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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룻기: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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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26 조회수3,119 추천수1

[김혜윤 수녀의 성서말씀나누기] 룻기 (1-2) : 개관 (1-2)

 

 

‘오순절’에 낭독되었던 룻기, 히브리문학의 우수성 입증

 

가톨릭신문 원고를 밤새 쓰고 난 다음 날 아침 책상 위를 보면, 차마 눈뜨고는 볼 수없을 정도의 가관이 벌어져 있곤 했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면, 거의 항상, 그랬다. 손톱깎이, 수북이 쌓여있는 비스킷 봉지, 그리고 아예 통째로 가져다둔 땅콩버터….

 

그 기름기 많은 것을 언제 그리 파먹었는지 먹은 분량이 거의 치사량(?)에 달할 때는 정말이지 삶이 원망스럽고 기가 막혔다.

 

그래도 이미 먹은거 어떻게 하겠나, 다음부터 땅콩버터만은 절대로 먹지 말아야지, 라며 스스로의 죄책감에 면죄부를 써주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미 상해버린 마음과 높아진 칼로리는 회복할 도리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렇게 밤새 써 놓은 내용중에 건질만한 문장을 단 하나도 발견할 수 없을 때, 그럴 때는 정말이지 이걸 왜 쓴다고 했나, 다시는 원고 청탁하는 분들과 연을 맺지 말아야지, 내가 원고 청탁을 또 수락하면 인간이 아니다, 별별 소란스런 마음과 회한이 순식간에 가득해 지곤 했다.

 

개인적으로 원고가 잘 안써질 때 사용하는 처방이 있는데 손톱을 깎거나, 과자를 먹는 것이다. 그렇게 머리를 좀 쉬고 나면, 거짓말같이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했는데, 그 별난 습관이 어느새 삶안에 고착 되었나 보다.

 

그러나 그런 습관에도 유효기간이 있는건지, 한 2년 원고를 연재하다보니 그 신통한 습관도 믿을 것이 못되었다. 아무리 슈퍼에 가서 새로 나온 과자들을 종류별로 사다놓고 먹어 봐도, 아이디어가 없을 때는 끝까지 없는 것으로 일관되었다. 정말 원망스럽고 달갑지 않은 일관성이었다.

 

그렇게 애를 쓰던 즈음, 더 기가 막힌 전화를 받았다. 조금만이라도 원고를 더 써달라는 편집국의 요청이었다. 나 스스로도 힘들었지만, 그런 글을 읽어야 할 독자들께 너무 죄송하다는 생각을 진작부터 해왔던 터라, 단번에 거절하였다. 그러나 말에 설득력이 없었던 것인지, 유명무실한 거절이 되어버렸다.

 

결국은 또 이렇게 원고를 쓰고 있으니 말이다. 적어도 올 한해 동안은 독자들과의 만남이 이렇게 계속될 것 같다.

 

친구 수녀님에게 이 심각한 상황을 얘기 했더니, 『질긴 인연이네, 잘 해봐』, 그러는 것이었다. 격려를 해주는 건지 속을 더 긁어 놓는 건지….

 

꼭 그렇게 약을 올려놓고야 마는 그녀의 영리함과 깜찍한 우정이 또 한번 절망스러웠다. 친구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지….

 

하여 좀 아름다운 이야기로 올 한해를 시작하기로 한다. 감히, 「하느님의 말씀」을 너무도 부족한 능력과 성의 없는 태도로 설명할 수밖에 없음이 송구스럽고, 별도움 안되는 글을 써서 독자들께 읽어보라고 들이미는 뻔뻔함이 죄송한 만큼, 함께 읽어갈 성서라도 아름다운 것을 선택하고 싶어서이다. 그렇게 심사숙고 하여 선정한 책은 「룻기」이다.

 

 

개관

 

전쟁 이야기와 투쟁, 배신, 죄에 대한 이야기가 난무하고 있는 구약성서에서, 룻기만큼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책도 없을 것이다. 인물과 사건 중심의 자상한 보도가 쉬운 이해를 도와주며, 단순하면서도 수려한 문체는 히브리 문학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이야기 양식에는 선인과 악인이 공존하는데, 룻기에는 어찌된 일인지 선남선녀들만 등장한다. 그 어렵다고 정평이 나있는 고부(姑婦)관계조차도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관계로 표현되어 있다. 그녀들의 지극한 헌신과 사랑에 매료되어, 독서의 즐거움이 배가되는, 그런 책이다.

 

 

성서에서의 위치

 

히브리 경전 목록에서 성문서에 속하는 룻기는, 그 중에서도 「다섯 개의 축제 두루마리」라고 불리는 메길롯의 첫번째에 등장한다. 그러나 칠십인역에서는 이 책을 「역사서」 부분에 편입시키고 있다.

