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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나인의 어머니, 예수님을 만나다, 루카 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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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1-04-29 조회수3,588 추천수1

‘만남과 관계’로 본 루카 복음 - 루카 7,11-17


나인의 어머니, 예수님을 만나다

 

 

만남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서 백인대장의 노예를 치유하시고 제자들과 군중들과 함께 나인이라는 고을로 가셨다(7,11). 나인은 나자렛에서 도보로 두 세 시간 거리의 마을이다. 일행이 성문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 나오는 한 무리의 장례행렬을 만났다. 두 무리의 분위기는 대조적이었다. 곧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을 체험한 제자들과 군중들은 마음이 한껏 들떠 있었으나 장례행렬은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부행한 처지와 죽음이라는 저항할 수 없는 힘에 눌려 침울함 가운데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어떤 관심도 없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 누구도 불쌍한 이 상황을 도와주십사 하고 예수님께 청하는 이가 없었다. 그들뿐 아니라 그 여인조차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아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누가 죽음을 거스를 수 있겠으며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겠는가? 그곳에 있던 그 누구도 죽은 이를 살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두 무리는 각기 그들의 길을 갔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다. 그분은 깊은 섬세함과 특별한 관심으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왜냐하면 그곳에 슬픔과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보았다. 울고 있는 한 어머니를! 예수님은 여인의 모습에서 아마도 오래지 않아 십자가 밑에 오열하시는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을 보지 않으셨을까!

 

 

예수님의 역사하심

 

루카는 ‘예수님께서 보셨다.’라고 하지 않고 ‘주님(Kyrios)께서 보셨다.’(13절)고 표현하고 있다. 이 이름[Kyrios]은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에서 그 귀중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 바로 주님이시다. 루카 복음 안에서 처음으로 ‘주님’이 호격이 아닌 주격으로 사용되었다. 이 이야기의 앞선 모든 내용에서 주님의 이름은 하느님에게 부여되었으나(1,11. 15. 17. 32; 2,15. 22) 이곳에서 예수님께 적용됨은 예수님이 생명의 주님이신 하느님과 같음을 의미한다.

 

주님의 관심은 죽은 이가 아니라 울고 있는 어머니이다. 여인의 모든 슬픔이 예수님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남편을 잃고 이제는 외아들마저 잃어 고통으로 상처 난 마음! 그 누구의 위로와 격려도 받아들일 수 없이 메말라 있는 모습! 여인의 아픔이 고스란히 예수님의 것이 되어 그분은 천천히 여인에게 다가간다.

 

복음서 저자는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심리적 상태를 표현하지 않으나 이곳에서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을 드러냄으로써 그 의미를 강조한다. 동사 ‘가엾은 마음이 들다.’(5,13; 10,33; 15,20)는 존재의 내면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나타낸다.

 

‘본다’는 것과 ‘가엾은 마음을 느끼는’ 이 두 가지 행동은 서로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섬세하고 내면적으로 풍요로운 영혼들이 갖는 삶의 모습이다. 만일 보기만 하고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관념적인 것에만 머물게 되고, 그 반대라면 지나친 감정에만 빠질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깊게 볼 줄 아는 눈으로 내면의 감성을 일으켜야 한다. 바로 예수님처럼.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하여 “울지 마라.”(13절)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여인을 위로하며 또한 희망을 갖게 하는, 곧 닫힌 여인의 마음에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청하는 것이며, 군중이 ‘가엾은 마음’을 느끼도록 그들을 초대한다.

 

만일 여인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녀는 영적으로 계속하여 죽음의 세계에 머무를 것이며 아들과 함께 무덤에 갇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생명은 시작되기 위해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소리에 또한 더 이상 울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한 소리에 천천히 머리를 들어 바라보는 여인! 그분의 눈에서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강한 힘을 체험한다. 마음의 평화와 희망을 갖게 하는 그분을 본다.

 

예수님은 죽은 이에게 다가가 관(이스라엘에서는 로마나 그리스처럼 관을 사용하지 않고 간단한 들것에 천으로 두른 시신을 놓는다. 그러므로 ‘관’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그리스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에 손을 대었다. 예수님은 주검에 손을 댐으로 부정해진다는 율법(민수 19,11-16)에 얽매이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해방하는 주님임을 선언한다. 곧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14절)고 명령한다.

