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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생활묵상 3 : 성경을 읽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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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4-11-10 조회수58 추천수1 반대(1) 신고

 

신앙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기 위해 가장 전제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일단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어야 될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이게 믿어지지 않으면서 세례를 받는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분명 하느님과 예수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 이 말은 나중에는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말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는 명제가 될 수 있습니다. 꼭 그렇게 이분법적인 사고로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건 처음 마음 그대로 쭉 유지를 한다는 건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건 누구나 다 인정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오래 가지 못하면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있으니 말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존재를 당연히 믿고 세례를 받은 후 여러 활동을 하거나 아니면 단순히 미사에만 임하며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처음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이라는 존재는 육의 몸을 입고 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했다고 해도 문득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이라기보다는 정말 존재하시기나 할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는가 하면요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현존을 인간의 오감을 통해서라든지 어떤 감각수단을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직접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체험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쉽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별안간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육적인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그런 육적인 한계에서 오는 부정도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겁니다. 

 

아마도 만약 이런 한계를 이미 극복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성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우리에겐 이런 한계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건 어떻게 보면 믿음의 깊이와 같은 그런 문제일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자세히 보면 믿음의 문제라기보다는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평생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는 직접적인 경험을 해 보지 못하면 말입니다. 

 

이런 경우라도 믿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말해 그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에 대한 자기의 의지에 대한 신뢰가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어쩌면 자신의 믿음에 대한 아주 처절한 생존의 길에 대한 탈출구와 같은 역할을 해 줄 것이며 그러한 정도의 최소한의 믿음마저도 없다면 자신의 신앙생활과 신앙관이 비참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마치 이런 것입니다. 내 신앙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하는 후회 아닌 후회처럼 말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영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부분 때문에 더는 고민을 하며 귀중한 시간을 소모할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 수단의 하나가 바로 성경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단순히 가까이 한다고 해서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방법이 달라야 할 것입니다. 어떤 절대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도 사람마다 다 개성이 다르듯이 그 방법 또한 다양하게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의 예시는 그동안 제가 약 30년 동안 성경을 접한 경험에서 나온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해서 최근에 체험한 경험을 근거로 해서 얻어낸 결과물입니다.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자면 이건 어디까지나 저의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참고하는 수준으로만 이해를 하시면 될 것입니다. 

 

이제 다시 이 모든 내용을 아주 간단히 정리해서 다시 새로운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존재를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항구히 유지할 수 없을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항구히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을 보는 방법보다도 더 좋은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보긴 보되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될 것입니다. 통독과 같은 방법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일정한 범위를 정한 상태에서 계속 그 범위를 많은 반복을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할까요? 좀 더 쉽게 예를 들어 설명을 드린다면 가령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 칠십세 권을 만약 순서적으로 본다고 가정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회독은 창세기 끝나면 탈출기로 넘어가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읽게 된다면 그냥 콩시루의 물처럼 쑥쑥 빠지는 게 느껴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언서 정도 가면 앞에 어느 정도 대충 읽었다는 그 정도의 느낌만 있지 다시 만약 되돌아 와 본다면 이게 읽었는지 하고 의구심이 들 정도로 기억이 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어느 정도 범위를 정해 놓고 그 범위 내에서 계속 반복을 해 읽어야만 그 반복 회독수에 비례하여 조금씩 걸리고 또 걸리고 하다 보면 가슴이나 육비에 새겨지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성경 전체를 10회독 한다고 했을 때 처음과 같은 방법으로 10회독 했을 경우와 이처럼 범위를 정해놓고 10회독을 했을 경우 물리적으로는 똑같은 양의 회독수이지만 효과적인 측면에서는 질적으로 완전 다르다는 걸 실제 경험을 해보면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했을 때 성경의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는 그런 효과보다도 더 중요한 효과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반복을 하면 어느 시점에서는 성경책 종이 위에 있는 활자에서 소리 음향이 마치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하느님께서 직접 인간의 목소리나 아니면 어떤 물리적인 소리로서 나는 소리가 아닌 인간의 감각으로 느낄 수 없는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느낌의 소리와 같은 그런 소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됐을 때 하느님이 물론 살아계시지만 마치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생생히 살아계심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느낌은 실제 체험을 해 봐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이때도 그냥 단순히 눈으로만 읽어서는 쉽지 않습니다. 눈으로 읽긴 읽되 이미 마음 자세가 하느님의 말씀 그 한 자 한 자를 자신의 육비에 아로새긴다는 그런 마음으로 보면서 또한 시각적으로 중요한 키워드에는 동그라미를 쳐가며 보는 것입니다. 동그라미를 칠 때랑 그냥 열심히 집중해서 보는 것과의 차이는 다릅니다. 이건 교육에 관한 이론입니다. 가령 동그라미를 칠 경우 그 원 안에 있는 글자와 없을 때 글자를 보는 것과의 차이는 심리적 요인으로 그 느낌이 다릅니다. 원이 있을 경우에는 원이라는 시각적인 효과 때문에 그게 마치 울타리 역활을 해 그 범위 안에 좀 더 정신을 집중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심리적인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이건 대개의 경우 다 공감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주관적인 설명이 아니라 이미 학문적으로 밝혀진 이론이라서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성경의 어느 일정 부분을 반복해서 보게 된댜면 실제 그 말씀이 그냥 마치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좋은 말씀처럼이 아니라 정말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이제 이 모든 내용을 단 한 줄로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현존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확실한 보증의 방법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읽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싶습니다. 아무리 성경 지식이 많이 있어도 그 지식이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없는 상태에서는 쓸모없는 지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렇게 해서 얻은 지식이 자신의 영혼 구원에 아무 쓸모가 없게 되는 것과도 같은 결론에 이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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