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예수님과 다시 새롭게1: 다시 예수님에게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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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1-01-16 | 조회수3,970 | 추천수1 | |
예수님과 다시 새롭게 (1) 다시 예수님에게로
우리는 “다시 새롭게(Renew)”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한다.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왜 “다시 새롭게”하려는 것일까? 우리의 생각, 행동, 삶의 방식을 다시 새롭게 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우리의 신앙생활을 다시 새롭게 하고, 우리 교회를 다시 새롭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마침내 세상을 다시 새롭게 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교 신앙은 한마디로 말해 예수님에게서 새로움(Novum)을 발견하는 것이다. 신앙은 예수님이 인간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여셨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삶을 체험하고, 그분과의 친교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삶, 신앙, 교회를 “다시 새롭게” 한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눈으로 우리의 일상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정신에 따라 우리의 현실을 성찰하여, 예수님의 길을 뒤따라 살기 위하여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다시 새롭게”는 예수님을 다시 발견하기이다. 다시 말해 그분의 생애와 사상을 다시 기억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사람들의 증언을 다시 읽기(Re-reading)를 통해 가능하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기록들 중에서 가장 믿을 만하고, 실제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을 가장 진솔하게 전하는 것은 바로 신약성경의 네 복음서이다. 사실 역사적으로는 신약성경에 포함되지 않은 예수님에 대한 기록들이 있다. 예를 들어 토마 복음서, 베드로 복음서, 야고보 원복음서 등인데 이것을 우리는 외경(外經)이라고 부른다. 신약성경의 복음서들은 이들 외경과는 달리 사도들과 결합되어 올바른 신학적 내용을 간직하여 교회 공동체 안에서 권위 있는 책으로 널리 읽혀졌다. 따라서 예수님의 진면목을 다시 발견하기 위하여 우리는 복음서에 대한 다시 읽기를 시도할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해 예수님 다시 읽기이다.
다시 읽기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보는 것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너무나 익숙한 분이시다. 이 익숙함은 긍정적으로는 친근함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러나 이 익숙함은 우리가 그분에게서 새로움을 발견하는데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예수님 다시 읽기를 시도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바로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이다. 예수님을 신선한 낯설음으로, 설렘으로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타성에 젖은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오래된 새 길을 가려는 것이다.
“다시 새롭게”의 길을 모색하는 우리는 복음서가 전해주는 역사의 예수님에게로 다시 돌아가려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 신앙의 중심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역사의 예수님과 신앙의 그리스도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사실 신약성경의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 기록된 것으로 그분에 대한 신앙을 전제한다. 이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과 그분에게서 일어난 일인 예수 사건을 복음서로 기록한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기원후 30년에 일어났고 최초의 복음서가 기록된 것은 그로부터 40년 후인 70년경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역사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예수님의 역사적 사건이라는 내용을 이야기라는 문학적 형식 안에 담아 신학적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생애와 사상, 즉 그분의 가르침과 행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복음서의 예수님을 기원후 1세기 팔레스타인의 유다이즘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안에서 살펴보려 한다. 왜냐하면 당시의 역사적 상황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더욱 생생하게 드러나고, 그분의 가르침과 행적이 가지는 독특한 의미가 더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기원후 1세기 전반부에 거룩한 땅(Holy Land)이라 불리는 이스라엘에 사셨던 유다인이셨다. 당시는 지리적으로 북쪽에는 갈릴래아 호수와 요르단 강을 동쪽 경계로 하는 갈릴래아 지방, 그 남쪽은 사마리아 지방, 그리고 그 남쪽은 유다 지방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 유다의 수도이며 유다인들의 종교 생활의 중심은 예루살렘이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다. 기원전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로마 제국 시대는 세 단계로 나뉘는데, 히르카누스 2세(기원전 63-40년)하의 속국 단계, 헤로데 가문의 통치 단계(기원전 37-기원후 6년), 그리고 로마의 직접 통치 단계(기원후 6-66년)이다. 기원후 66-70년에는 제1차 유다 항쟁이 일어났는데,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점령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다. 예수님이 공적 활동을 하실 때에 갈릴래아를 다스렸던 이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인 헤로데 안티파스였다. 그리고 유다는 로마의 총독인 본시오 빌라도가 다스렸다.(기원후 26-36년)
예수님 당시의 유다이즘을 우리는 “제2차 성전 유다이즘(Second Temple Judaism)”이라고 한다. 이것은 기원전 538년 바빌론 유배로부터 귀환하기 시작하여 예루살렘의 성전이 재건된 이후 기원후 70년 이 성전이 파괴되기까지의 유다인들의 생활 방식, 세계관, 종교 사상과 실천을 가리킨다. 당시 유다이즘에서 중요한 세 가지 요소는 예루살렘의 성전, 거룩한 땅, 모세의 율법이었다. 그리고 이방인들과 구별되는 유다인들의 정체성을 위하여 할례, 음식과 정결 규정, 안식일 준수 등이 중요시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정치적, 종교적 배경 하에서 예수님이 사셨고 활동하셨다. 따라서 예수님 다시 읽기를 시도하는 우리는 기원후 1세기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팔레스타인에 사셨던 유다인 예수님을 다시 발견하려 한다.
이 배경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와 사상이 가지는 독창성과 가치를 찾으려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예수님이 왜 우리에게 중요한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분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물으려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삶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신앙과 교회 쇄신을 위한 새로운 전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다시 새롭게”, “예수님과 다시 새롭게”, 우리는 그 길을 찾아 나서려 한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 성서 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 연구소에서 성서학 박사 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월간빛, 2011년 1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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