 

예수님은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하지 않고 ‘나’라는 1인칭을 사용함으로써 당신께서 하느님과 같은 힘과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시신을 쌌던 천이 벗겨지고 죽었던 이가 일어나 앉았을 뿐 아니라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죽었던 이가 새로운 삶으로 돌아온 것이다.

 

예수님은 아들을 어머니에게 건넨다. 아들에게 향했던 그의 관심은 그 어머니에게 다시 돌아왔다. 아들을 받은 순간에 그 여인은 잃었던 모성을 회복했다. 그것은 새로운 모성으로 그녀는 아들의 생명이 그녀로부터 온 것이 아닌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그 아들은 선물이지 그녀의 소유가 아니었다. 죽음으로부터 돌아온 젊은이는 이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의 삶을 살 것이다.

 

예수님의 놀라우신 역사는 어머니와 아들, 그들의 신원을 새로운 방법으로 회복하게 했다. 그만이 죽음의 유일한 해방자이며 새롭게 그들을 하나가 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안에서 어머니와 아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생명의 의미는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선물로 변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육체적 차원이 아니라 더 깊은 믿음으로 마음을 연 영적 태어남이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16절)하였다. 신적 드러남 앞에서, 초월자이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작고 약하며 또한 죄인임을 느낀다. 이 두려움은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사랑의 분출로 이제 어머니와 아들만이 아닌 서로에게 무관심했던 두 무리 ‘모두’가 놀라운 체험과 사랑 안에서 일치한 데서 나온다. 이 일치의 원천과 중심은 바로 주님이신 예수님이다.

 

군중들은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고 외친다. 예수님의 정체성이 계시되는데 그분은 단순한 예언자가 아닌 신적 현존과 연결되는 관계 안에서 큰 예언자로 드러난다. “나타났다(egeiro)”의 이 희랍어 동사는 14절의 “일어나라”, 24장 6절의 “되살아나셨다”의 동사와 같이 쓰인다(동일한 동사가 문장에 따라 달리 표현된다).

 

이 사건들(일어남과 나타남, 되살아남)은 서로 관련이 있다. 곧 젊은이의 부활은 신적이고 예언적인 힘을 드러내고자 특별한 가치를 지닌 순간에 정확히 일어났으며, 예언자의 출현은 백성 가운데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종말론적 계시자인 그리스도에 대한 긍정과 지지를 나타낸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를 돌아오게 하셨듯이 예수님 또한 죽은 몸이셨지만 죽음의 세계에 머무르지 않고 되살아나셨다.

 

군중은 계속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16절)고 기뻐한다. 이 말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 가운데 오시어 자신의 구원적 현존을 드러낸 것을 선언하는 것으로 즈카르야의 노래(1,68)를 기억하게 한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는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나갔다”(17절). 여기에서 유다라는 말은 나인이 있는 갈릴래아를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을 뜻한다(4,44; 6,17; 23,5). 곧 갈릴래아로부터 세상으로, 아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총으로부터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기쁜 소식은 오늘 우리에게도 도달한다.

 

 

새김 -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이지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 특별히 슬픔과 아픔이 있는 곳에! 우리가 슬플 때 그분은 우리보다 더 슬프시고 우리가 아플 때 그분은 우리 자신보다 더 깊은 아픔을 느끼신다. 머리를 들어 그분을 바라볼 때 죽은 이를 부활시키시는 그분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어 놀라운 일을 하신다.

 

기도 - 주님! 한없이 부드럽고 깊은 사랑으로 여인의 마음을 위로하시는 당신을 봅니다. 저도 당신의 마음을 닮아 슬픔과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마음으로 다가가게 하시며 그들 안에 계신 당신을 뵙게 하소서.

 

* 박미숙 레지나 - 성모영보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성서학을, 글라렛티아눔에서 수도신학을 공부했다.

 

[경향잡지, 2011년 3월호, 박미숙 레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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