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오로22: 두 번에 걸친 투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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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1-07-24 | 조회수3,218 | 추천수1 | |
[동녘에서 서녘까지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오로] (22) 두 번에 걸친 투옥 사도 바오로, 로마에서 장렬하게 순교하다
- 작가 노트 = 두 번째로 투옥된 바오로 사도가 죄수처럼 쇠사슬에 묶여 있다. 두 차례에 걸친 재판은 결국 사형으로 판결이 난다. 그리하여 로마 시민인 바오로는 참수된다. 손이 묶인 채 동쪽으로 돌아서 하느님께 마지막 기도를 드리자 그의 머리는 땅에 떨어지고 주님을 찬양하던 그의 입은 영원한 침묵에 잠긴다. 한 달 동안 소티리우스 대주교와 바오로 사도의 선교여행 길에 함께한 나는 그 가슴 떨리는 순간을 그리며 진한 눈물을 닦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1,10-15)을 통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바오로 사도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열망이 무척 컸다. 로마에 왔으나 그는 일정 주거지에 연금된 영어(囹圄)의 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바오로는 기회가 닿는 한 그리스도를 전파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도착 사흘 뒤부터 유다인 명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자신을 방문해 달라고 요청하고 그들에게 자신이 영어의 몸이 된 이유들을 알려줬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다시 그를 찾아왔고, 그는 예언서에 근거해 그들에게 구세주 그리스도에 대해 말했다. 일부는 그의 말씀을 받아들였으나, 상당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어의 몸으로 그리스도 전파
로마에서 영어의 몸으로 있던 2년 동안 바오로는 자신이 머물던 집을 셋집으로 바꿔 선교 중심지로 삼았다. 많은 사람들이 바오로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열망으로 찾아왔다.(사도 28,7-29 참조) 사도행전은 여기에서 멈춘다. 바오로의 행적에 대해 더 이상 아무것도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바오로가 순교하기까지 행적에 대해 아주 귀중한 정보를 갖고 있다. 그것은 그가 처음 감옥에 갇혀 있던 기간, 즉 주후 61~63년에 썼던 서한 다섯 편과 그 이후 쓴 서한 세 편이다.
이들 서한은 로마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꾸준히 늘어났음을 알려준다. 바오로는 신자 수가 이처럼 늘어난 이유를 그가 감옥에 갇힌 덕분으로 돌린다.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형제 여러분, 나에게 닥친 일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온 경비대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형제들이 내가 갇혀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주님 안에서 확신을 얻고, 두려움 없이 더욱 대담하게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필리 1,12-14).
바오로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당대 역사가들은 일찍이 로마의 팔라티노 언덕으로 그리스도교 사상이 스며들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공인들 가운데서도 티토 플라비우스 클리메네와 그의 부인 도미틸라 외에도 다수가 그리스도인이 됐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 주후 약 55~117)는 주후 64년 그리스도교회가 엄청난 숫자로 불어나 있었고, 그리고 계속해서 불어났다고 전한다.
바오로는 그의 첫 번째 영어 생활을 마치면서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서간을 통해 이렇게 썼다.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모든 성도가, 특히 황제 집안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필리 4,22).
바오로의 재판은 2년이나 늦어졌다. 그것은 수많은 주요 사건들을 다루던 로마 법정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네로가 임명한 두 재판관 가운데 한 사람인 페니우스 루푸스(Fenius Rufus)가 바오로 사건을 맡아 주후 63년 여름에 재판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잔인하지 않고 아주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바오로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바오로는 자유의 몸이 됐고, 어느 곳이든지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게 됐다.
4년간 영어의 세월을 보낸 후에 그의 손을 속박하던 쇠사슬이 풀렸기에 바오로는 새로운 봄이 그에게 찾아왔음을 느꼈다. 쇠사슬에 묶인 채 그가 크레타 섬을 지나 로마로 향할 때 그곳 사람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 자유로운 몸이 되자 그는 티토를 데리고 크레타로 가는 배에 승선했다.
두 번째 재판에서 사형선고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이 강림한 오순절 날에 베드로 사도 설교를 경청했던 사람들 가운데 크레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고향 크레타로 돌아왔을 때 당연히 새로운 신앙에 대해 말했을 터이지만, 고향에서 체계적으로 선교 활동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크레타 섬에서 선교 활동의 새로운 장을 펼쳤던 것이다.
그리고 티토에게 크레타 섬 선교 임무를 맡기고, 그곳을 떠나 그의 선교 활동을 계속했다. 그곳에서 그는 코린토로 갔으며, 그곳에 에라스토스를 남겨놓았다. 그 후 에페소 사람 트로피모스가 앓아 누워있는 밀레토스로 갔으며, 그 이후에는 에페소로 가서 티모테오를 그곳에 정착시켰다. 그리고서 마지막으로 트로아스에 왔으며, 그곳에서 다시 마케도니아로 갔다.
