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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복음 묵상: 마태 17,1-13 주님을 사랑하고 믿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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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10-02 조회수3,285 추천수1

[정인준 신부의 복음 묵상] 마태 17,1-13 주님을 사랑하고 믿기 때문에

 

 

산에서의 모세와 주님

 

마태오는 별다른 지명 없이 ‘높은 산’이라고 하는 장소에서 당신 제자들에게 얼굴은 해처럼, 옷은 빛처럼 눈부시게 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의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모세는 하느님으로부터 두 개의 증언판을 받아 들고 시나이 산에서 내려옵니다. 본인은 모르지만 그의 얼굴의 살갗이 빛나고 있어서 사람들이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에는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하느님을 뵐 때에는 너울을 벗었습니다(탈출 34,29-35 참조).

 

마태오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특별한 장소에서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 모세와 엘리야와 동등하게 대화를 나누시는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모세는 탈출기에서 하느님을 대변하는 인물로, 엘리야는 메시아에 앞서 재림하는 인물로 유다인들에게 각인된 인물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기초가 되는 12지파에 축복을 내려줍니다(신명 33장 참조). 신명기계 신학을 배경으로 하는 모세오경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모세의 신원과 업적을 전해줍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신명 34,10).

 

저자는 이집트에서 일으켰던 표징과 기적을 들어 설명하며 모세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메시아 사상과 연결되는 엘리야는 불 말이 이끄는 불 병거를 타고 승천합니다(2열왕 2,7-11 참조). 이러한 모세와 엘리야까지 불러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주님이시라면 사람들(유다인)의 기대는 무척 컸을 것입니다.

 

 

하느님 아들의 선언

 

왜 주님께서는 당신 삶의 일대 중요한 사건에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만을 데리고 올라가셨을까요? 전체 제자는 아니더라도 한 세트처럼 따라붙는 안드레아가 빠졌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세 제자만 따로 데리고 올라가신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 올라갈 때 전속부관이었던 여호수아도 떼어놓고 올라간 것에 비해서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일부이지만 제자들과 동행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평소와는 다르게 모세와 엘리야와 말씀을 나누시는 모습을 보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움과 놀라움에 사로잡힙니다.

 

여기에서 마태오는 놓치고 싶지 않은 중요한 하느님 말씀을 전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이렇게 놓고 보면 호렙 산에서 이루어졌던 모세와 하느님과의 만남이 다시 재현되는 것이고, 거기에 구약의 메시아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엘리야까지 등장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입지가 든든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바로 하느님을 통한 예수님께 대한 ‘하느님 아들’ 선언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그리고 비밀을 잘 지킬 수 있는 제자 셋을 뽑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단에서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체험을 통하여 공동체에서 제일 해로운 것은 ‘편애’나 ‘특별대우’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메시아 비밀

 

이렇게 따로 부르시는 것은 제자들의 일치를 이루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지만 무리수를 써서라도 ‘메시아 비밀’을 유지하고자 하는 주님의 결단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비밀이라는 것은 입이 적을수록 지키기 쉬운 법이기에 열둘 가운데 세 사람만을 뽑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여기에 끼지 못한 안드레아 사도를 수다쟁이요 비밀도 못 지키는 사람으로 만들었네요. 사실은 어떤 사정이 있었겠지요?

 

이렇게 소수의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셨던 것은 주님께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이 중요한 의미, 당신 부활의 의미를 특별한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으셨고, 또 수난에 앞서 그들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배려하시는 주님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산에서 베드로는 왜 느닷없이 천막을 치자고 했을까요? 좋아서 정신이 나갔을까요? 세 분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대화를 계속하라는 뜻이었을까요?

 

물론 그 대화는 그렇게 오래가지 않은 것으로 복음서들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초막 셋은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주님을 위한 것인데, 베드로는 세 분의 만남의 장면이 무척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처럼의 대표적 회동이 인상적일 수도 있겠지만 그 산중에서 타인이나 시간을 의식할 것도 없었고 또 한적하고 여유가 있는 분위기에서 베드로는 그 만남이 오랜 시간 진행되기를 바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모습의 변화와 모세와 엘리야와의 대화가 끝나자 두려움에 떨고 엎드려 있는 제자들에게 다정하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7,7). 여기에는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각별한 사랑이 묻어납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변하신 모습과 모세, 엘리야와의 대화,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 선언’의 대단원이 간단하게 막을 내립니다.

