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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죄인인 아들, 사랑의 아버지를 만나다, 루카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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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1-06-22 조회수3,644 추천수1

‘만남과 관계’로 본 루카 복음 - 루카 15,11-32


죄인인 아들, 사랑의 아버지를 만나다

 

 

‘탕자의 비유’라 일컫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것으로 죄인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과 모든 이를 구원하고자 하는 그분의 뜻을 말하는 자비의 복음이다.

 

이 비유는 앞의 두 비유(되찾은 양과 은전의 비유)와 연결, 하느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버리지 않으시며 잃어버린 은전을 찾았을 때 잔치를 베푸는 자비하신 분으로, 방탕한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를 용서하고 기쁨의 잔치를 여는 아버지의 사랑을 말한다. 이 비유들은 죄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행동과 관련, 15,1-2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오는 것을 보고, 또 예수님이 그들을 받아들이고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예수님은 비유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시며, 당신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음을 분명히 하신다. 일반적으로 큰아들은 바리사이로, 작은아들은 이방인으로 볼 수 있는데, 우리는 큰아들은 종의 모습으로, 이방인인 작은아들은 참 아들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주님의 참 자녀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회개하는 죄인

 

작은아들은 일상의 삶에서 일탈을 꿈꾸며 아버지에게 자기의 몫을 청하여 먼 고장으로 떠난다. 먼 고장으로 떠남은 아버지와 관계를 단절하는 것으로, 곧 하느님에게서 떠남을 뜻한다. 자신에 찼던 열망과는 다르게 그는 미성숙한 삶으로 가진 것을 모두 잃게 되는데, 이는 아버지 앞에서 그의 모든 권리를 잃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그는 이방인인 그 고장 주민에게 매달려 돼지를 치게 되었다(15절). ‘매달리다’라는 행위는 유다인이 이방인에게 하는 것으로는 적합하지 않으며(사도 10,28), 더욱이 저주받은 죄인들의 일인 부정한 짐승 돼지(레위 11,7)를 치는 일을 한다는 것은 그가 이방인과 같은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배고픈 그는 돼지의 양식으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지만 아무도 주는 이가 없었다. 이는 그가 경제적, 사회적, 윤리적으로 철저히 외면당하고 버림받았음을 뜻한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그는 제정신이 들었다. ‘제정신이 든다.’를 가리키는 희랍어는 ‘자신에게 다시 들어가다.’라는 뜻으로 회개의 시작을 알린다.

 

그는 지금의 자신과 아버지 집에서 풍족하게 먹는 종들을 생각하며 아버지를 떠나온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17절). 내면적 수치심과 극단적 불행이 그의 영혼을 깨우는 계기가 된 것이다. 짙은 어둠 속에서 아버지와 그분의 따뜻한 품이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온다. 아버지 사랑을 기억해 낸 그는 용기를 내서 이전처럼 ‘아들로 살려고’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속한 이들 가운데 하나로 곧 ‘종처럼 그를 섬기려고’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아버지께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종으로 삼아달라고 청하리라 다짐한다. 집으로 향하는 그의 내면 깊은 곳에 평화가 스며든다.

 

 

기쁨과 생명의 샘인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을 떠난 작은아들에 대한 걱정이 커져갔고, 아들이 떠난 길을 바라보며 그를 기다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마을 입구에 아들이 나타났을 때 아버지는 먼 거리에도 먼저 아들을 알아보는데, 이는 그가 아들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어떤 책망이나 질책 없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히려 초라한 아들의 모습에 ‘가엾은 마음’이 일었다. 이 ‘가엾은 마음’은 루카가 두 번 사용하는데(나인의 과부, 사마리아 인), 이는 죽음의 상황에서 느끼는 연민으로 생명을 다시 부여하는 능력에 앞서 예수님이 지니셨던 마음이다. 이 비유에서는 가족을 떠나 마치 죽은 사람처럼 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으로 아들을 용서함으로써, 잃었던 아들이 다시금 아들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한다.

 

아버지는 두 팔을 벌리고 아들을 향해 달려간다. 그의 권위와 나이로 보아 품위 없는 행동이지만 그것은 모든 원칙을 넘어선 사랑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목을 껴안아 아들로 하여금 그의 발아래 엎드리는 행동을 막으며 입맞춤으로 용서와 친교의 사랑을 드러낸다(2사무 14,33).

