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내 뜻 아닌 하느님 뜻으로 / 연중 제 16주간 화요일(마태 12,46-5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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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7-22 | 조회수75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내 뜻 아닌 하느님 뜻으로 / 연중 제 16주간 화요일(마태 12,46-50) 우리가 길거리에서, 버스나 지하철에서 묵주반지를 낀 교우를 보면 반가운 게, 어쩜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 실천 계명인 이웃 사랑의 뜻이 흐르기에 그럴게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의 신앙 공동체가 지금보다 더 가족적이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그리하면 오로지 주님의 뜻을 함께 찾고, 그것을 함께 실천하는 것이리라. 그것만이 우리를 가족으로 묶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시는데, 성모님과 형제들이 오시어 밖에 서 계셨다. 그래서 어떤 이가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지금 만나려고 밖에 계십니다.” 라고 일렀다.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고 반문하셨다. 그리고는 분명히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뜻을 따르는 이가 형제, 누이요 내 어머니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관계는 어머니와 그 자식 관계일 게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을 찾으신 어머니에게 참으로 냉정하게 대하신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아마도 사랑을 혈연에 한정시킬 때, 그것은 이기적인 것이 될 수 있기에. 유다의 지도자들이 그랬다. 그들은 사랑을 자기 가족과 친지, 이웃이나 자기 민족에게만 국한시켰다. 그렇게 혈육에 집착한 그들인지라 극단적인 이기주의에 빠져 예수님도,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이웃도 보이지 않았을 게다. 많은 이가 예수님은 성모님을 배척하시는데 천주교 신자는 유독 성모님을 왜 그리 공경하느냐며 핀잔거리를 찾는다. 물론 예수님은 공생활을 하시면서 외형적으로는 혈연에 그리 얽매이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더 깊이 묵상하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뜻을 성모님보다 더 순명한 이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라는 아주 강력한 뜻이 담겨 있다. 사실 성모님은 매번 아들 예수님과 한 몸이나 다름이 없이 사셨다. 이보다 더 위대하신 어머니가 정녕 계셨을까? 그리하여 예수님은 혈연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가족 개념을 세우셨다. 그분께서는 이웃을 어떻게 해 주었는지에 따라 예수님의 참 가족 여부가 달려 있단다. 그렇다면 예수님 주변에 있던 이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죄인들과 병자들, 굶주린 이들, 과부들, 힘없는 여인들이었다. 그들에게 하느님 말씀인 사랑을 실천하며 다가가면 그 상급으로 참 가족이 된다는 거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의 가족이 되려면 먼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형제자매가 되어야만 할 게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형제, 자매, 부모’라는 말을 혈연이 아니라 신앙에 따라 사용하셨다. 곧 예수님께 가족이란 물리적인 핏줄이 아닌 영적인 핏줄로 이루어진 공동체이니까. 그러기에 사랑은 주님이 주신 선물이기에 그분의 뜻에 따라야 할 게다. 그 뜻을 벗어나면 맹목적인 사랑이 될 터이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형제, 자매라 부른다. 하느님 뜻을 실천함으로써 그분 자녀가 되었고, 예수님과도 새로운 가족 관계를 맺었기에 서로 믿는 형제자매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따금 하느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형제, 자매라는 이름만 별 의미 없이 사용하곤 한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사랑 실천하는 참 가족이다.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뜻이 살아 있고, 그분이 주신 소명이 우리 삶을 이끈다. 가족을 위해 하루하루를 열린 마음으로 산다. 내 방식이 아닌 하느님 방법으로 가족 사랑을 실천하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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