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오로10: 전 세계로의 전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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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1-04-24 | 조회수3,062 | 추천수1 | |
[동녘에서 서녘까지,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오로] (10) 전 세계로의 전파 바오로, 바르나바와 선교여행 첫 발을 내딛다
- 작가노트 = 피시디아의 수도 안티오키아인들은 '멘'이라고 불리는 달의 신을 숭배했으며, 이들의 숭배의식은 주로 한밤에 광란적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사도들의 힘찬 선교로 소아시아 첫 번째 교회가 안티오키아에 세워졌고, 이방에 교회가 세워지는 기쁨을 십자가와 달의 이미지로 표현해봤다. 빛이신 주님 말씀은 모든 이들에게 기쁨이 됨을 새기며, 주님 말씀을 영적 보물처럼 형상화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 사도는 굶고 있는 이들을 위한 구호품을 예루살렘 교회 사제(프레즈비테로스)들에게 전해 줬기에 그곳에서 자신들의 임무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시리아 쪽에 있는 안티오키아로 돌아온다.
그때 바르나바는 바오로 사도와 함께 조카 마르코를 데려가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마르코는 마리아의 아들로, 그녀의 넓은 집에 사도들이 오고 가며 그리스도인들의 회중이 이뤄졌다. 아직은 그리스도인들의 성당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르코는 겟세마니에서 주님을 따라가다가 군인들에게 붙잡혔고, 또 다른 청년들이 붙잡으려고 했을 때 도망쳤다고 복음서가 언급하는 바로 그 젊은이다.(마르 14,51-52 참조)
선교사로 부름 받은 사도들
마르코는 주님께서 축성한 사도들을 보고 배우며 자랐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행적과 기적을 거의 다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여러 해 동안 그가 수행했던 베드로 설교에 맞춰 그의 복음서에서 정확하게 기술했다. 바르나바는 자신의 젊은 조카에게 큰 희망을 걸었다. 마르코가 예수님과 사도들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을 안티오키아 사람들에게 들려준다면 크나큰 감동을 받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두 사도의 선교로 한 해 동안 더 큰 발전을 보여줬다. 성령이 신자들 가운데서 뛰어난 예언자와 교사들을 드러나도록 했다. 이들은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로, 북아프리카 키레네 출신 루키오스와 마브리타니아 출신으로 보였으므로 니게르라고 불리는 시메온, 분봉왕(tetrarch, 테트라크는 1개 주의 4분의 1을 다스리는 영주 또는 4인 공동 통치자 중 1명) 헤로데와 함께 왕궁에서 자란 어린 시절 친구 마나엔이었다.
그들 가운데서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세계 다른 나라들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열정이 일어났다. 모든 교회 지체들을 향한 주님 명령, 즉 사도들에 대한 주님 명령을 영원히 실천하는 것이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6).
주후 45년 봄이 돼서야 안티오키아 교회 대주교들은 그들 모두에게 금식을 행하고 세계로 향한 선교를 위해 하느님께서 그분 뜻을 그들에게 나타내도록 열심히 기도하기로 결정했다. 성체성사를 거행하고자 그들은 모였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눴으므로 선지자를 통해 성령이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사도 13,2). 안티오키아 교회는 곧바로 성령의 결정을 따랐다.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보냈다"(사도 13,3).
이제 바오로의 선교여행, 그 대역사가 시작된다. 당시 선교 수장은 최연장 사도인 바르나바였다. 사도들의 심장은 기쁨으로 뛰었다. 선교를 하도록 주님의 택함과 부름을 받은 사도들은 기쁨으로 순종했다. 바르나바는 기뻐하며 자신의 젊은 조카인 요한 마르코를 선교 조수로 대동했다. 모든 교회 공동체의 축복을 받으며 셀레우키아의 항구로 출발했다.
