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봉헌’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을 바치는 일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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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06:57 | 조회수14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2-32)”
1) ‘주님의 봉헌’을 겉으로만 보면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한 일로, 즉 예수님이 ‘봉헌되신’ 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또는 신앙의 관점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께 ‘바쳐진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바치신 일’입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의 머리글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또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서에서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아기 예수님이 자라서 나중에 메시아가 된 것이 아니라, 메시아께서 아기 예수님으로 오셨는데, 그 일은, 또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서 사신 것은, 당신이 원해서 하신 일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봉헌’도 수동적으로 ‘봉헌되신’ 일이 아니라, 당신이 원해서 능동적으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봉헌’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세례와 마찬가지로 겸손과 순종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것으로 해석합니다.>
2) ‘봉헌’은 내가 나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일입니다. ‘남이 나를’ 바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남을’ 바치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에 남의 목숨이나 남의 재물을 바친다면, 그것은 봉헌이 될 수 없고,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판관 입타’의 경우에, 전쟁에서 이기게 해 달라고 간청하면서, 자기를 맞으러 처음 나오는 사람을 번제물로 바치겠다고 서원했습니다(판관 11,30-31). 자기 목숨이 아니라, 남의 목숨을 바치겠다는 그 서원은 옳은 것일까? 식구들과 하인들을 모두 자기 재산으로 생각하던 당시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원천적으로 무효인, 잘못된 서원입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간 입타를 맞으러 처음 나온 사람은 바로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습니다(판관 11,34). 그때 그는 자기가 잘못된 서원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 죄를 고백하고, 그 잘못을 바로잡았어야 했는데, 즉 잘못된 서원을 취소하고 올바른 서원으로 바꿨어야 했는데, 그는 한 번 서원한 것은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만 하면서 딸을 번제물로 바쳤습니다(판관 11,39). 잘못된 서원으로 인한 잘못된 봉헌이니, 그것은 결코 봉헌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일이고, ‘큰 죄’를 지은 일입니다.
3) ‘봉헌’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을 바치는 일입니다. 판관 입타의 경우를 다시 생각하면,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사람의 목숨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입타의 서원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한 마디도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입타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고, 또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예물이 무엇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해서 ‘남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선하신 하느님께는 ‘선한 예물’만 바쳐야 합니다. 만일에 도둑질이나 강도짓을 해서 마련한 것을 예물로 바치면 하느님께서 그것을 받으실까? 도둑질이나 강도짓도 큰 죄이지만,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는 더 큰 죄입니다.
4) ‘봉헌’은 ‘나의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하느님의 것’을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나의 목숨과 나의 인생 전부를 봉헌한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원래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께서 잠시 나에게 맡겨 주신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봉헌을 자랑할 것도 없고, 생색낼 것도 없습니다.
5) ‘봉헌’은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일입니다. 뭔가를 많이 바치면 하느님께서 복을 많이 주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봉헌이 아니라 하느님과 거래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은총은 무상으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과 거래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생활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주님 봉헌 축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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