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창세기: 의로운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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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1-08-26 | 조회수4,053 | 추천수1 | |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창세기 - 의로운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6,7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 8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 9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다.
성경 저자는 홍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주님의 눈에 든(6,8) 의롭고 흠 없는 사람, 하느님과 함께 살아간 사람(6,9)으로 노아의 됨됨이를 소개합니다. 그가 살던 세상은 하느님 앞에 타락해 있었고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정녕 모든 살덩어리가 세상에서 타락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6,11-12). 어릴 때부터 이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온 우리는 서둘러 결론에 이릅니다. ‘아 노아처럼 착하게 살라는 이야기구나! 그래도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으시려고 착한 노아에게 배를 만들라고 하셨구나.’ “모든 이는 다 죽었지만 착한 노아는 복을 받아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무지개가 떠오른 동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착한 어린이가 될 것을 결심하며 성경을 덮습니다.
노아처럼 착하게 살 때 구원을 받는다?
흔히 성경은 윤리적 의무와 당위성을 요구하는 책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인간이 죄짓는지 지켜보는 감독자, 케케묵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노인장, 참으로 완벽하신 분(하느님은 너무나 무한하시고 완전하시기에 나에게 100%의 노력과 완벽함을 요구하신다)으로 여겨 종교를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멀리합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면서 성경을 읽고 착한 마음으로 살겠다던 어린 시절의 생각마저 바뀝니다. ‘노아처럼 사는 것은 어려워. 의롭고 흠 없는 사람? 그건 성경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이고…’ 하며 적당히 타협하고 사는 것이 사람 사는 것이라고 정당화합니다.
의롭고 흠 없는 노아와 자녀들이 방주를 통해 구원받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구원이 의롭고 흠 없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의롭고 흠 없다’는 단어를 ‘정의롭고 완전무결하다’는 윤리적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면에서 정의롭고 완전무결한 사람만이 구원받는다면 구원받을 자가 얼마나 될까요? 창세기 2-4장에서 기술하듯이 인간은 본래 불완전한 흙의 존재입니다. 게다가 하느님을 거스르고 형제간에 갈등하는 죄인입니다. 이런 불완전한 죄인이 스스로 완전해지고 의롭게 되어 구원의 경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죄 많은 인간을 용서하시고 당신께 오는 이를 품으시는 하느님만이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 즉 죄인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 하느님의 충실한 사랑을 신뢰하고 그분과 관계를 이어가는 것을 성경에서는 ‘의롭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성경에서 의롭다는 말은 윤리와 도덕 측면에서 완전무결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음을 가리킵니다. ‘흠 없다’는 말 역시 도덕적 결함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온전하다’, ‘한마음이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즉 노아는 삶의 중심에 하느님을 모시고 한마음으로 섬기면서 그분과의 관계를 똑바로 형성해 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노아를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다’고 표현합니다.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여 있다면, 즉 하느님을 믿고 신뢰한다면 그는 의로운 자입니다. 이렇듯 의로움은 법률 개념이 아니라 신학 개념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기에 하느님과 관계의 끈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노아의 의로움을 밝히는 성경 말씀은 노아가 완전무결해서 우리를 주눅들게 하거나,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좌절하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저버리지 않을 때 부족한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6,14 너는 전나무로 방주 한 척을 만들어라. 그 방주에 작은 방들을 만들고, 안과 밖을 역청으로 칠하여라. 15 너는 그것을 이렇게 만들어라. 방주의 길이는 삼백 암마, 너비는 쉰 암마, 높이는 서른 암마이다. 16 그 방주에 지붕을 만들고 위로 한 암마 올려 마무리하여라. 문은 방주 옆쪽에 내어라. 그리고 그 방주를 아래층과 둘째 층과 셋째 층으로 만들어라.
여기서 ‘방주’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테바’는 탈출기에서 모세를 태워 그의 생명을 구했던 ‘왕골 상자’와 동일합니다. 암마는 사람의 팔꿈치에서 손가락까지 길이 약 46cm를 말합니다. 3층짜리 방주의 모양은 단순한 배라기보다 고대 근동의 성전 모형을 연상시킵니다. 즉 하느님과 만나 구원받는 장소입니다. 구원의 성전에서 하느님과 관계를 끊지 않을 때(노아의 방주에 머무를 때),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이 숨지고 말더라도(6,17) 그분께서는 우리와 계약을 세우겠다(6,18)고 말씀하십니다. 계약은 별개이던 것을 서로 연결시켜 특별한 관계를 이룹니다. 아무 관계가 없던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계약(결혼)을 맺으면 삶의 모든 것이 달라지듯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인간인 내게 자비를 베푸시고, 사랑과 복, 생명과, 구원을 주시려고 계약(관계)으로 초대하십니다.
7,1 주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가족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거라. 내가 보니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런 초대에 걸맞는 인물을 찾으셨는데 그가 바로 노아입니다. 노아는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여 하느님과 충실한(올바른) 관계를 맺었던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거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충실한 행동을 했기에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 아닙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 충실한 행동이 나옵니다.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기에 하느님과 함께 걸어갈 수 있습니다. 자녀가 올바른 행동을 했기에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내리사랑이 먼저이고 자녀가 그 사랑을 알기에 부모에게 효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낳아 본 다음에야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먼저입니다. 먼저 하느님을 신뢰하여 어떤 경우에도 그분과의 충실한 관계를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의로움이며 그런 면에서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노아를 통해 배울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가 충실한 행동을 낳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 충실했던 노아는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했습니다. “노아는 그대로 하였다.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6,22; 7,5).
[성서와함께, 2009년 2월호, 배미향 수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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