선교여행 첫 기착지 키프로스
바르나바는 셀레우키아에서 96㎞ 떨어진 맞은편에 있는 자신의 고향 키프로스를 선교여행 첫 기착지로 택하고 싶다고 제의했다. 이같은 제안이 받아들여져 키프로스의 가장 큰 항구인 살라미스에서 내렸다. 오늘날은 고대 융흥했던 도시의 흔적만 찾을 수 있다. 그곳이 바르나바의 고향이다. 친척이나 지인들이 사도들에게 서둘러 인사했다. 그들은 진심으로 바오로를 환영했다. 사울이 조직했던 박해, 곧 스테파노의 순교를 계기로 예루살렘에서 흩어져 키프로스로 떠나온 피란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박해 당사자였던 사울이 키프로스로 왔기 때문이었다.(사도 11,19 참조)
여러 주일이 지나고 마침내 사도들은 도시 모든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는 데 성공한다. 이곳 히브리인들은 관대한 듯 보였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음의 씨앗이 여기 저기 뿌려졌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계속해서 다른 도시들로 나아갔다. 살라미스가 있는 키프로스 동쪽에서 파포스 서쪽까지 거리는 직선거리로 150㎞나 된다. 만일 사도들이 그 섬 15개 대도시를 방문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다면 파포스에 도착할 때까지 아마도 여러 달이 걸렸을 것이다.
신 파포스는 구 파포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으며, 거기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유명한 신전이 있어 그 지역 주민들은 그를 숭배하고 있다. 신 파포스는 로마 지방 총독이 다스렸다. 로마 지방 총독이라는 명칭은 로마 원로원에 속해 있는 지역 총독에게 줬던 것이다.
세르기우스 바오로는 당시 키프로스 총독이었으며, 로마 귀족 가문 출신으로 학식이 고매하고 철학과 종교적 주제들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루카는 그를 '지혜있는 자'(사도 13,7)라고 전한다. 바오로 총독은 이방인들의 가르침이 파포스 주민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사실을 전해듣고 하느님 말씀을 듣고자 사도들을 총독부로 초대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귀족사회에 파고드는 첫 번째 사례다.
여기서 바르나바는 자신의 자리를 로마 시민인 바오로에게 내어주고 그가 설교하도록 했다. 우리는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바오로의 선교 방법을 알고 있다. 그는 철학자나 시인들 경구를 인용하면서 창조물을 통해 하느님 본성을 알려준다. 이 설교에서 그는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 17,28)라는 시인 아라톤의 말을 인용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기적과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을 알려주는 설교를 한다.
총독을 감동시킨 바오로 설교
세르기우스 바오로 총독은 바오로 사도의 논법에 감동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반대편 의견을 듣기를 원했다. 그래서 자신을 예언자로 자처했던 바리예수라는 이름의 유다인 술사에게 말했다. 그 술사는 엘리마스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엘리마스는 마고스, 곧 마술사라는 뜻이다), 총독이 사도를 믿지 못하도록 대적하고 왜곡시키려고 갖은 애를 썼다.
바오로는 그때 엘리마스가 진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기에 성령으로 충만해 술사를 노려보며 그에게 말했다. "온갖 사기와 온갖 기만으로 충만한 자, 악마의 자식, 모든 정의의 원수! 당신은 언제까지 주님의 바른길을 왜곡시킬 셈이오? 이제 보시오, 주님의 손이 당신 위에 놓여 있소. 당신은 눈이 멀어 한동안 해를 보지 못할 것이오"(사도 13,10-11). 그 즉시 엘리마스는 눈이 멀게 됐다.
그 기적을 본 총독은 바오로 사도의 말과 그 힘에 놀라 그리스도를 믿게 됐다. 그는 마법의 유약함을 깨달았다. 술사가 행한 마법은 겉으로 감명을 줄 수 있으나 그 근저에는 사기나 속임수가 깔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러한 총독의 변화는 로마 상류층에 대한 선교로는 첫 번째로 성공한 그리스도교 선교로 기록된다.
키프로스에서 바오로 사도의 선교는 이로써 완수됐다. 여러 곳에서 그들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만들기 시작했고, 바르나바는 후에 신자들을 교회 공동체로 완벽하게 조직했다. 첫 선교가 마무리되자 바르나바는 키프로스로 돌아와 머물렀다. 거기서 자신의 조카 마르코와 함께 열과 성을 다해 선교했으며, 세수 57살이 되던 해에 바르나바 사도는 히브리인들에 의해 순교했다.
[평화신문, 2011년 4월 3일, 글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대주교, 그림 정미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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