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오로12: 이코니온에서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신약] 이스라엘 이야기: 벳자타 못 |1|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1-04-25 | 조회수3,292 | 추천수1 | |
[동녘에서 서녘까지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오로] (12) 이코니온에서 박해에도 굴하지 않는 믿음의 투사가 되다
- 작가노트 :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경청하는 성 테클라의 모습이다. 첫 번째 여성 순교자인 테클라의 영혼을 겹쳐 표현해봤다. 또 바오로 사도가 돌팔매질당하는 순간, 예전 사도께서 돌팔매질 당하는 스테파노를 방관했던 것과 비슷한 장면을 재현했다. 스테파노의 죽음을 떠올리며 평생 숨겨온 아픔을 보속하는 마음으로 바오로 사도는 계속 이어지는 박해를 감수한다.
오늘날 터키에선 얄바치(Yalvac)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안티오키아를 비롯한 피시디아 전 지역은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가 뿌린 주님 말씀의 씨앗을 풍성하게 받아들였다. 그리스도를 믿었던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는 유다인들과 이전의 우상숭배자들이었다.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목격하자 유다인들은 성내 귀부인과 유력자들을 선동해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핍박하고 그 지역 경계선 밖으로 쫓아냈다.(사도 13,50 참조)
사도들은 다른 지역에서 선교를 계속하려고 피시디아를 떠났다. 하지만 굳건한 교회를 남겨놓았다. 그리고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인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사도 13,52)고 루카는 전한다.
이들 두 사도가 이코니온(오늘날 터키 콘야)으로 가고자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를 떠났을 때는 아마도 주후 46년 가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도들은 120㎞나 이어지는 먼지 가득한 사막 길을 걸어 가야 했다. 지친 사도들은 지평선 끝에서 이코니온의 오아시스를 마주한다.
해발 1030m고지에 세워진 도시는 오늘과 마찬가지로 푸르른 나무들로 아름다운 정원을 이루고 있다. 주민들은 그리스에서 온 갈라티아인과 로마인, 유다인들이었으며 주로 양모직조업에 종사했다. 그래서 바오로는 쉽게 거처할 곳과 일거리를 찾았다.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처럼 이코니온의 한 회당에서 주님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유다인들은 사도들에게 주님 말씀 전파를 금지했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사도들은 이전에 우상숭배자였던 사람의 집에서 주님 말씀을 가르쳤고, 한동안은 사람들이 그 집을 가득 메웠으며 그 맞은편 귀족 저택에서 온 사람들도 말씀을 경청했다. 그 귀족 딸은 테클라라고 불렸는데, 바오로가 가르치는 동안 그 가르침에 계속 귀 기울이며 창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초대 그리스도교회 교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고 믿음 전파에 헌신했으며 믿음을 위해 박해와 순교를 당했다. 잘 알려진 대로 교회에서 첫 번째로 순교한 여인은 테클라(Thecla)이며, 정교회는 9월 24일(가톨릭교회는 9월 23일로 지냄, 동서방 교회 간 시차로 날짜가 하루 차이가 남)을 성녀를 추모하는 축일로 정해 기념한다.
사도들은 1년 넘게 이코니온에서 선교했다. 도시 안에서만 선교한 것은 아니었다. 소도시와 시골에서도 선교를 했다. 루카는 우리에게 "많은 유다인과 우상숭배자들이 주님 은총에 관한 말씀을 듣고 사도들이 행한 기적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됐다'"(사도 14,1-3 참조)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유다인들은 여전히 사도들을 적대하도록 우상숭배자들을 선동했다. 도시 주민들은 차츰 둘로 나뉘게 됐다. 한쪽은 유다인들과 합세하고, 다른 쪽은 사도들과 합세했다. 이러한 상황은 곧 교착상태에 빠졌고, 우상숭배자들은 유다인들, 그리고 그들의 지배자들과 함께 사도들을 괴롭히고 돌로 쳐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계획을 알게 된 사도들은 이코니온에서 떠나 리카오니아 지방 도시 리스트라와 데르베, 인근 지역으로 피신해 선교를 계속했다. 이는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줬던 임무였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마태 10,23). 사도들은 박해에 동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요한 15,20)라고 말한 주님께서 또 다시 그들에게 미리 알려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에도 이코니온에는 바오로 사도의 이름을 딴 비잔틴 성당이 남아 있다. 또 도시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곳에 '성 바오로 사도의 굴'로 불리는 바위 위 수도원이 있다. 그 너머에 바위를 파고 들어간 아주 오래된 모자이크 성당들이 있다. 이코니온은 수 세기 동안 강력한 그리스도교회 중심이었으며, 대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두 사도는 다시 한 번 선교를 중지하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 강도들 소굴이었던 지역 가운데 하나인 리카오니아였다. 이틀을 걸어 리카오니아 지방 리스트라에 도착했다. 주민들은 마음씨가 고운 사람들이었지만 무지와 미신에 빠져있었다. 도시 성문 앞에서 사도들이 제일 먼저 마주한 것은 작은 제우스 신전이었다. 그곳에서 주민들은 도시를 위해 제물을 바쳤다.
