는 것 없이 희생하는 것에 대해 무차별적인 비난입니다.

    2011-02-17 추천(0)
  • 이의형 (tehlio) 쪽지 대댓글

    그럼 교회안의 작은 나는 어떻게 제 신앙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가장 소중하고 가장 어려운 것으로 증명해 보이고 싶은 간절함을 무엇으로 보여드릴까요? 이에 대해 교회권력에 대해 무차별적인 인내와 기다림이 한 사람의 인생을 살아가기에 너무나 짧고 힘듭니다. 그냥 넘어가는 것이 님의 의견과 정반대라고 생각해서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2011-02-17 추천(0)
  • 이의형 (tehlio) 쪽지 대댓글

    그럼 우린 가만히 앉아서 눈물만 흘리고만 있지 말고, 각자가 할 수 있는 바를 본인이 믿는 하느님의 범위 안에서 행해야겠지요.

    2011-02-17 추천(0)
  • 이의형 (tehlio) 쪽지 대댓글

    자살'이라는 어두운 화두는 밝은 것은 밝게 말해야하지만 어두운 것은 어둡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상은 어두운데 밝게 말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치라고 생각합니다.

    2011-02-17 추천(0)
  • 이의형 (tehlio) 쪽지 대댓글

    태산의 모습이 마음에 안들면 바로 앞에 있는 한개의 돌멩이를 옮겨야 하지않을까요? 맞습니다. 그래서 교회 전체는 세상을 말한 것도 있지만 제 신앙의 시작 바로 앞에는 교회가 있어서 교회가 먼저 바로 하느님 앞에 서있어야 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제 신앙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 떠오른 성경 내용은 모세가 전쟁 중에 기도를 하는데 모세의 손이 내려오면 이스라엘 군은 밀리고 모세의 손이 하느님을 향해 높이 치켜 들면 이스라엘 군대가 승리한 내용입니다. 지금 교회가 승리하면 세상도 이기고 이런 작은 대응과 일치는 결국 세상을 이길 것이라는 믿음때문입니다. 제 일치는 앞의 예를 드신 분들입니다.

    2011-02-17 추천(0)
  • 이의형 (tehlio) 쪽지 대댓글

    지금 내 주변과 사회와 나라와 세계는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인 한 사람도 그 안에 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기준으로 최선은 전체와 일치하지 않는 현 시대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절박하고 얼마나 간절해야 하는지 말하면서 새로운 변화에 대한 교회의 변화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힘든데 새로운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더 쉽고 간단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결국 일치하기 위한 과정이 정말 죽음과 같기만 합니다.

    2011-02-17 추천(0)
  • 이의형 (tehlio) 쪽지 대댓글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은 이렇습니다. 지금의 다양함과 함께 일치할 수 있는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은 개인이 중요하고 그 합이 전체를 담아내는 문화가 세상을 보다 쉽게 살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문화라는 것은 바로 새로운 교회문화가 요구되는 그릇입니다. 이는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그 안에 사는 개인의 정체성이 들어나는 눈 앞의 기초적인 주장입니다. 이것없이 사는 삶은 지금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 자신이 실제와 다른 것으로 비춰주는 것은 본질도 실제와 다르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처음과 같은 길이라 '자살'이라는 경계와 처음으로 가는 길은 새로운 문제들을 만들어놓았군요.

    2011-02-17 추천(0)
  • 이의형 (tehlio) 쪽지 대댓글

    하지만 본질에 대한 일치는 가장 쉽고 가장 빠르고 가장 간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제가 하고 있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2011-02-17 추천(0)
  • 이의형 (tehlio) 쪽지 대댓글

    오늘 처음 '샬롬'에 대한 의미와 제대로 된 표현을 한 것 같습니다. 오늘 '샬롬'이라는 말을 처음 느껴본 것 같습니다.

    2011-02-17 추천(0)
  • 이경림 (zzalee) 쪽지 대댓글

    많은 답글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형제님의 말씀하신 화두가 단지 화두로 정의 하셨음에 감사합니다. 형제님과 많은 부분이 같으면서도 이질감이 있는 곳도 있군요. 저는 시작이 하느님의 신앙이고 마침도 하느님의 신앙입니다. 교회나 심지어 교황님조차도 하느님에게 제가 다가갈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오로지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로 향하는 저의 마음이며 이의 증명은 오로지 하느님만이 하실거라고 믿습니다.

    2011-02-18 추천(0)
  • 이경림 (zzalee) 쪽지 대댓글

    제가 오로지 변화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의 것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에게로 향하는 저의 자신입니다. 세상모두가 알아주던지 몰라주던지 그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느님은 불의조차도 하느님의 도구로 사용하시고 그 뜻을 펼치시고 진리를 세우신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가 증명하지요. 다만 우리의 인생 100년이 너무 짧아서 어쩌다가 그 결과를 눈으로 못볼때가 많지만요.

    2011-02-18 추천(0)
  • 이경림 (zzalee) 쪽지 대댓글

    형제님, 저의 눈은 너무도 작아서 제 자신을 들어다보기에도 부족합니다. 많은 성인들이 자신을 정제하고 정진해도 생전에 원하시던만큼 이루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하루하루 나이가 들어갈 수록 남의 마음속에 있는 돌덩이 보다 제 자신안에 박힌 바위덩어리에 더 많은 관심이 가는 것은 제 자신이 나약해서일지도 ,,,,,. 하느님에게로 향하는 길은 결코 평탄하고 아름다운 길이 아닌 것같아 아직 어두운 저의 눈을 원망합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2011-02-18 추천(0)
  • 이의형 (tehlio) 쪽지 대댓글

    저도 이경림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 가운데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결과는 하느님입니다. 그래도 제가 제시하는 것은 성령님과 함께 하는 자신의 성결함입니다. 세상 모두가 알아주지 않아도 개인이 지켜나가고 유지되어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심지어 교황님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지만 제가 다른 것은 개인이 교회로 확장해 나가지 않으면 개인도 이유없은 돌덩이 신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시작합니다. 물론 개인차에 따라 스스로 돌덩이가 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 위해서 제 자신의 신앙이 주변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011-02-19 추천(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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