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전도서(코헬렛) 입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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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0-07-26 | 조회수3,890 | 추천수1 | |
[김혜윤 수녀의 성서말씀나누기] 전도서 (1-3) : 입문 (1-3)
보이지 않는 진리 추구하자
지혜문학의 각 권을 살펴보게 되면서 새삼스레 느끼고 있는 사실은,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진리를 끌어내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할 진정한 지혜요, 숭고한 사명이라는 점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망상과 착각을 초래시키는 위험한 겉껍데기일 뿐이지만 사실 우리의 모든 지성과 감성을 결정하는데 절대적인 잣대로 작용하는 것은 바로 그 가시적 면모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가식에 언제나 순순히 넘어가고 심지어는 그 혼란에 매혹되기까지 한다는 사실, 그런게 두렵고 치명적인 한계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삶에는 「각성」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일까.
『내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잠언 27, 1)라는 잠언을 설명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삶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인식」이라고 쓴지 꼭 하루 뒤에 필자가 속한 수도회의 창립자 신부님의 별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랬다. 그런게 삶의 실상일 수도 있었다. 보이는 것만 가지고는 한치도 예측할 수 없고, 따라서 준비할 수도 없는….
잠언에 대한 고찰을 마치고 이제 함께 살펴보아야 할 책은 「전도서」이다. 전개되는 사상, 문체, 시대적 배경 등이 잠언과는 매우 다른 설정으로 되어있지만, 생의 진실과 맨 얼굴은 보이지 않는 삶의 뒷모습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다는 관점에서 같은 맥락을 유지하고 있다. 『헛되고 헛되다』라는 탄식이 수도 없이 반복되는 이 책은 왠지 허무주의적인 분위기와 퇴폐적 절망으로 일관된 듯하지만, 결국 보이는 것에만 연연한 삶이 얼마나 헛된 지를 경각시켜 준다는 의미에서 철저히 다른 지혜문학 작품들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 하겠다.
명칭
「전도서」는 히브리말로 「코헬렛」이라 불리는데, 이는 히브리 동사 「카알」(부른다, 불러모으다, 회합하다)에서 파생된 여성형 분사이다. 따라서 이 말은 모인 무리에서 말하거나 가르치는 사람 즉 「설교자」를 의미한다. 이렇게, 「코헬렛」은 처음에는 일반명사에서 기인한 말이지만, 점차적으로 이 명칭을 가진 이의 가명 혹은 제자들이 그를 부르던 호칭으로 자리잡음으로써, 한 사람의 이름처럼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성서를 한국말로는 「전도서」라고 부르고 있는데, 책 전체의 내용에 「전도」 혹은 「선교」와 관련된 행위나 언급이 등장하지 않기에, 「전도서」보다는 「코헬렛」이라는 제목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는 입장이 제기되고 있다.
저자
1, 1의 표제에 의하면, 이 책은 『예루살렘의 왕 다윗의 아들 코헬렛의 말씀』이라고 되어있다. 저자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명시되고 있지는 않지만, 『다윗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통해 책의 저자는 자신을 「솔로몬」으로 소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솔로몬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 2)책 배경이 솔로몬 시대로 보기 어렵다는 점, 3)사용된 히브리어가 매우 후대의 색채를 띄고 있다는 점(형태론과 구문론에서 아람어적 표현을 발견하게 되고 때로는 헬레니즘적 영향도 발견됨) 등을 근거로 하여, 학계는 이 책의 실제적 저자를 솔로몬으로 보지 않고 있다. 실제 저자는 「지혜의 대명사=솔로몬」이라는 통념을 그대로 적용하여 그의 책을 솔로몬의 권위와 명성아래 두고자 하였을 뿐, 그가 솔로몬 자신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코헬렛」이라고 제시되고 있는 이 존재가 구체적으로 누구였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왕이라는 신분으로 소개되어있는 것도 1~2장에만 국한된 현상이고, 3장부터는 왕실과 전혀 관계없는 내용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을 통해 저자에 대해 추정해 볼 수 있는 몇가지 점은, 그가 직업적 현인(지혜자)으로서 백성에게 지혜를 가르치려고 노력하였다는 점, 전해 내려오는 잠언들을 수집, 정리, 기록하고 때로는 새로운 잠언을 지어내기도 하였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헛되고 헛되지』 않게 살려면
늘 안정적이고 준비된 대로 실행되는 삶이라면, 그건 전도서가 언급하는 『헛되고 헛된 삶』일지도 모른다. 순간 순간 닥쳐오는 낯선 사건과 얼굴들이 때론 버겁고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런 긴장과 낯설음을 통해 비로소 나는, 보이지 않아 쉽사리 만날 수 없던 진정한 내 운명의 얼굴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만이 그동안의 오랜 고통과 상실을 보상받는 길은 아닐는지, 그런 생각을 이제는 간혹 해보곤 한다. [가톨릭신문, 2004년 6월 27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구체적 사랑과 용서로 구원얻자
종이를 아낀다고 언제나 이면지를 모아두고, 십 년이 넘어 낡아버린 손수건을 여태 버리지 못하며, 목소리 좋아진다는 보약을 강의 때문에 챙겨먹고, 그런데도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가 있으면 왠지 억울한 기분에 씩씩대고…. 이런 자신을 보면 문득, 이 낯선 모습은 누구일까, 라는 혼란에 빠져들곤 한다.
