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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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11-09 | 조회수80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요한 2,13-22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오랜 박해가 끝나고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았음을 상징하는, 가톨릭 교회 입장에서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장소지요. 그런데 그 성전 앞에는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점도 조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당을 바라보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 규모와 화려함을 보고 깜짝 놀라는 장면입니다. ‘정말 대단하다’는 긍정적 의미의 놀라움이 아니라, 돌로 된 성전을 꼭 그렇게나 크고 화려하게 지어야만 했는지 그 의미를 따져묻는 부정적 의미의 놀라움이지요. 프란치스코 성인이 라테라노 대성전을 방문한 것은 교황을 만나 프란치스코 탁발 수도회의 설립을 인준받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교황은 거지처럼 구걸하며 지내는, 당시 부유하고 화려했던 교회의 시각으로 보기에 참으로 ‘모양빠지는’ 그런 수도회를 만들고 싶지 않아 일단 거절합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한 거지가 무너져가는 라테라노 성전을 어깨로 떠받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가 바로 프란치스코 성인임을, 하느님께서 그로 하여금 세속과 재물에 물들어 무너져가는 교회를 일으켜 세울 소명을 맡기신 것임을 깨달아 수도회의 설립을 승인하게 됩니다.
돌로 된 성전은 크고 화려해질수록 재물이라는 맘몬을 섬기는 ‘굿당’으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그 외적인 부분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재물이 들어가기에 자연스레 하느님보다는 재물에 의지하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루살렘 대성전을 크고 화려하게 증축하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했고, 그 돈을 충당하기 위해 성전에 장사꾼들을 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의 현존 앞에 머무르며 조용히 기도하는 성전 본연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그 안에는 늘 장사꾼들이 물건 파는 소리, 다른 상인과 이권을 놓고 다투는 소리 등 인간의 욕망과 집착이 만들어낸 수많은 소음들로 가득차게 되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직접 그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성전이 기도하는 곳으로, 함께 모여 친교를 나누는 곳으로,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찾아가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느끼며 위로와 힘을 얻는 곳으로 되돌아가게 하시려고 채찍과 폭력이라는, 조금은 극단적인 방법까지 사용하신 겁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유다인들이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을 하는거냐고 따져묻자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성전이 내 욕심을 채우고 내 체면을 세우는 공간으로 변질된다면, 그래서 그 안에 하느님도 참된 신앙인도 없어 건물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면, 그런 허울 뿐인 성전은 즉시 허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머무르실 참된 성전을 그분 뜻에 따라, 성령의 인도에 따라 제대로 다시 세워야 합니다. 성전에 하느님 대신 재물이 들어가 주인 행세를 했더니 46년이나 고생해가며 지은 예루살렘 대성전이 욕망과 폭력으로 가득한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 버렸습니다. 내 영혼이 그런 꼴이 되지 않으려면 나의 욕심과 고집을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내 안에 주님을 모시고 그분 뜻을 철저히 실천함으로써 나 자신이 주님의 거룩한 현존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지내는 의미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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