 

신명기계 역사서로 간주되는 판관기 바로 다음에 배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칠십인역의 이러한 결정은 아마도 이 책의 시대적 배경과 연결되어 있는 듯 하다. 그 역사적 배경이 판관시대로 설정되어 있어서(룻기 1, 1 참조) 연대기적 의도에 따라 판관기 다음에 이 책을 두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룻기가 「메길롯」에 속한다는 사실은 이 책이 이스라엘 중요 절기에 낭독되던 책임을 제시한다. 이 책은 원래, 「오순절」에 낭독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오순절은 봄에 곡물을 추수한 후, 이를 감사하기 위해 드리던 일종의 농경축제였다.

 

그러나 서기 70년, 로마인들에 의해 경작할 수 있는 땅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 유다인들은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오순절이 되면 룻기를 읽는 것으로 그 마음을 대신했던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5년 1월 1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희망을 갖고 현재에 충실하면 하느님께서 행복한 결과 약속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로 알려진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의 데뷔작은 「유럽의 교육」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절망의 시간에도 자신의 선의를 다시 발견하는 능력」을 교육의 힘이라고 피력하였다.

 

노벨 물리학상에 빛나는 마리 퀴리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는데, 언제 한번 이 지면에서 인용한 듯하지만 아름다운 구절이니 다시 한번 인용해 본다.

 

그녀는 『틀리지 않는 비결은 서두르지 않는 것』이며, 『인생의 그 무엇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해야할 대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제 우리는 극도의 절망 중에서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진실과 선의를 지킬 줄 알았으며, 이를 성숙하게 표현함으로써 삶을 개척하였던, 그리하여 그 어떤 낯설고 두려운 환경에서도 주위에 잔잔한 빛과 평화를 가져다주었던 여인, 룻의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이 책의 주요 성격을 개관하여 보자.

 

 

명칭

 

히브리 성서는 이 책을, 등장인물의 이름을 따라, 「룻」이라고 부른다. 이는 「(여자)친구, 동료」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칠십인역과 불가타 역시 이 히브리 명칭을 음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한국말 성서도 이를 음역하여 「룻기」라고 부른다.

 

 

저술시기

 

이 책은 판관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판관시대에 제작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1, 1을 참조할 때, 판관들의 시대를 아주 「먼 옛날」로 간주하고 있고, 오래된 관습을 표현하기 위해 보충설명을 달고 있으며(4, 7 이하), 절대적으로 금기시 되었던 이방인과의 결혼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느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고 이방민족까지도 포함된다는 「만민 보편 구원주의」가 부각되고 있어서 상당히 후대에 제작된 책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거의 모든 구약성서가 그러하듯, 언제 제작되었는지 그 정확한 연대를 설정하기란 불가능하다. 적어도 포로기 이후(기원전 5~4세기)에 저술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문학 유형

 

이 책의 문학적 유형은 「민간설화」 혹은 「단편소설」이라 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소외된 상황에 던져진 등장인물이 착한 행실과 확고한 신념(신앙)으로 그 고난을 극복하고, 결국에는 아름다운 「해피엔딩」을 맞게 된다는 이야기 구조는, 민담소설의 전형적인 틀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이야기는 처음에, 노래 혹은 시의 형태로 구전 되다가 차츰 「설화」(이야기)의 형태를 갖추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이방여인의 이야기는 후대에 다윗관련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책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다윗의 계보(4, 18~22)는 최종 편집자에 의해 후대 첨가된 것으로 간주된다.

 

다시 말해 룻기는 다윗의 조상 가운데 이방계(모압) 여인이 존재했다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을 섬세하게 신학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설사 이방여인의 신분이었다 할지라도, 그 여인이 어느 유다인 보다 훌륭하고 성실하게 하느님을 섬기며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는 점을 부각시킴으로써, 정통 다윗 왕조의 위상에 가할 수 있는 타격과 불편함을 성공적으로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포기하지 말아야 할 희망

 

벌써 햇수로 2년이 되었나. 재작년에 출판된 필자의 졸서는 「봉인된」 이라는 형용사를 제목안에 달고 있다. 그런데 책을 출판한 이후, 이상하게도 그 제목이 얼마나 불가능하고 불합리한 제목이었는지를 자주 느끼게 하는 사건을 체험하곤 하였다.

 

결국 작년 내내 나는, 봉인된 진실, 봉인된 시간, 봉인된 시선은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는 비관적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새해를 맞고, 룻기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을 수정해본다.

 

봉인된 관계, 절망스럽게 봉인된 운명이라 하더라도, 거기에서 나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선의와 진실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희망은 있다는 것, 하느님께서는 그 선의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겸손한 마음으로 현재에 충실하다보면 결국에는 죽음의 사선도 용감하게 건널 수 있다는 것을 그녀를 통해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새로 시작된 2005년, 모두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해였으면 합니다. 정말, 모두 그렇게, 약속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분명 당신에게 행복한 결과를 약속하실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05년 1월 9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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