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복음 묵상: 마태 25,1-46 베풀고, 조건 없이 내어주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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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0-12-10 | 조회수3,421 | 추천수1 | |
[정인준 신부의 복음 묵상] 마태 25,1-46 베풀고, 조건 없이 내어주는
위령성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친구가 있습니다. 어쩌다가 그를 만나 “야, 얼굴 보기 힘들다. 그렇게 바빠?” 하면, 그 친구 대답이 걸작입니다. “무덤에 가면 잘 쉴 텐데 뭐. 그때는 내가 거기서 조용히 있을 거야.”
위령성월을 맞고 보면 아무래도 평소보다 죽음에 대한 생각과 함께 숙연해지나 봅니다. 죽은 뒤 그때는 그때이고 아무래도 살고 있는 현실이 더 중요하겠지요.
11월은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기억하고 또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달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살아있으면서 복음을 실천할 수 있는 오늘이 있다는 것은 은총 중의 은총이라 하겠습니다.
심판과 살아온 날들
마태오는 25장에서 하늘나라에 들어가기위한 조건들을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바로 열 처녀의 비유(25,1-13)와 탈렌트의 비유(25,14-30) 그리고 최후의 심판(25,31-46)이지요. 혼인 잔치를 준비하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 신랑과 친구들이 결혼식을 하러 신부 집으로 오고 신부와 친구들은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갑니다.
주님께서는 이 혼인 관습을 들어 미리 준비하는 슬기로움과 준비하지 못하고 사는 어리석음을 설명하십니다. 여기서 다섯이라는 숫자는 큰 의미가 없고 평소에 어떻게 준비하며 살았는가에 방점을 찍으시는 것입니다. 탈렌트의 비유와 최후의 심판 비유도 미리 준비하는 삶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완성된 그림을 보면 작은 점과 선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들이 모여 입체감을 이루고 주제의 분위기를 표현해 주듯, 일상생활의 작고 미소한 것들이 모여 한 삶을 마감할 때에 중요한 심판거리가 되겠지요.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순간순간이 모여 일생을 이루는 것을 보면 매일매일의 삶의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명심하게 됩니다.
주인이 종에게 한 이야기도 이와 같은 맥락을 이룹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25,23).
베풀며 사는 얘기들
본당에 와서 보니 노인들이 많아서 그런지 환자들도 늘어나 봉성체 횟수를 더 늘려야 했습니다. 자연스레 환자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고 그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갖가지 삶과 마주치게 됩니다.
한 할머니는 눈이 보이지 않아 병원에 다니는데 그곳에 가면 그저 우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평소에 자식들에게 인색했기에 자식들이 발을 끊고 거의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가 가진 재산이 적지 않았는데 자식들에게는 베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와는 다른 할머니가 계십니다. 양로원에서 사시는데 늘 행복한 표정입니다. 아들 셋에 딸이 둘인데, 특히 세 며느리들과도 아주 가까운 관계입니다. 아들 내외가 문제가 생기면 시어머니는 늘며느리 편을 들어주었답니다. 할머니가 건강할 때에는 며느리들과 소주방에 갔다가 노래방까지 들러 오는데 마치 딸들과 친정어머니처럼 보였습니다. “요즈음 젊은 애들은 왜 그렇게 술이 약하지요? 셋이 시어미에게 매달려 집에까지 온 게 한두 번이 아니어요.” 하며 은근히 자신이 술이 세다는 자랑을 내비치기도 합니다.
아들들도 어머니에게 지극정성이어서 참 보기가 좋습니다. 영감님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조금 있었던 재산이지만 골고루 자식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의 몫도 따로 떼어놓고 양로원에서 지낸다는 것입니다. 자식들과도 그렇게 지내지만 이야기 친구들도 자주 드나드는데 늘 웃고 떠드는 소리가 가시지 않습니다. “재물로라도 친구를 만들라.”는 말이 있듯이 평소에 베풀며 사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흐뭇합니다.
좀 지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노부부의 딱한 사정을 레지오 단원들을 통해 듣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영감님이 중풍으로 누워있었고, 수발을 들던 노부인마저 병이 들어 형편이 말이 아닌 집이었습니다. 방은 냉골인데다 빨래도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돼지우리 저리 가라 할 정도였습니다. 이들의 딱한 사정을 보고 부근의 교우들이 조를 짜서 목욕도 시켜드리고 청소와 밑반찬도 해드리며 가족 못지않게 도와드렸습니다.
