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문화] 최후의 만찬은 언제 어디에서 있었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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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0-09-19 | 조회수4,308 | 추천수1 | |
[복음의 그때 그 자리] 최후의 만찬은 언제 어디에서 있었을까?
“이 성벽(가장 오래된 첫 번째 성벽)은 … 서쪽으로는 같은 곳 ‘히피쿠스’ 망대에서 시작하여 ‘벳소’(Bethso, 에세네파의 화장실로 추정)라는 곳과 에세네 문을 거친 다음 실로암 못이 있는 남쪽으로 향했다”(요세푸스, 《유다 전쟁사》, 5권 4장 2).무교절 첫날(마르 14,12)이다. 이날 오후에 성전에서 파스카 양을 잡고, 저녁 곧 니산 달 열닷샛날이 되면 기다리던 파스카 만찬을 시작한다. 이미 예루살렘은 초만원 상태이다. 평소에도 혼잡했는데(인구 6-8만 명) 파스카 축제 때에는 그보다 두 배 이상 되는 많은 인파가 몰린다. 집집마다 만원인 데다 올리브 산을 비롯한 주변의 공터까지 천막으로 빼곡하다.
베타니아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한걱정이다. 파스카 만찬은 여느 때와 달리 자유인으로서 식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식사한다. 성인 남자 열댓 명이 길게 뻗어 식사하려면 방이 제법 커야 한다. 그러려면 예루살렘 도성 안에서 구해야 하는데, 갈릴래아 출신인 그들이 아무 연고나 연줄 없는 예루살렘에서 막바지에 그런 방을 구할 수 있을까? 추석 전날에 고향 가는 기차표를 구하는 격이다.
걱정스러워 스승께 조심스레 묻는데, 스승의 답은 명쾌하다. “도성 안으로 가거라. …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 내 방이 어디 있느냐?’ … 준비된 큰 이층 방을 보여 줄 것이다”(마르 14,12-15). 놀라운 일이다. 예루살렘에 오신 뒤 단 하룻밤도 그곳에서 머물지 않으셨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다 예비하셨는가?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는 누구며 집주인은 또 누군가? 그 집은 예루살렘 어디쯤에 있는가? 그런데 요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요한 13,1) 곧 니산 달 열나흗날에 최후의 만찬을 하셨다. 최후의 만찬은 과연 언제 행해졌는가?
큰 이층 방이 있는 곳, 시온
복잡한 예루살렘 옛 도심의 남서쪽 아르메니아 구역에서 ‘시온 문’을 지나면 언덕배기에 우뚝 솟은 ‘성모 영면 성당’이 보인다. 그 옆을 조금 돌아가면 작은 건물이 나오는데, 아래층에 다윗의 무덤이 있고, 위층에 큰 이층 방(Hypero?n)이 있다. 이 방에서 최후의 만찬이 이루어졌고, 성모님과 제자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전해진다(사도 1,13-14; 2,1 참조). 그리고 이 일대 언덕을 흔히 ‘시온 산’이라 부른다. 정말 시온이 여기인가?
시온은 성경에 예루살렘 또는 그 도성의 일부나 그 일대, 또는 그곳의 주민을 가리키는 별칭으로 760번 이상 등장한다(아가 3,11; 이사 37,22 등 참조). 시온(히브리어 siyyon)의 어원은 아직 불확실하나 대개 ‘보호하다(sana)’와 연결하여 절벽 위에 터 잡은 요새를 가리킨다고 이해한다. 다윗 임금이 처음 점령한 ‘시온 산성’은 곧 예루살렘의 남동쪽 언덕인 다윗 성이었다(2사무 5,7 참조). 그 뒤 다윗 성의 북쪽 언덕에 성전이 건설되면서 하느님의 거처인 그곳 북동쪽 일대를 시온이라 일컬었다(시편 76,3; 이사 8,18 참조).
그런데 4세기에 가서 예루살렘 도성과 힌놈 골짜기 사이의 남서쪽 언덕을 시온이라 부르게 된다. 보르도의 순례자의 기록(333년)과 에피파니우스(392년 사망)의 기록에 처음으로 이 표현이 등장한다. 두 차례에 걸친 유다 항쟁으로 예전의 예루살렘은 거의 파괴되었고, 골고타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서편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최후의 만찬과 주님의 죽음, 부활, 성령 강림과 교회의 탄생 등이 모두 이루어진 그곳을 주님께서 현존하시는 새로운 시온으로 여겼던 것 같다.
비잔틴 시대에는 모든 교회의 모태라 불렸던 ‘거룩한 시온 대성당’이 그곳에 우뚝 섰다(415년경). 마다바의 고대 예루살렘 지도(560년경)를 보면, 대성당 옆에 붙어 있는 작은 건물이 최후의 만찬 장소로 전해지는 ‘이층 방’이었다. 12세기 초에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은 무너진 시온 성당 폐허에 다시 산타 마리아 성당을 세우고 그 옆에 옛 ‘이층 방’ 건물을 복구하였다. 그리고 그 건물 1층에 다윗의 무덤을 마련하였다(14세기 초에 프란치스코회에서 이 건물을 세웠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그 무덤은 가짜다. 다윗은 죽어 다윗 성에 묻혔고(1열왕 2,10 참조), 제2차 유다 항쟁 이후 예루살렘이 초토화될 때 그 무덤을 비롯한 고대 유적은 다 파괴되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굳이 그곳에 다윗의 가짜 무덤을 마련한 것은, 주변의 강력한 이슬람 세력과 유다인들에게서 이층 방을 보호하기 위해서일까?
[성서와 함께, 2010년 9월호, 이용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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