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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수철 신부님_길 위의 종교, 길 위의 그리스도, 길 위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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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10-02 조회수150 추천수8 반대(0) 신고

 

“그리스도인의 삶”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10월 한달 저를 행복하게 살게 할 좌우명시입니다. 선물처럼 찾아온 시입니다. 산은 ‘불암산’을, 당신은 ‘주님’을 가리킵니다. 날마다 일찍 일어나 강론 쓸때가 바로 주님앞에 서듯 하루중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간입니다. 날마다 기록을 남기듯 일기쓰듯 하는 강론입니다. 수도원은 섬이 아니라 세상에 활짝 열려 있는 중심지이자 세상의 축소판같은 곳입니다. 온갖 일이 다 일어납니다. 세상에 나가지 않고 평생 정주의 삶을 살아도 세상 공부가 가능한 곳입니다. 12세기 마지막 교부라 칭하는 성 벨라도는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책은 우리 체험의 책이다. 내 매일 삶의 책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읽는 것을 배울 때 전체를 한눈에 파악해서 매일의 일을 잘 통합하여 일관성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만이 렉시오디비나 대상이 아니라 일상의 하루도 렉시오 디비나 대상의 또 하나의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한 계속될 아직은 미완(未完)인, 하루하루가 내 삶의 성경책 1쪽입니다. 어제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전형적인 가을이었습니다.

 

“하늘보면

 마음은

 훨훨날아

 흰구름되네”

 

흰구름 가을 하늘보며 배밭사이 산책중 떠오른 시입니다. 아침부터 저녁늦게 까지 수도원 초창기부터 수도원 제반 공사시 많이 봉사한 포크레인 기술의 달인, 요한 형제가 시종일관 즐거운 모습으로 길 보수에 정성을 쏟고 있었습니다. 신고배 수확이 끝난 창고에 들리니 엄청나게 큰 배들에 경탄했고 부럽고 부끄러웠습니다. 저절로 나온 시입니다.

 

“배가

 엄청나게 크다

 밤낮

 쉬지않고 컸구나!

 나는 

 그동안 뭘했나?”

 

살아있는 동안 쉬지 않고 일하는 배나무들이요 밤낮 쉬지 않고 큰 배들이 놀라웠습니다. 얼마전 루벵 대학교수들에 대한 교황님의 강론도 일부 생각났습니다.

 

“약자들을 배려하는 연민가득하고 포용적인 문화를 건설하도록 하라. 이 불꽃이 내내 살아 있도록 하라; 영역을 확장하라! 쉼없는(restless) 진리 추구자들이 되라. 너희들 열정이 쇠퇴함을 허용하지 말고, 지적 무기력함에 항복하지 마라.”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제1독서의 욥이 그러합니다. 쉼이없이 참으로 치열히 한결같이 주님을 섬겨온 욥이요 예수님입니다. 훌쩍 뛰어넘어 욥기 9장을 공부하지만, 시간되면 생략된 4-8장까지 읽어보세요. 욥의 내공이 얼마나 깊은지, 왜 그토록 하느님의 신뢰와 인정을 받았는지 확인할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 하느님과 소송을 벌인다 한들 천에 하나라도 그분께 답변하지 못할 것이네....내가 의롭다 하여도 답변할 말이 없어 내 고소인에게 자비를 구해야 할 것이네.”

 

누구보다 하느님을 잘아는 겸손하고 지혜롭고 신심깊은 욥임을 깨닫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그가 이런 엄청난 하느님의 시험과 시련을 통과할 수 있음도 평소 쉼없이 주님을 섬기고 공부하며 살아온 내공의 결과임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도상중에 있는 예수님께도 이런 내공을 느낍니다. 

 

길 위의 주님이요, 길 위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입니다. 예수님은 집이 없었던 길 위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길들(other Ways)에게 열린 길(the Way)이었습니다. 루카는 마태오나 마르코와 달리 예수님과 당신 일행의 집에 계시는 모습을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새삼 ‘길 위의 그리스도(Christus Viator)’, ‘길 위의 인간(homo viator)’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길가는 사람인 구도자는 ‘정처없는 방랑자’가 아니라 ‘정처있는 여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문득 박목월의 나그네란 시가 생각납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가끔은 이런 나그네 되어, 하느님 찾는 나그네 되어 홀가분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베네딕도회의 정주생활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정주의 ‘뿌리(root)’와 내적 여정의 ‘길(route)’이 공존하는 삶입니다. 밖으로는 하느님 기다리는 정주의 산이요, 안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같은 삶입니다. 물도 고이면 썩듯이 삶도 고이면 썩습니다. 물길따라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내적여정이어야 안주가 아닌 진짜 정주의 삶이 됩니다. 

 

참으로 뿌리와 길의 모순을 절묘하게 살아내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요 예수님과 당대의 제자들이 그러합니다. 끊임없는 주님을 향한 길 위의 삶이지만 정주처 하느님께 날로 깊이 뿌리내린 삶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가와 부활의 도상이라는 아주 절박한 시점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역시 길을 가는데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예나 이제나 얼마나 절박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세 경우의 주님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평생 화두가 됩니다. 얼마나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우리의 삶이 변질되고 타락했는지 부끄럽지만 인정할 수 뿐이 없습니다. 

 

1.“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

 

하느님만을 정주처로 한 나를 과연 따를수 있겠느냐며 첫째 사람의 요구를 은연중 거부하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결코 낭만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절실하게 살아내야 할 삶이라는 것입니다.

 

2.“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두 번째 나를 따르라 할 때 아버지의 집에 가서 먼저 장사지내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자에 대해 에둘러 거부하는 예수님입니다. 하느님 나라 선포의 절박성을 앞서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이의 장사는 살아있다 하나 실상 주님을 모르는 죽어있는 이들에게 장사를 맡기라는 것입니다. 정말 삶과 죽음의 차이가 무엇인지 자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죽음같은 삶을 사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전 사막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공통적 목표는 단 하나, 한 번 뿐인 인생을 “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3.“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세 번째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겠다는 추종자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이 참 냉혹해 보입니다. 역시 임박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절박한 삶에 부수적인 것들은 생략하라는 것입니다. 과거 지향이 아닌 미래 지향의 하느님 나라를 향해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투신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주옥같은 말씀은 무뎌지고 세속화되는 우리를 부단히 일깨우는 평생 화두같은 말씀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뿌리의 사람이자 길의 사람이 되어 파스카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줍니다. 좌우명 애송 고백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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