그러다가 두 분이 거의 동시에 돌아가셨는데 놀라운 것은, 몇 개월 동안 코빼기도 안 비치던 자식들이 나타나 부모를 선산에 모셔야 한다느니 묘지 앞에 석축을 쌓아야 한다느니 부산을 떠는 것이었습니다. 장례 미사 때에는 제대에 마구 올라와 비디오까지 찍는 모습을 보면서 “평소에나 잘하지!” 하며 냅다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또 다르게는 손자손녀까지 할아버지 할머니 방에서 함께 지내며 시중드는 모습을 보면서 대견스럽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가정을 보면 아이들의 부모가 평소에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지극정성의 효도를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자녀들은 부모들이 하는 것을 보고 알게 모르게 몸으로 배우는 것이 아닐까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장례 미사 때에 울고 있는 손자손녀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성경의 ‘황금률’도 따지고 보면 ‘베풀면서 살라.’는 뜻이 아니겠어요? 주님께서 하늘나라를 설명하시며 들려주시는 비유들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입니다. 평소에 잘 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느끼게 해줍니다.
베풀며 사는 또 다른 얘기
이것도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인데 더 들려드릴까요? 한 평범한 신자 집 얘기입니다. 남편은 공무원으로 남들이 보면 너무 원칙적이고 고지식하다는 이야기를 듣곤 하는 사람이었답니다. 그런데 그들은 친구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사무실에서 오랫동안 친분이 있던 친구가 퇴직을 하고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많은 돈이 필요했답니다. 그래서 그 친구가 요청할 때마다 빌려주었는데 그 액수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의 사업이 잘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결국 그 친구는 가게 문을 닫았고 빚을 갚을 길이 없어서 빚잔치를 했는데 채권자들이 난리굿을 피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신자는 괴로우면서도 그곳에 가지 않았고 얼마 뒤에 교도소로 그 친구 면회를 가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친구는 출소를 했고 그 뒤로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알토란 같은 돈”이라는 말이 있지요? 그 신자도 어렵게 모았던 돈을 그냥 날렸다는 생각에 속도 무척 상해 얼마간은 미치는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딱한 그 친구 사정을 생각하면 이런저런 표현도 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불쑥 그 친구 내외가 찾아와 거액의 적금통장을 내놓고 그동안의 사연을 털어 놓았답니다.
교도소에서 출소해 부인과 함께 이를 악물고 새 출발을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렇게 정답던 이웃들로부터 돈 때문에 받았던 모욕과 잔인함이었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달랐던 것입니다. 유일하게 침묵을 지켰고 또 교도소에 찾아와 격려도 해준 것이 큰 위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친구 부부는 밑바닥 일부터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힘들게 노력했습니다. 끝까지 침묵해 준 친구에게 늘 고마워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말입니다.
형편이 조금 나아지자 가족이 모두 부근의 성당에서 예비신자 교리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마운 마음에 늘 “천주교 신자는 무엇이 달라도 다르다.”는 말을 달고 살다가 천주교 문을 두드렸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그 신자는 빌려준 돈을 돌려받을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그때가 아이들 둘이 다 대학을 다닐 때여서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새김
주님께서는 평소에 기름을 준비하라는 말씀과 탈렌트 크기에 구애받지 말고 자신의 삶의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교훈을 주십니다. 마지막 날에는 서툴게 베풀었던 선행까지도 기억해 주신다고 하셨는데, 이 지상에서도 이미 그 상을 받게 하시려나 봅니다.
거지 라자로와 함께 죽어서 골짜기로 내려간 부자(루카 16,19-31)처럼 후회하느니, 생명이 붙어있는 지상에서 열심히 사는 것이 더 중요하겠지요? 때로는 우리가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인지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순간도 순간이겠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죽음을 준비하는 것,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은, 평소에 베풀고 때로는 손해를 볼 줄 아는 삶을 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하는 ‘베풀고, 너그럽고, 조건 없이 내어주는’, 그래서 바로 예수님의 삶을 사는 것이 천국의 조건이라 하셨습니다.
11월의 위령성월은 만추의 한가운데입니다. 녹음이 우거지고 싱그럽던 잎이 단풍으로 곱게 물들며 떠날 채비를 합니다. 다음 해 나무를 위해 썩어갈 희생의 모습으로 자신을 바람결에 맡깁니다.
단풍은 죽음에 한 발 가까이 다가선 상태이지만, 화사한 꽃처럼 젊음의 꿈처럼 수줍고 고운 모습으로, 대지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우아함을 간직합니다.
단풍에는 아름다운 이별을 할 줄 아는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봄에 피어나는 새싹의 희망, 한여름의 풍요로움을 다 내어놓고 가난한 모습으로 훌쩍 떠날 줄 압니다.
우리는 나무의 작은 잎에서 주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웃에게 베풀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보다 먼저 가신 영혼들을 기억하며 언젠가 있을 나의 죽음도 준비해야 되겠지요.
* 정인준 파트리치오 -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성서학을 공부하고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원주교구 총대리를 역임하고 지금은 제천 서부동성당 주임신부로 있다.
[경향잡지, 2010년 10월호, 정인준 파트리치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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