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오로23: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 | |||
---|---|---|---|---|
이전글 | [신약]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오로22: 두 번에 걸친 투옥 |1| | |||
다음글 | [상징] 하느님: 자비로우시고 너그러우신 분 |1|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1-07-24 | 조회수3,224 | 추천수1 | |
[동녁에서 서녁까지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오로] (23)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길 길을 다 달렸습니다"
- 작가노트 = '그리스도를 본받아' 산 바오로 사도의 한 생애는 그야말로 그리스도인의 모범이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일생을 그리스도와 하나돼 살아간 사도의 사목적 열정을 담아내는 작업은 행복했다. 바오로 사도의 손에서 꽃피운 교회들을 그리면서 선교여행을 도새기다보니 새삼 그 깊고 높은 사도의 선교 영성에 젖어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그리스도의 빛으로부터 오는 진실되고 순수한 자비심이었다.
그동안 숨 가쁘게 걸어왔다. 바오로 사도 행적을 살피고, 그가 이룩한 더없이 훌륭한 업적을 확인하는 여정이었다. 그런데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고매한 인물로 알려지게 만든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자신 버리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
답변은 단순하다. 자신을 버리고 하나이며 유일한 하느님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위주로 사는 삶과 하나가 되는 인격의 힘이었다. 이는 그리스도의 빛으로부터 오는 진실하고 순수한 자비심에서 비롯되는 영향력이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서 자신이 느낀 사랑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서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영혼의 아주 깊은 곳에서 자신에게 향하는 그리스도 사랑을 느낀다.
모세 율법은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3-47)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적이었고 자신의 제자를 박해하던 바오로를 그리스도는 사랑하고 속죄하고 존중했으며, 급기야는 자신의 사도로 삼았다. 모세 율법에 따른다면, 바오로가 그리스도인을 체포하러 다마스쿠스로 접근했을 때 주님은 그에게 불을 던지고 불태워야 했다. 그렇지만 주님은 신성한 빛으로 바오로를 감싸고 열두 제자 이후 어느 누구에게도 주시지 않은 사도라는 높은 직분으로 그를 높이는 은총을 베풀었다.
부활한 주님은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 자신을 믿고 사랑하도록 권면했다. 그리고 자신을 '칠삭둥이'에 비유했던 바오로에게도 분명하게 나타났다.(1코린 15,5-8) 후에 로마 그리스도인에게도 말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이 사랑이 바오로를 사로잡았다.
이미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다른 어떤 직분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로마 1,1)이라고 자신의 서한에 적고 있다. 종으로서 그는 주님이 기뻐할 것만 하게 됐다. 사람들을 돕기 위해 겪은 바오로의 고행과 희생을 비록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주님은 좋아했다. 그러므로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이라면, 나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종이 아닐 것입니다"(갈라 1,10)고 말했던 것이다.
바오로는 문제가 생기면 그리스도께 기도를 통해 구했고, 그 답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리스도의 응답을 받았다.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서 그 응답과 내용을 확인한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2,8-9).
'예수 그리스도의 종' 역할에 충실
선교여행에서도 바오로는 늘 주님이 이끄는 곳으로 갔다. 바오로는 프리기아와 갈라티아를 거쳐 그의 두 번째 선교여행 중에 에페소를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주님은 그를 다른 곳으로 인도했기에 바오로는 에페소로 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비티니아로 향했을 때에도 주님은 바오로를 내버려 두지 않고 트로아스로 인도했다. 그곳에서 다시 환영으로 나타난 주님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마케도니아로 향하는 것이라고 했고, 비오로는 그래서 그 말씀에 순종해 마케도니아로 갔다.(사도 16,6-10 참조) 항상 기도하며 주님 뜻이 무엇인지 알고자 했고 주님 뜻에 따라 행동했다. 그것은 협력자들에게서도 확실히 증거된다. 카이사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할 때 예루살렘으로 갈 것인지 말 것인지 하는 논쟁이 벌어지자 협력자들이 바오로에게 말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빕니다"(사도 21,14).
바오로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하며 하나됨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 그는 주님께서 함께하므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근심하지 않았다. 전능한 하느님 아들 예수님께서 항상 그와 함께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함께하지 않았더라면, 리스트라에서 돌팔매를 맞고 쓰러졌던 바오로가 두 발로 다시 일어설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일어섰을 뿐 아니라 다른 도시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계속해서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하기까지 했다.
바오로의 몸은 반복된 매질로 상처투성이였고 바오로는 그것을 기뻐하며 자랑했다. 채찍질 상처를 가지고 있던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도 채찍질 당했고 그 상처를 마치 훈장을 받은 것처럼 자랑했다.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갈라 6,17).
바오로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서간에 남긴 말에서 알 수 있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로마 감옥에 투옥돼 재판 받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어떠한 판결이 나올지 몰랐지만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형선고도 걱정되지 않았다. 반대로 그것을 원했음을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 적어 놓았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필리 1,23).
그는 분명 모든 사람이 지닌 죽음의 공포를 벗어났기에 불패의 용기로 주님이 자신을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나 갈 수 있었고 담대하게 네로 궁전 사람들에게까지 교리를 가르칠 수 있었다.
바오로 삶의 주된 목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면에서 따라 살고 주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었다. 베드로 사도가 쓴 것에 맞춰 행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주셨습니다"(1베드 2,21). 그래서 바오로는 용기를 내 말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코린 11,1).
죽음 앞에서도 담대히 복음 선포
이러한 마음으로 바오로는 생애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두 번째로 로마 감옥에서 쇠고랑을 차는 영어(囹圄)의 몸이 됐다. 모든 것이 다가오는 재판에서 바오로가 사형선고를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에페소에서 봉직하는 사랑하는 제자이자 협력자인 티모테오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는 열정을 보여준다. 티모테오에게 자신의 마지막 충고를 남기고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덧붙였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2티모 4,6-8).
이 말은 바오로 사도의 선한 양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위대한 정신을 보여주며 평정을 잃지 않은 평안을 느끼게 한다. 어느 누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보다 더 훌륭한 말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평화신문, 2011년 7월 24일, 글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대주교, 그림 정미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