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에서 만난 열 사람의 나병환자, 루카 17,11-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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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1-08-23 | 조회수3,028 | 추천수1 | |
‘만남과 관계’로 본 루카 복음 - 루카 17,11-19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에서 만난 열 사람의 나병환자
우리는 주위에서 쉽게, 특히 지나가는 차의 창문에 ‘고맙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빨간색의 스티커를 자주 보게 된다. 그것을 볼 때면 자연스레 미소가 피어오른다. 왜냐하면 우리의 바보, 김수환 추기경님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분의 정신을 잇고자 사랑과 감사의 운동을 펼치려고 서울대교구에서 배포한 스티커이다.
‘고맙습니다!’ 참 아름다운 말이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이 베풀어준 호의나 도움에 대한 마음의 표현이다. 루카 복음 17,11-19에는 나병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치유받는 내용이 나온다. 건강을 회복한 이는 열 사람 모두이지만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다. 그의 감사는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가져오고, 이로써 그의 영과 육은 온전한 구원을 받는다.
우리는 과연 하루 몇 번이나 “고맙습니다.”라고 하느님께, 내 이웃에게 표현하며 사는가? 신앙인으로서 감사해야 하는 것에 번번이 부도를 내고 있지는 않은지….
만남과 떠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다.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심은 이미 그분의 수난이 시작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이루실 일, 곧 십자가 죽음을 통한 구원이 실현될 장소이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의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고 계실 때 마을로부터 그분을 향해 달려오는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만난다.
그들은 율법 규정(레위 13,45-46)을 지키고자 일정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선다. 당시 나병은 전염된다고 믿었기에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유지해야만 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12-13절). 그들은 같은 고통과 불행으로 하나가 되어 처절하리만큼 애타게 자비를 간청한다. 낼 수 있는 소리를 다해 외침으로 자신들의 아픔이 예수님의 마음에 도달해 그분께서 자비의 마음으로 자신들을 치유해 주시기를!
그들은 ‘예수’라는 이름에 ‘스승님’이라는 호칭을 덧붙인다. ‘스승님(επιστατη?)’은 ‘위에 있는 자’이며 ‘인도하다, 안내하다.’라는 뜻을 가진 말로서, 주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8,24.45; 9,33.49)이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여겼기에 ‘스승님’이라 불렀다. 그들은 이미 그분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곧 죽은 사람까지 살리시는 분이라는 명성을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말없이 그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이 그동안 겪어야 했던 고통을 헤아리신다. 육체적 고통을 넘어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하는 정신적 고통에 더하여 하느님께서 내리신 병이라고 여겼기에 스스로 죄인으로 살아야 했던 그들의 아픔을 보신다. 그들이 지금 얼마나 간절한 마음과 희망으로 당신께 간청하는지 또한 알고 계신다.
예수님은 그들을 치유하시려고 가까이 가지도, 그들을 가까이 오라고도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들의 간청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들을 눈여겨보신다. 예수님께서 보신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확인을 하는 것이 아닌 구원의 행위에 앞서 갖는 마음의 집중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14절) 하고 말씀하신다.
레위기 13장에 따르면, 악성 피부병이 생겼을 때 사제에게 보이고 판결을 받아야 하는데 정결한 이로 선언되면 공동체에 머무르나 부정한 이로 선언되면 공동체에서 격리된다.
예수님은 그들이 율법에 따라 공동체에 귀속할 수 있게 하시면서 그들을 신앙의 여정에로 초대한다. 육체적 치유를 넘어 구원을 주시는 분을 알아보도록, 곧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을 알도록 그들을 이끄신다. 듣던 것과는 달리 직접 치유해 주시지 않고(5,13) 사제들에게 보이라는 말씀에 그들은 매우 당황하였지만 그분의 말씀을 믿고 사제들에게로 향한다. ‘사제들’이 복수로 표현됨은 그들이 모두 한 사제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살던 곳의 사제에게로 감을 의미한다.
무상의 선물과 믿음
사제들에게 달려가던 나병환자들은 자신들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느끼며 걸음을 멈추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병으로 일그러진 피부에 새살이 돋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제각기 사제에게로 달음질해 간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본다. 그는 하느님의 능력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짐을 보았다.
그의 마음 깊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눈이 떠지자 주저함 없이 큰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되돌아온다. ‘큰소리로’라는 말은 그의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나타내며, ‘찬양하다(δοξαζω)’는 ‘영광을 드리다.’의 뜻으로 그가 모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냄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그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는 더 이상 예수님으로부터 ‘멀찍이 서’ 있지 않고 그분 앞으로 간다. 그는 한없이 사랑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깊은 존경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그는 비로소 그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게 되었다.
복음서 저자는 돌아온 그 사람이 사마리아인임을 강조한다(16절). 당시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하였으며 그들과 상종도 하지 않았다(요한 4,9). 그러기에 그에게는 예수님이 더욱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유다인인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인 자신의 청원에 귀 기울여주시고 자비를 베풀어 치유해 주심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무상으로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을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엎드려있는 사마리아인을 일으키시며 예수님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아홉 사람을 찾으신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17절) 그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이제까지 그들은 같은 불행으로 서로 의지하며 하나로 살았다. 그들은 사마리아인인 자신에게도 같은 병을 앓고 있다는 유대감으로 민족적 경계를 넘어 그를 받아들여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건강을 회복하자 그 일치가 무너졌고 그들은 각자의 길을 갔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18절) 예수님의 한탄하는 말씀에 안타까움이 인다. 모두 건강을 회복하였으나 아홉 사람은 예수님의 자비 안에서 하느님의 선물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이 만일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깨달았다면 돌아와 감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닫혀있었고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가족과 사회로의 복귀가 전부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것, 곧 몸이 낫는 것에 만족하였기에 그분께서 마련하신 더욱 크고 기쁜 영원한 선물, 구원을 얻지 못하고 계속하여 하느님과 ‘멀찍이 선’ 관계에 머물게 되었다. 이것이 그들의 한계였다.
사마리아인의 구원과 파견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 사마리아인은 구원의 체험을 가진 신앙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건강을 회복한 체험이 선물을 얻는 한 도구이지 목적이 아님을 깨달았다. 자신 안에서 일어난 하느님의 크신 업적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감사를 드렸을 때, 그는 비로소 온전한 구원을 받았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받아들이려고 마음의 문을 연 그의 ‘믿음’을 강조하셨다. 예수님은 다시 그를 보내신다. 처음에는 사제를 향해, 두 번째는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을 증언하도록 보내신다. 떠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예수님도 당신의 길을 가신다. 십자가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새김 -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이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로 바뀌어 나를 당황하게 한다.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아홉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어 예수님을 잊고 살고 있지는 않는가? 그분은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계시는데,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그분께 가까이 가기를 미루고 있지는 않는가?
기도 - 주님! 제 삶이 당신 앞에 깨어있게 하소서. 당신의 선물을 알아차리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 박미숙 레지나 - 성모영보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성서학을, 글라렛티아눔에서 수도신학을 공부했다.
[경향잡지, 2011년 8월호, 박미숙 레지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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