 

아버지의 품이 얼마나 따뜻한지! 아들은 이제까지의 모든 고통이 그 따뜻함으로 씻김을 느낀다. 아들은 아버지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만 앞서 결심한(18-19절), 종으로 삼아달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을 종으로 써달라고 했을 때 아버지가 느끼실 슬픔을 보게 되었고, 또다시 아버지의 마음에 상처를 드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또한 아들이 종으로 삼아달라고 표현할 시간을 주지 않고 종들에게 잔치를 준비하라고 이른다.

 

아버지는 가장 좋은 옷(축제의 옷으로 묵시록에선 구원된 이들의 옷이다. 묵시 6,11; 7,9)을 입히고 반지(권위와 힘을 상징)를 끼우고 신발(자유로운 사람)을 신겨주라고 함으로써 잃었던 아들의 품위를 회복시켜 준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강생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희생과 부활을 상징)를 잡으라고 함으로써 기쁨의 축제를 연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죽었던 아들이 살아났고 잃었던 아들을 도로 찾았기 때문이다’(24절). 아들은 용서하는 아버지를 다시 만남으로 더욱 완전한 회개가 이루어지며 마음 깊이 샘솟는 기쁨과 생명을 누린다.

 

 

성실한 종

 

들에서 돌아오던 큰아들은 집에서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듣고, 자신이 직접 들어가 알아보지 않고 하인을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하인은 동생의 회개나 돌아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용서와 자비를 감지하지 못하고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다. 곧 동생이 성한 몸으로 돌아왔고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재산을 탕진한 동생의 귀환과 그를 받아들인 아버지에게 화가 나 큰아들이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자 아버지는 앞서 작은아들을 맞이하였던 같은 사랑으로 나와서 큰아들을 달랜다.

 

작은아들이 다섯 번(호격 12, 18, 21절; 나의 아버지 17, 18절)에 걸쳐 아버지의 이름을 불렀던 것과는 달리 큰아들은 아버지를 향하여 “보십시오(ιδου).”(29절)라고 말함으로 자신의 굳게 닫힌 마음을 드러내고,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29절)라고 말한다. 그는 이제까지의 온갖 희생과 아버지 마음에 들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던 자신의 삶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 자신에게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던 아버지가, 창녀에게 빠져 재산을 탕진한 동생에겐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었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자신에게 재산은 있었다. 아버지는 동생이 그의 몫을 청할 때 자신에게도 이스라엘 풍습대로 동생의 두 배의 재산을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했을 때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두려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살지만 아버지를 알지 못했으며 그 사랑을 깨닫지 못했기에, 자신의 몫을 두고도 그 권리를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동생을 받아들인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으며 재산을 낭비한 동생을 단죄하고 동생을 가리켜 아버지께 “저 아들”(30절)이라고 표현함으로 동생을 경멸하며 형제로 여기지 않는다.

 

아버지를 부르지도 않는 아들이지만 아버지는 불평하는 큰아들을 향해 부드럽게 “얘야(τεκνον)”, 곧 ‘(내) 아들아’ 하고 부른다. 아들을 뜻하는 이 단어는 친아들에게만 사용되는 것으로, 어떤 사람과의 관계와 연결되어 사용되는 단어 ‘아들’(νιυ? : 요한 1,42 “요한의 아들 시몬”)과는 구별된다.

 

아버지는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며 내 것은 모두 네 것이다.”(31절)라고 말함으로 아들이 생각하듯이 자신과 아들이 주인과 종이 아닌, 일치와 친교의 관계에 있음을 강조하며, ‘너의 아우’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함으로 돌아온 동생의 현실을 파악하기를 권고하며 형으로서, 가족으로서 기쁨을 함께 나누도록 큰아들을 초대한다(32절).

 

 

새김 - 아들을 향해 달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흰 머리, 굽은 허리, 지팡이, 몰아쉬는 숨, 비틀거리는 발걸음, 기쁨으로 뛰는 가슴…! 성경 안에서 이보다 더 우리를 감동시키는 장면이 있을까! 하느님은 우리에게도 같은 모습으로 달려오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기도 - 사랑의 주님! 주님 앞에 있는 제 모습에서 큰아들의 삶에 작은아들의 회개가 필요함을 봅니다. 저의 굳은 마음을 열어주시어 사랑이신 당신을 깨달아 하늘나라 잔치에서 주님과 함께 즐기게 하소서.

 

* 박미숙 레지나 - 성모영보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성서학을, 글라렛티아눔에서 수도신학을 공부했다.

 

[경향잡지, 2011년 6월호, 박미숙 레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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