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음란의 죄에 물든 롯과 두 딸 | |||
---|---|---|---|---|
이전글 | [인물] 욕심의 눈으로 세상을 본 롯 |1| | |||
다음글 | [인물] 소심하고 겁많은 이사악 |1|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0-12-14 | 조회수4,508 | 추천수1 | |
[성서의 인물] 음란의 죄에 물든 롯과 두 딸
두 천사의 도움으로 소돔땅을 빠져 나와 간신히 목숨을 건진 롯은 아내를 졸지에 잃었다. 천사가 신신당부했었다. “네 식구들이 살려거든 무조건 있는 힘을 다해 달아나거라. 그러나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아라.” 그런데 롯의 아내는 두고온 재산과 여러 걱정 때문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여보! 엄마!”
아내를 잃은 홀아비 롯은 두 딸과 함께 산으로 숨었다. 차가운 굴속에서 세 식구는 살았다. 어느 날 큰딸이 동생에게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늙어가고 이땅에는 남자라곤 그림자도 안보이니 어쩌겠니? 아버지에게 술을 대접해 잔뜩 취하게 해서 동침을 해야겠다. 오늘은 내가 아버지와 잠자리를 함께할 테니 내 일은 네가 하려무나….”
두 자매는 계획대로 아버지의 씨를 받아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입에 올리기도 부끄러운 일이 롯과 두 딸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것도 두 딸이 먼저 서로 작당하여 아버지와 잠자리를 하고 아이를 낳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것이 세상의 풍속을 따르는 것이라며 부끄러움 없이 행동했다.
“아이를 낳아 대를 이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신성한 의무야. 그런데 방법이 없잖아.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남자라곤 아버지밖에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근친상간(近親相姦)의 죄를 범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롯과 두 딸이 살던 소돔과 고모라의 환경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자신도 모르게 매일 보고 듣는 것들이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므로 죄악의 환경에서 살면서 영혼이 병들어 있었던 것 같다. 환경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가! 두 딸은 어려서부터 결국 하느님도 경악한 음란과 죄악의 땅 소돔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처음에는 낯설어 거부하던 것들이 자꾸 보고 듣게 되면 익숙해지고 무감각해지게 마련이다. 인간은 외부의 압력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타인의 영향을 무의식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받게 된다. 그래서 그것이 자연스럽게 행동의 변화를 가져온다. 이것을 동조(Conformity)라고 했던가. 우리에게도 생각없이 남들의 행동을 모방하거나 비슷해지려는 경향이 분명히 있다. 롯의 딸들이 그랬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병적인 음란성에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 롯은 어떠했을까? 성서에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딸들이 술을 대접하여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큰딸과 동침을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딸이 언제 들어왔는지 언제 나갔는지 통 몰랐다고 한다. 롯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다는 뜻인가? 과연 그랬을까? 정말 술에 취해 딸과 동침한 사실을 몰랐을까?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말이다.
롯도 역시 딸과의 동침을 못이기는 체하며 허락한 것은 아닐까. 물론 추측과 상상일 뿐 알 수 없다. 또 당시로서는 피치 못할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사회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연과 환경은 인간에게 더없이 중요한 것이다. 특히 인간의 죄악은 사회성을 지니게 마련이다. 인간의 성적인 타락이야말로 인간성 자체를 파괴하는 무서운 힘을 갖고 있다. 어느 성인의 말씀대로 사탄의 가장 악랄한 계략은 인간을 성적으로 타락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성적인 유혹과 타락에는 그 누구도 자신할 수 없다. 무절제한 쾌락은 인간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죄악의 늪으로 더 깊이 빠져들게 한다.
요즘의 우리 사회는 어쩌면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타락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타락과 쾌락의 시대 그 한복판에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서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 시대에 다시 태어난 두 딸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은 분명히 아름다운 하느님의 선물이다. 다만 인간이 그 소중한 성을 잘못 사용하여 타락과 죄악으로 빠지는 것이다.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어 불과 유황으로 소돔과 고모라를 잿더미로 만드신 하느님의 심판을 상기하자.
이 시대에 가장 새겨 보아야만 할 대목이 아닐까?
[평화신문, 1999년 7월 11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