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창세기: 에덴의 동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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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1-08-26 | 조회수4,140 | 추천수1 | |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창세기 - 에덴의 동쪽
새해입니다. 매일 단 한 장이라도 생명의 말씀을 읽고 힘과 위로를 받는 일상이 되길 기도하며 성경을 펼칩니다. 이번 달에는 창세기 4장의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읽습니다. 이 이야기에 예전 영화 제목이기도 하고 요즘 방영되는 드라마 제목이기도 한 ‘에덴의 동쪽’이란 말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한 장 분량도 되지 않는 이 이야기가 왜 숱한 예술 작품의 모티프가 되었을까요?
“현대인들은 마음을 잃어버렸다. 컴퓨터나 전자기구의 자동 버튼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정보를 따라 성공 지상주의로 내달려가고 있지만 그 내면은 처참하게 허물어져 가고 있다. 투기열풍의 현장이나 쇼핑센터를 헤집고 다니고, 때로 얼굴도 고쳐 보지만 한 인간으로서 진정한 가치를 외면한 채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CF 속에서도, 지금 필요한 것은 속도라고 외치는 무한 속도 속에서, 우리는 마음도 잃고, 사랑도 잃고, 영혼도 잃고 그래서, 심리적 유목민이 되었다. 우리에게 안식처는 어디인가”(MBC 드라마 <에덴의 동쪽> 기획 의도에서).
우리의 안식처를 묻는 <에덴의 동쪽> 드라마의 기획 의도를 읽으며, 무한 경쟁 시대에서도 마음 저 깊은 곳의 바람과 안식과 구원은 늘 인간의 희망임을 깊이 느꼈습니다. 세상이 팍팍해질수록, 경제가 어렵다는 말이 만연할수록 우리는 더 깊이 갈망합니다. 세상의 드라마로 각색되어 문학 창작의 원천이 되었던 창세기 4장의 이야기는 오늘도 우리네 삶의 이야기가 됩니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 “카인은 주님 앞에서 물러 나와 에덴의 동쪽 놋 땅에 살았다”(창세 4,16)에서, 카인이 살았던 ‘에덴의 동쪽’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여기’라서 그런 건 아닐까요?
4,3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4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5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카인은 농부였고, 아벨은 가축을 치는 목자였나 봅니다. 그러니 둘 다 자신에게 있는 것을 바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아벨의 것은 기꺼이 굽어보시고 카인의 것은 굽어보지 않으셨다고 성경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형이 동생을 살해하는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공평하셔야 할 하느님께서 형제를 불공평하게 대해 죄의 원인을 제공하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맞는 말이지만, 그것은 성경을 글자 그대로 읽을 때 생길 수 있는 오해입니다. 또 어떤 분은 굳이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십니다. “카인은 정성이 부족했어요.” 신약성경에도 아벨이 “카인보다 나은 제물”(히브 11,4)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렇게 볼 여지도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나중에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해석한 것이지 창세기 본문에는 그렇게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하느님께서 왜 카인의 제물은 굽어보시지 않았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형제 관계’라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모두 형제 관계를 맺고 같은 권리를 가지고 함께 살아가지만, 누구의 것은 받아들여지고 누구의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삶을 피부로 느끼며 살아갑니다. 다시 말해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많이 가질 때, 한쪽은 성공하고 다른 쪽은 실패할 때 공동체에 위기가 온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똑같은 삶의 여건을 가지고 태어나 살아갈 수 없는 삶의 실존 상황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때 자신이 가진 것을 되돌려 드릴 수 있고, 받지 않은 것은 바칠 수 없으니 주어진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받으신다’는 표현을 하였는지 모릅니다.
4,6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7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제물에 대한 하느님의 평가가 있고 난 다음,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느냐’입니다.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립니다. 자신을 아벨과 비교합니다. 자기가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 주목하고, 타인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삶에 대해 자존감을 잃어버립니다.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그러므로 내 삶에 자존감을 가지라는 초대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카인은 ‘비교와 경쟁’을 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남에 비해 가진 것 없는 자신, 부모에게서 좋은 환경도 물려받지 못한 우리네 인생을 나타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황을 보듬어 안아야 하는, 어쩌면 ‘2등 인생’인 우리 모두를 카인이라고 이름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 나가고 인정받는 사람(아벨처럼 굽어보았기에 받아들여진 자)이 아니라 뭔가 남에 비해 부족하고 처진 것 같은 자신을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처지를 카인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요(어쩌면 모든 인간은 이렇게 한계를 지닌 카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카인이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끊임없이 위만 바라보며 남과 비교하여 불평할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작은 것이나마 다시 헤아려 감사하게 여기고 자기 삶에 자존감을 가지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자신에게 없는 것을 가진 자와 비교하여 열등감에 빠지거나 가진 자를 적대시하고 미워하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결국 환경과 세상을 원망하고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감사하게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인생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불특정 다수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쏘아 대며 불행을 자초하는 곤경에 빠질 수 있습니다.
* 배미향 수녀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소속으로 본지 편집차장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언어임을 체험하며 이를 나누고 싶어한다.
[성서와함께, 2009년 1월호, 배미향 수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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