사도들은 리스트라에 머무는 동안 이코니온 형제들의 추천으로 이 도시에서 거의 유일한 히브리인 가족에게 환대를 받는다. 가족들은 히브리인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 아들 티모테오였다. 이들은 매우 경건한 신앙을 지켜온 가족으로, 티오테오는 모세 율법을 믿는 할머니와 어머니에게서 성경을 배웠다. 에우니케의 이교도 남편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티모테오를 매우 좋아했던 바오로는 후에 그를 수행원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에페소 교회 주교로 서품했다. 이 가족의 보금자리는 이 도시에서 그리스도 교회의 첫 번째 중심지가 됐고, 사도들은 거의 1년 동안 도시와 주변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어느 날 사도들이 가르치는 동안 청중들 가운데서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마비된 앉은뱅이 한 사람을 봤다. 그는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다. 그는 바오로의 설교를 주의 깊게 경청했고, 바오로는 그를 주목했다. 그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음을 느꼈을 때 그를 구해주고자 큰 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그 사람은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군중은 그 기적을 보고 소리쳤다.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그리고 그들은 바르나바를 제우스로, 바오로를 헤르메스라 불렀다. 제우스의 사제들은 사도들에게 바치기 위해 꽃으로 단장한 황소들을 끌고 왔다.
우리는 사도들이 어떻게 항의했을지 쉽게 가늠해 볼 수 있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사도 14,15).
그럼에도 리스트라 주민들은 사도들에게 희생물을 바치기를 원해 사도들은 간신히 군중을 말렸다.
며칠 뒤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온 유다인들이 사도들을 죽이고자 몰려왔다. 바르나바는 거기에 없었고, 바오로는 적에게서 돌로 공격을 받게 됐다. 그들은 바오로가 죽었다고 여겨질 때까지 돌로 쳤다. 그리고서 그를 끌어내 도시 밖으로 내쳤다.
그리스도인들은 바오로 사도에게 다가와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하고는 그를 일으켜 세우고 흐르는 피를 닦아내고 상처를 감싸 줬다. 그런 와중에도 사도들은 그날 밤 도시에 남아 있는 히브리인들의 새로운 공격을 피하기 위해 리스트라를 떠나야 했다.
한 바오로 연구자는 바오로가 돌팔매질 당하는 순간에 자신이 참여했던 또 다른 돌팔매질 장면을 떠올렸고 천사로 보이는 한 사람이 자신을 고개 숙여 내려다 보는 것처럼 느꼈다고 전한다. 그때 그는 그 사람을 알아 봤다. "스테파노여, 이 정도면 충분합니까? 제가 당신 죽음에 대한 죗값을 치른 것입니까?" 스테파노는 바오로 생애 동안 지속돼온 숨겨져 있는 아픔이었다.
바오로는 예전에 돌팔매질 당하던 스테파노와 똑같이 돌팔매질 당했다. 주님은 가끔 자신의 동조자들이 박해나 순교를 당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들이 그 임무를 더 잘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교회는 믿음의 투사가 필요하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1,24).
[평화신문, 2011년 4월 17일, 글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대주교, 그림 정미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