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지금도 그 열에 아홉 격인 우리는 / 연중 제32주간 수요일(루카 17,11-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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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11-12 | 조회수72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지금도 그 열에 아홉 격인 우리는 / 연중 제32주간 수요일(루카 17,11-19) 나병 환자 열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아예 멀리서 큰 소리로 외친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들의 그 절박한 외침과 딱한 처지를 헤아리신 그분께서는 그들의 병을 낫게 하신다. 그래서 사제에게 가서 정결해진 것을 확인받도록 하셨다. 당시에 나병이 나았더라도 공인을 받아야 했기에 ‘사제들에게 가 보여라.’라고 하셨으리라. 하지만 그 진절머리 난 병이 낫자,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드린 이는 몇 명이나? 겨우 한 명뿐, 그것도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이다. 치유 내용은 여기까지가 다다. 그러나 여기에 더 중요한 게 있음을 느끼자. 은총에 대한 감사다.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사제의 선언을 들었을 때 그들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그들 모두 눈물 흘리며 무릎 꿇었을 거다. 그것은 그 치유를 내린 사제에게 평생 잊지 못할 감사를 드릴만하니까. ‘이젠 병이 나았다. 이제 나는 나병 환자가 아니다.’라는 벅찬 생각에, 평생 잊을 수 없는 가족을 떠올리면서 그들 가슴을 부풀게 했으리라. 그런데 은총을 드린 이는 열에 단 한 사람, 그토록 애원한 그들이었건만 아홉은 외면했다. 그들은 왜 예수님께 가지 못했을까? 아마 너무 기뻐 벅찬 감정에 순간 예수님을 잊어버렸기에. 아니면 병이 나은 것에 너무 놀란 나머지, 진작 판단력을 상실했기에. 어떻든 그들은 평생 간직하고픈 그 소중한 은혜를 잠시 망각하였다. 아마도 은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도. 사실 아무리 작은 은총이라도 감사 없이는, 더 큰 축복마저 스스로 막는 꼴이다. 열에 그 아홉은 여기까지가 어쩌면 한계였다. 지금의 우리 모습일 수 있는 그들이다. 우리 안에도 이런 요소가 있는지 살펴보아야만 하겠다. 급할 때면 “주님, 주님!”하다가도, 막상 문제가 해결되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걸 잊을 때가 종종 있지 않을까? 그래서 병이 나아 예수님께 감사드리러 온 그 사마리아인에게,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나 진작 구원을 간청한 이는 무려 열 명이었지만, 끝까지 믿음을 간직해 구원에 이른 이는 그 사마리아 사람 단 하나뿐이었다. 우리 삶에도 참으로 남의 도움이 많았다는 것을 간혹 깨닫곤 한다. 더구나 뜻하지 않게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준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들은 다 잊고는, 오히려 받은 서운했고 상처받은 것들만 기억할 때가 더 많은 듯하다. 하느님께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러기에 얼마나 것을 깨닫고 감사를 드렸는지를 조용히 성찰해 보았으면 한다. 사실 우리란 도대체 누구인가? ‘저희는 쓸모없는 종,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할 우리 아닌가? 나병 환자의 치유와 사회적 지위의 회복은 치유의 기적보다도 더 큰 ‘감사’에 눈을 뜨게 되는 계기이다. 감사의 삶은 우리를 전혀 새롭게 바꾸리라. 우리는 미사 때마다 감사송을 바친다. 이처럼 감사는 그분께 드려야 할 첫째 의무이자 마땅한 도리일 게다. 의당 구원은 지위 고하나 출신 성분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가장 보편된 정의를 갈망하고 그것을 지키는 데서 올게다. 우리에게 거룩한 것, 곧 이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기에 그분께 치유의 그 은총을 저버린 나병 환자 열에 아홉 격인 이가 우리인지를 묵상해봐야 하리라. 되돌아 와 예수님께 큰 감사를 올린 ‘그 하나’라도 되고자, 이 시각 스스로 다짐을 해보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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