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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 봉헌 축일 다해, 축성 생활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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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08:36 조회수31 추천수1 반대(0) 신고

[주님 봉헌 축일 다해, 축성 생활의 날] 루카 2,22-40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어떤 농부가 기르던 암소가 한 번에 두 마리의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보통 잘 일어나지 않는 특별한 일이었기에 농부는 너무나 기뻐했지요.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던 그는 그것이 하느님께서 많은 은총을 베풀어 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하여 두 송아지 중 한 마리는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소를 하느님께 봉헌할 지를 결정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두 송아지가 겉모습이나 하는 행동, 성향까지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여보, 두 마리 중 어느 것을 ‘하느님의 소’로 하고, 어느 것을 ‘우리 소’로 하지?” 그러나 아내도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먼저 눈길이 가는 소를 ‘하느님의 소’로 결정해서 봉헌하자고 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농부가 마당으로 나가보니 한 송아지가 기운이 넘치는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송아지가 보이지 않아서 찾아보니 간밤에 맹수의 공격을 받았는지 집 뒷 뜰에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농부는 어두운 표정으로 한참을 고민하더니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여보, 이 일을 어쩌면 좋지? 글쎄 ‘하느님의 소’가 죽고 말았구먼.”

 

가톨릭 교회는 주님 성탄 대축일 후 사십일 째 되는 날을 “주님 봉헌 축일”로 지냅니다. 소중한 외아들을 하느님께 기꺼이 봉헌하신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모습을 본받아, 내가 가진 것을 하느님을 위해, 그분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봉헌하겠다는 마음가짐을 되새기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앞서 들려드린 예화 속 농부처럼, 욕심과 집착에 쉽게 휘둘리는 우리 마음이 참된 봉헌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참된 봉헌이 어떤 의미이며 왜 중요할까요? 그건 먼저 ‘부모’의 입장에서 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한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신앙으로 하느님께 봉헌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휘두르려 하면, 자녀는 그 부모의 품 안에 갇혀 버리게 됩니다. 독립할 때가 지나도 어미의 주머니 속에 사는 새끼 캥거루처럼, 제 힘으로는 제대로 걷지도 먹이를 구하지도 못하는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점점 퇴화되다가 캥거루로써의 삶을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하고 죽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를, 스승은 제자를, 친구는 다른 친구를 하느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그 사람을 내 고집과 집착 속에 가두려 들지 말고, 하느님의 커다란 섭리 안에서 맘껏 뛰놀며 제 행복을 온전히 누리도록 이해와 포용, 존중과 배려, 사랑의 힘으로 그를 응원하고 격려해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의 봉헌’만큼 중요한 것이 ‘사물의 봉헌’입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보다는 ‘내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물을 대할 때 더 강한 집착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손에 있다고 그것을 ‘내 것’이라 여기며 집착하지 말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잘 쓰일 수 있도록, 그렇게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실현되도록, 나눔과 봉헌을 통해 내 손에 쥔 것들을 하느님 섭리 속으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런 마음으로 외아들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율법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 여겼기에 기꺼이 따른 것이지요.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을, 내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전부’를 하느님께 내어드렸으니, 그 대가로 더 큰 것을 달라고 욕심낼 일도, 세상 일에 대한 걱정이나 근심으로 마음이 갈라질 일도 없었을 겁니다.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며 그분께서 이끄시는대로,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다른 모든 것들도 기꺼이 하느님께 내어드릴 수 있었습니다. 봉헌은 내 것을 하느님께 억지로 빼앗기는게 아니라, 내가 가장 아끼는 소중한 사람 혹은 사물이 전능하신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온전히 실현하도록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일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통을 겪어도 억울하지 않았고, 시련이 닥쳐와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로운 손길로 나를 참된 행복으로 이끄시니, 그분을 굳게 믿고 그분의 선한 뜻을 신뢰하며 따르기로 결정하신 겁니다. 그 결정이 아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지요.

 

마리아와 요셉의 그런 모습은 우리에게도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도록 재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봉헌은 성당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시메온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의롭고 독실하게 살았듯이 우리도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하느님 보시기 좋은 일들을 충실히 행하며 그분과 깊은 친교를 맺어야 합니다. 한나가 하느님만 오롯이 바라보며 밤낮으로 그분을 섬겼듯이, 우리도 세상의 유혹에 휘둘리지 말고 하느님만 바라보며 그분 뜻에 맞는 일들을 충실히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드리는 참된 봉헌이며, 그런 참된 봉헌을 행할 때 우리가 희망하는 구원이,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고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고된 세상살이를 이겨낼 힘을 우리에게 줄 것입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을 맞이하여 각 본당에서는 1년 동안 전례에 사용할 초를 축성합니다. 봉헌 축일에 초를 축성하는 것은 초가 가지고 있는 세 가지 특성을 예수님의 모습에 연관지어 묵상하며, 나 자신을 하느님께 어떻게 봉헌해야 할 지 그 길을 찾기 위함입니다. 첫째, 초는 밝은 빛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육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눈 먼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어 구원의 빛을 보여주셨습니다. 둘째, 초는 따뜻함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주시고, 고통을 겪는 이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따듯하게 맞이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셋째, 초는 자신의 모든 것을 태워 세상을 밝게 비춥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심으로써 죄악의 어두움을 몰아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우리가 이 말씀처럼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하며 살면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은총과 복을 충만하게 베푸시어 우리 각자가 ‘존재의 의미’를 완전히 실현하게 하실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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