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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한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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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14 조회수3,556 추천수1

[성서의 인물]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한 요셉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태어난 모든 생명은 죽음을 맞이한다. 누구나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질서다. 창세기의 마지막 장은 요셉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요셉 그는 성서의 많은 인물 중에서도 특히 애정이 많이 가는 인물이다. 그에 대한 더 많은 묵상을 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지만 서둘러 인물여행을 떠나야 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요셉은 형들과 화해하고 조카들을 정성으로 돌보아주었다. 원수를 은혜로 갚은 것이다.

 

두려워 떠는 형들은 혹시나 아버지도 없는 마당에 요셉이 자신들을 해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였다. 자신들의 죄를 알고 있는 형들에게 요셉은 위대한 화해의 선언을 한다.

 

“나에게 못할 짓을 꾸민 것은 분명히 형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도리어 그것을 좋게 꾸미셨습니다. 그러니 제발 두려워하지 말고 저를 믿으십시오. 이제부터 제가 형들과 형들의 자식들을 돌보아 드리겠습니다.”

 

형들은 오히려 자신들을 용서하고 위로하는 요셉의 말을 듣고 가슴이 찢어지듯이 아팠다. 용서만큼 더 큰 사랑이 있을까. 요셉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인간적인 생각보다는 하느님의 편에서 생각했다. 그렇게 보았을 때 모든 것이 다 감사와 은총이었다. 요셉은 자신의 불행과 고통까지도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복된 사람이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불행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었다.

 

요셉은 말년에 자신의 굴곡 많은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무슨 생각을 가졌을까? 그는 죄지은 형들을 당연히 단죄하지 않고 오히려 형들을 위로했다. 그것은 요셉이 자신의 일생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삶의 주관자는 인간이 아니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터득했을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마치 나 자신이 하느님인양 처신할 때가 많다. 타인의 죄에 대해서도 내 판단의 잣대로 마음대로 단죄하려고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사실 인간은 누구도 다른 이를 단죄할 수 없다.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분은 하느님뿐이시다. 요셉은 그 인간의 한계를 분명히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모든 것이 감사와 은총이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아주 담담하게 맞으며 일가친척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했다.

 

“나는 이제 죽는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찾아오시어 이 땅에서 이끌어내시고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에게 약속한 땅으로 올려 보낼 것이다. 그러니 잘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이 하느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올라가는 날 내 뼈를 가지고 가거라.”

 

요셉은 죽음 안에서도 희망과 자유를 지니고 있었다. 인생의 가장 큰 고통인 죽음에 대해서도 자유로운 것은 그가 평생을 가지고 있던 굳건한 믿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요셉은 분명히 그의 가족들에게 말했을 것이다. “얘들아 슬퍼하지 말아라. 삶과 죽음의 주관은 하느님이 하신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결코 우리를 버리시는 분이 아니시다. 나는 나의 일생동안 그것을 철저히 체험했다. 나는 이제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다. 나는 죽어서도 늘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요셉은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했다. 믿음을 간직한 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가나안 땅에 묻힐 것을 소원했다. 가나안은 하느님이 약속하신 땅이었다.

 

우리는 삶의 마지막 날 가족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남길까? 삶의 끝을 접어야 하는 순간 마지막으로 소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삶이 끝나는 날이 있음을 그리고 내가 묻힐 땅과 마지막 옷이 입혀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죄와 심판이지만 영원한 이별 역시 인간의 마음을 애통하게 한다.

 

그러나 죄와 심판보다 더 큰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 믿음 안에서 희망이 싹트고 재회의 기쁨도 느낄 수 있다.

 

위령성월인 11월 죽음을 묵상하게 하는 시간이지만 죽음안에 깃든 영원 희망 사랑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평화신문, 1999년 11월 7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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