 

 

부활의 모습

 

기원후 8세기 티베트 불교의 파드마 삼바바가 쓴 “티베트 사자의 서”가 유명합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사후에 겪게 되는 여러 현상을 설명하는데, 교회의 영혼관과는 처음부터 다르지만 현실세계와 사후세계에 관한 주제를 다루었다는 데에는, 삶이 현실뿐만 아니라 내세와도 연결된다는 공통점에는 관심을 가질 만합니다.

 

때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는 신자들의 증언을 통하여 부분적으로나마 사후와 죽음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신부님 모친께서 병중에 계셨습니다. 임종을 거의 앞둔 시간에서야 비로소 그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이미 식구들이 다 도착해 모친 둘레에 앉아있었습니다. 며칠 동안 어머니의 숨이 몇 차례 멈추어서 놀랐다고 했습니다.

 

마침 찾아 뵌 시간은 주무시는 듯 조용히 숨만 쉬고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깨어나서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저를 알아보시고는 성수를 뿌려달라고 하셨습니다. 흉측하고 검은 놈들이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바라보는데, 기도하고 성수를 뿌리면 사라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셨습니다.

 

이 일로 그동안 사제생활을 하면서 신자들의 병자성사와 함께 임종을 지키며 기도해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는 이러합니다. 갑자기 어두운 굴 같은 데를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서 눈부신 빛이 있는 곳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성모님과 그 품에 안긴 아기 예수님을 몇 차례 만나 뵈었다는 것입니다. 주위가 온통 꽃으로 덮여있고 세상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성모님 품에 있는 예수님께서 인자하게 웃으시며 아직 올 시간이 안 되었으니 나중에 오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손가락으로 그 날짜까지 꼽으셨다 하셨습니다.

 

운명했다가 깨어난 열심한 신자들의 이야기도 이 어머니와 비슷한 내용입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천국의 문턱이 “과연 그럴까?” 하고 자문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어떤 객관적이고 논증의 자료가 될 만한 것을 내세울 수는 없어도 마음으로는 몇몇 착하고 열심했던 신자들의 말이 사실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벼락을 맞았습니다 : 나를 살리신 하느님”의 저자 글로리아 폴로 오르티츠는 벼락을 맞고 죽음의 문턱에 이른 장면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체험한 것이지만 공통적인 면이 많아 소개합니다.

 

“제 몸이 숯처럼 검게 타서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 제 영혼은 놀랄 만큼 하얀 터널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묘사할 수 없을 만큼 밝은 하얀 빛이 제 주위를 감싸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저는 환희와 평화와 행복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에 제 안에서 흐르는 감정을 설명할 수 있는 지상의 말은 없습니다.

 

저는 엄청나게 황홀했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정이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일종의 징벌로 설명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시공간으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그런 빛 속에서 저는 앞으로 걸어갔으며,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습니다. 제 위쪽으로는 태양처럼 빛나는 하얀 빛이 있었습니다. 제가 ‘하얀 빛’이라고 말하는 것은 굳이 색상으로 표현하려고 그런 것이지, 그 빛의 색깔과 밝음을 표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빛과 함께, 표현할 수 없는 사랑과 평화의 원천 같았습니다.”

 

 

새김

 

성경은 주님 외에 다시 살아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제자들조차도 부활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이전의 세계를 모르듯, 죽음 이후에 영원한 생명, 천국의 삶을 알아듣기란 사실 어려운 것이지요. 때로 산에 오르면 산들바람과 멀리 펼쳐지는 구름과 나무와 산들이 이어지는 모습, 멋진 색깔로 물드는 석양의 하늘이며 심지어는 내가 걸어온 길까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때로 천국의 모습을 그려볼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한계가 있는데 기쁨과 진실, 조화되고 선한 부활의 모습을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어요? ‘영원한 생명’에서 ‘영원’이라는 말도 사실 알아듣기가 무척 힘듭니다.

 

우리는 체험하고 알기 때문에 부활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믿기 때문에 이 지상에서 주님의 약속을 희망하는 것이겠지요.

 

제자들이 주님의 변하신 모습을 뵙고 어리둥절하였듯이 우리도 주님의 부활이 낯설기도 하고 나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하신 주님 때문에 하느님 나라는 빛이요 생명이며 완전한 평화임을 믿고 기다립니다.

 

때로 힘들고 실망으로 얼룩진 삶의 순간에도 주님의 나라, 부활의 영광은 우리에게 힘이요, 위로가 되고 의지할 수 있는 지팡이가 되는 것입니다.

 

* 정인준 파트리치오 -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성서학을 공부하고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원주교구 총대리를 역임하고 지금은 제천 서부동성당 주임신부로 있다.

 

[경향잡지, 2010년 9월호, 정인준 파트리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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