무엇을 위한 노력인지, 무슨 명분을 내세운 지나친 폭력이요 과장된 치성인지…. 그럴 듯한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무고한 생명을 죽게 한 이 세상의 원리와 내 삶의 원리가 다른 점은 무엇인지….
미국 대통령 스스로가 보여주는 삶의 덫과 내 인생의 덫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반복하고 있는 비생산적이고 피곤한 딜레마일 뿐일지도 모른다. 코헬렛, 그도 역시 인간의 위험한 욕구와 그 「무상함」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던 것일까.
제작 연대와 장소
이 책의 제작 연대 역시 다분히 논쟁을 야기시키고 있다. 그러나 1)기원전 2세기 제작된 집회서가 전도서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집회 14장 참조), 2)쿰란(제4동굴)에서 기원전 2세기 중엽에 필사된 것으로 보이는 전도서의 몇 구절이 발견되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볼 때, 이 책은 적어도 기원전 2세기 이전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페르시아 문화의 흔적이 거의 없다는 점은 이 책이 헬레니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기원전 3세기 중반 경에 제작된 것이라는 결론을 끌어낸다. 팔레스틴의 제반 생활과 성전, 제사 등에 익숙한 것을 미루어 보아, 제작 장소는 팔레스틴 지역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문학적 특징
전도서가 보여주는 문학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1인칭 고백 산문체:전도서는 대부분 1인칭 서술 관점(『나 코헬렛은…』)으로 진행되고 있다. 2) 잠언 양식의 등장:잠언처럼 짧은 구절로 심도 높은 진리를 설파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돈을 사랑하는 자는 돈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큰 재물을 사랑하는 자는 수확으로 만족하지 못하니 이 또한 허무이다』(5, 9) 등의 문장이 그러하다. 3) 수사 의문문: 의문문은 주로 답을 요구할 때 사용되지만, 수사 의문문은 답을 유도하기 보다, 청중을 자신의 논쟁에 끌어들여 동의와 제청을 유도할 때 사용된다. 전도서에 자주 등장하는 『…무슨 소용이 있으랴?』는 의문문은 헛된 삶의 실상을 부각시키고 강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구성
전도서에서는 일관적 구조를 찾기 어렵다. 주제에 따라 내용이 전개되지 않고 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서언(1, 2~11)과 결어(12, 9~14)가 최종 편집자에 의해 제작된 부분임에 동의하고 있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 만사 헛되다』라는 1, 2의 내용이 12, 8에 그대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코헬렛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어록을 모아 본문을 완성한 그의 제자(1, 1 참조)는 코헬렛을 3인칭으로 제시하면서 「서언」과 「결어」를 첨가하였다는 것이다.
처음과 마지막을 같은 문장으로 반복하고 있다는 것은 코헬렛의 말을 저자 자신이 편집해 놓았음을 암시하는 구조적 틀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보았을 때, 전도서는 「충족되지는 않는 인간의 욕구」가 전반부(1~6장)에 전개되고, 이어 그런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하는 「생활의 지혜」(7~12장)가 소개된다. 전반부에서는 『헛되다』라는 표현이 후반부보다 두 배 이상 언급되고 있지만, 이와는 달리 7장 이하에서는 삶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가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역행하는 시대
첨단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지금처럼 인간의 내면이 반(反) 시대적이고, 원시적으로 역행했던 때도 없었던 것 같다. 「죽음」이라는 화두 앞에 우리 모두를 각성하게 한 한국 젊은이의 죽음은, 지금까지 우리가 믿고 신봉해왔던 이 시대의 이념들-그 무엇에도 억압받지 않고, 완벽하게 민주적이며, 인간의 인권이 최대한 보장된다는-이, 얼마나 「억압적」이며 「비민주적」이었는지를 통감하게 하였다.
최고의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의 비굴한 자가당착과 이를 무마하려는 초라한 변명들을 보면서, 진정으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이념과 명분이 아니라 실제적 사랑과 구체적 용서뿐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된다. 그 이외에는 그 무엇도 「헛된」 망상일 뿐. [가톨릭신문, 2004년 7월 4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지혜로운 삶과 혐오스러운 삶
『매혹은 같은 양의 혐오를 숨기고 있다』. 어느 책에서 읽은 후, 바로 외워둔 구절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것, 글쎄 그게 무엇일까…. 「삶」이라고 대답한다면 수긍하시는 분도, 완강히 반대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다. 그러므로 「삶」이 정답이다. 그런 양극적 반응은, 삶이 매혹적이고 또 그만큼 혐오스러울 수 있다는 속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셈이니까.
코헬렛은 삶이 품고 있는 매혹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결국 그 매혹이 비수처럼 숨기고 있던 혐오의 얼굴을 만나게 된다.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그의 결론은 그러한 역정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우리를 매혹시켜왔던, 그러나 그 만큼의 혐오를 동시에 체험하게 했던 삶의 주변적 얼굴을 뚫고, 이제 가장 본질적인 내부 질서를 찾아내는 것, 코헬렛이 제시하고자 했던 철학적 결론이자 종교적 지혜이다.
전도서의 성격
전도서의 성격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일종의 「철학적 명상록」이라 할 수 있다. 코헬렛 자신이 직접 「경험한 바」를 통해 삶의 진리를 설파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관점에서 마이클 폭스(M. Fox)는 전도서가 「경험적 인식론」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분석하고 있다고 본다.
즉, 저자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부귀, 공명, 권세, 학식, 쾌락 등을 근거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그 모든 것들이, 본질적으로 행복을 완성시켜주지 못함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4년 7월 11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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