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3주일 다해, 하느님의 말씀주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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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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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1-26 | 조회수156 | 추천수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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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주일 다해, 하느님의 말씀주일] 루카 1,1-4; 4,14-21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지탱하는 중요한 두 기둥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뜻과 가르침이 담긴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마음에 새김으로써 무엇이 주님 뜻에 맞는 것인지를 올바르게 식별하고, 식별한 뜻을 실천함으로써 그분과 참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심으로써 남겨주신 그분의 몸을 받아모십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시자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는 그 믿음 안에서 같은 신앙을 지닌 형제 자매들과 한 몸을 이루지요. 그런 점들이 오늘의 전례 독서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제1독서인 느헤미야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서 안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임으로써 그분과 하나되는 기쁨을 누립니다. 한편, 제2독서에서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 된 교회 구성원들 각자가 고유한 소명을 수행함으로써 ‘다양성 안의 일치’를 이루어야 함이 강조되지요. 마지막으로 복음에서는 우리가 듣고 받아들인 주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성취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머나 먼 타국에서 유배중이던 유다인들은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왕 키루스의 칙령에 의해 고향 땅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 율법에 충실했던 사제 에즈라와 왕의 시종관이었던 느헤미야가 주축이 되어 성전을 재건하고, 백성들의 의식과 생활 깊숙이 물들어있던 우상숭배의 흔적들을 지우는 종교개혁이 단행되었지요. 오늘 제1독서는 종교개혁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다음 에즈라 사제가 백성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율법서를 읽어주는 장면입니다. 유배 전에는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희생제사가 그들 공동체의 구심점이었지만 더 이상 희생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었기에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줄 또 다른 구심점이 필요했고, 율법을 그 구심점으로 삼은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백성들이 능동적으로 움직였다는 점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바로 앞 구절에 그 내용이 담겨있지요. “그때에 온 백성이 일제히 ‘물문’ 앞 광장에 모여 율법 학자 에즈라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서를 가져오도록 청하였다”(느헤 8,1) 누가 억지로 시켜서가 아니라 백성들 스스로가 원해서 주님의 말씀이 담긴 율법서를 읽어주기를 청했다는 것이, 또한 그 말씀을 듣는 것을 다른 그 무엇보다 ‘먼저’ 하려고 했다는 것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황폐해진 조국의 상태를 보고도 슬퍼서 울부짖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는 비참한 상태에서 스스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자했다니, 그 간절함이 주님의 마음에 가 닿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율법의 중심이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에서 외적인 ‘형식’으로 옮겨간 겁니다. 자기들의 삶을 지탱해 줄 근간이라고는 율법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 율법을 어기지 않고 잘 지키고자 하는 열망으로 수많은 보호규정들을 만들었는데, 그 개수가 너무 많아지다보니 율법의 내용을 글자 그대로 지키기에도 버거워 그 안에 담긴 근본정신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어진 것이지요. 또한 종교 지도자들도 율법에 담긴 근본정신이 제대로 실현되도록 노력하기보다, 율법을 무기처럼 휘두르며 그것을 이용하여 자기 기득권을 강화하려고만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이 잘 지키도록 계몽할 생각은 않고, 그들을 ‘죄인’ 취급하며 비난하고 단죄하기 바빴던 겁니다. 그렇게 하여 자기들의 상대적인 의로움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지요. 그런 문제들을 바로잡기 위해 말씀이신 주님께서 직접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심점이 되십니다. 당신이 하시는 말씀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시는 한편, 여러 기적과 표징들을 보여주심으로써 유다인들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얼마나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좋은 분이신지를 느끼고 깨닫게 하려고 하셨지요. 그렇게 하느님이, 그분 말씀이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어야 그분 뜻에 합당하게 살 수 있고, 그분과 참된 일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의도가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뜻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 말씀으로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밝히시고 행동과 삶으로 그 뜻을 실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있고 힘 있는’ 말씀으로 만드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시는 장면에서,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 된 것이다”라는 복음사가들의 증언에서 그런 점을 확인할 수 있지요. 그런데 주님의 입에서 선포되는 구원의 말씀 안에 담긴 의도와 뜻이 온전히 성취되려면 그것을 듣는 이들이 주님의 말씀을 통해 구원받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지녀야 합니다. 배고픈 사람이라야 밥 한 끼에 감사할 줄 알며 그 밥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는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열망이 있어야 그것을 자기 마음 안에 받아들일 수 있고, 받아들인 그 말씀을 실천해야 비로소 그 안에 담긴 주님의 뜻이 실현되는 것이지요. 밤 새 그물을 쳤으나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던 제자들이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라는 주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자 수많은 고기가 잡혔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이 성경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여기서 ‘듣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원문의 뜻은 영어로는 ‘hear’에 가깝습니다. ‘hear’는 특별한 의지나 목적을 갖지 않고 어떤 소리가 ‘귀에 들리는 그대로 듣는 것’을 가리키지요. 즉 내 뜻과 기준으로 하느님 말씀을 판단하거나 밀어내지 않고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그대로 내 마음 안에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 그대로 삶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하느님께서 그 말씀 안에 담아주신 뜻과 의미가 나를 통해 성취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노력은 일회성으로 그쳐서는 안 되며 매일 꾸준히 실천해야 합니다. 그 점을 드러내시기 위해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오늘’을 강조하신 겁니다. 즉 우리는 매일 매일,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내 마음에 들려오는 주님 목소리를 귀기울여 듣고, 들은 그대로 실천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실천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뜻이 조금씩 완성되어 갈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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