주후 66년 가을, 바오로 사도는 협력자들과 함께 니코폴리스로 갔다. 바오로는 그곳에서 겨울을 보낼 생각이었다. 가면서 티토에게 니코폴리스에서 만나자고 편지를 보냈다.(티토 3,12 참조) 티토는 니코폴리스로 가서 바오로와 함께 겨울을 난 것으로 보인다.
주후 67년 봄, 바오로 사도는 티토를 일리리아(달마티아, 오늘날의 발칸반도)로 보내고(2티모 4,10 참조), 자신은 로마로 떠났다. 로마 주교 클레멘스는 바오로가 스페인을 의미하는 '서쪽 끝까지' 갔다고 전하고 있다.
옛 전승에 따르면, 로마 수비대가 바오로를 체포했으며, 그곳에는 오늘날 하나의 작은 교회(San Paolo alla Regala)가 있다고 전해진다. 그곳에 바오로가 머물며 복음을 전파하던 집이 있었다. 그 외에도 군인들이 그 집으로 가 바오로의 설교를 듣고 그가 황제를 존중하지 않는 이단의 수괴라고 고발했다고 전해진다.
다시 갇히게 된 바오로는 처음 투옥됐을 때와 달리 곤경에 처했다. 죄수처럼 쇠사슬에 묶였다. 지인들이 감옥을 찾아 면회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황제 법정에서 이뤄진 첫 재판에선 훌륭하게 변론을 했으나, 판결은 연기됐다. 다시 재판을 하기 위해서였다. 바오로는 이같은 곤경 가운데서도 티모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사자의 입에서 구출되었습니다"(2티모 4,17).
주후 67년 가을, 두 번째 재판이 다가왔다. 바오로 사도는 '하늘 왕국에 들어감으로써' 이같은 곤경이 끝나게 될 것임을 알았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2티모 4,6).
두 번째 재판에선 사형이 선고됐다. 로마 시민으로서 참수형이 집행되기에 이른다. 사형을 집행할 소규모 분견대(分遣隊) 호위를 받으며 바오로는 손이 묶인 채 로마에서 5㎞ 정도 떨어진 성 밖 사형집행장으로 끌려갔다.
세 곳에 분수처럼 물이 솟아나와
교회 전승은 우리에게 바오로의 순교 장면을 담은 성화를 전해준다. 이 성화에서 바오로는 손이 묶인 채 동쪽으로 돌아서 하느님께 큰소리로 자신의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있다. 이윽고 로마 병사가 칼을 내려치자 바오로의 머리가 땅에 떨어지고, 그의 입은 주님 향기를 내뿜고 영원한 침묵에 빠졌다.
현재 그곳엔 '세 개의 샘(Tre Fontane)'라는 이름의 성 빈센트와 아나스타시우스 수도원(Abbey)이 세워져 있다. 바오로 사도의 목이 떨어지자 세 곳에 분수처럼 물이 솟아나와 샘이 만들어졌다는 전승에 따라 'Tre Fontane'(영어 Three Fountains, 라틴어 Trium fontium ad Aquas Salvias)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바오로 사도는 처형장에서 3㎞ 떨어진 곳에 있는 로마인 루키니 농장에 매장됐다. 그 자리에는 오늘날 바실리카풍 장방형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라테라노 대성전(Basilica di San Giovanni in Laterano), 성모 대성전(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 성모설지전), 성 베드로 대성전(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 바티칸 대성전)과 함께 로마 4대 성전으로 꼽히는 '성 밖 성 바오로 대성전'(Basilica di San Paolo fuori le mura)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바오로 유해를 농장 내 숨겨진 작은 장소에 묻었고, 3세기 발레리아누스 황제(재위 253~260) 박해시대까지 그곳에 남아 있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이교도들이 최정상 사도인 바오로 성해를 훼손하지 못하도록 이를 가져다가 또 다른 최정상 사도인 베드로 성해와 함께 성 세바스티아노 성당 카타콤으로 옮겼다. 교회는 이 귀중한 성해을 구하고 지켜낸 것에 크게 감사하며 성해를 옮긴 날인 6월 29일을 오늘날까지도 두 사도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the Great, 재위 306~337)는 두 사도의 첫 무덤이 있던 곳에 성당을 세웠다. 교황 실베스테르 1세(재위 314~335)는 두 사도 성해를 새로 세운 성당으로 옮겼다. 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장남과 차남인 동로마제국 아르카디우스(재위 395~408) 황제와 서로마제국 호노리우스(재위 395~423)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바오로 사도 첫 무덤에 세웠던 작은 성당 자리에 그 유명한 바실리카 바오로 사도 대성당을 세웠다.
이 성당 건축은 주후 395년에 완공됐으며, 그 넓고 웅장함은 당시 모든 그리스도교 건축물을 압도했다. 불행히도 이 성당은 1823년 화재로 유실됐고, 그 자리에 같은 크기로 오늘날 남아있는 성당이 세워졌다. 이 성당 제단에는 바오로 사도의 장엄함의 비밀이 새겨져 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필리 1,21).
[평화신문, 2011년 7월 10일, 글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대주교, 그림 정미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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