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창세기: 내가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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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1-08-26 | 조회수3,484 | 추천수1 | |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창세기 - 내가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지금까지 걸었던 ‘한처음 이야기’(창세 1,1-11,26 참조)에서는 인간의 악으로 인해 하느님의 심판과 추방이 거듭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 걸어갈 ‘선조사’에서는 이스라엘 신앙 선조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복과 약속이 점차 구체화되고 확산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계를 지닌 인간이 어떻게 공동체와 함께하는 삶으로 회복되는지 만나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을 읽으면서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른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 외아들을 바치면서까지 하느님의 뜻에 충실했던 인간 아브라함을 통해 어떻게 회복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일상의 길을 통해 하느님의 길을 끊임없이 걸었던 아브라함과 함께 걸어 봅시다.
창세 11,27-32에는 지명이 세 군데 나옵니다. 칼데아 우르, 하란, 가나안. 이 세 곳을 이으면 주변의 사막 지역과 달리 물이 풍부하고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 됩니다. 그래서 이 지역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물과 비옥한 충적토를 기반으로 일찌감치 농경 생활이 시작된 곳입니다. 문명이 시작되어 성읍이 서고 상업 교류가 활발하여 양식을 구하는 유목민들의 왕래도 활발한 지역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 테라와 함께 칼데아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 가나안에 이르는 먼 길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당시 비옥한 초승달 통로를 따라 내려온 사람이 가나안에 정착하는 일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누구나 걷는 그 길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때론 넘어지기도 한 그 길 위에서 그는 마침내 ‘도와 주십시오 - 믿습니다’라는 말을 내뱉으며 끝내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고 신앙의 길을 걸었습니다.
가나안까지 다다른 아브람은 스켐의 성소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그 길을 걸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나이는 그곳까지 오게 된 의미를 자신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테라가 돌아가신 하란에 머무를 수도 있었으나 그 여정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그는 베텔에서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릅니다. “아, 당신이셨군요. 여기까지 이끌어 주신 분,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12,1).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12,7)고 말씀하신 분!” 아브람은 자신이 걸은 길이 곧 하느님의 부르심이었음을 깨닫고 고백합니다.
우리 삶의 여정을 조용히 돌아봅니다. “아! 그때, 객지에 혼자 살며 참 어려웠을 때 주인집 아주머니가 성당에 다녀서…”, “우연히 이사를 가서 이웃에 있는 학교 선배를 만났는데, 천주교 신자였어요”, “직장 상사가…”, “제 단짝 친구가…”, “그래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 그곳으로 이사를 가고, 직장을 옮겨 그 상사를 만난 것도,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하느님의 이끄심이었어요”, “그리고 제 삶은 달라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일상에서 우리를 부르고 초대해 주십니다.
12,1 내가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자연인 아브람이 하느님께 응답하여 하느님의 계획 속으로 들어갑니다. 아브람은 75세에 길을 떠났습니다. 현재에 안주할 수 없는 어떤 내적 갈망, ‘이게 삶의 전부는 아니야!’ 어쩌면 75년을 살았어도 충만함을 체험할 수 없었던 아브람은 비로소 하느님의 부르심인 그 길을 걸으며 진정 자신이 가야 할 길, 걸어야 할 길을 가야 한다고 느꼈는지 모릅니다. 창세기 저자는 말합니다. ‘인간은 자연 상태로 시간을 계속 흘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영원과 연결시키는 부르심에 복종할 때 자신의 참된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12,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 그래서 아브람은 나그네살이하려고 이집트로 내려갔다. 12 이집트인들이 …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려 둘 것이오. 13 그러니 당신은 내 누이라고 하시오. 17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아내 사라이의 일로 파라오와 그 집안에 여러 가지 큰 재앙을 내리셨다. 20 파라오는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아브람을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와 함께 떠나보내게 하였다.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길을 떠난 아브람이 기근으로 곤경에 처합니다. 나그네 생활을 하던 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이 부분에서 성경을 읽는 우리 마음은 불편해집니다. 신앙이 부족한 우리도 차마 못할 일을 아브람이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성경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부르실 때 먼저 정든 곳을 떠나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떠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소외와 비참함을 체험케 하십니다. 하느님의 초대는 행복이 철철 넘치고 하는 일마다 잘 되게(성경의 어디에도 이런 대목은 찾기 힘듭니다) 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이 말하는 것으로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가 없는, 알아듣기 힘든 구원의 신비입니다.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생존의 문제가 삶을 압박해 올 때 우리는 신앙을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그런데 일의 결과는 우리의 예상과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아내 사라이의 일로 파라오와 그 집안에 여러 가지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12,17). 오히려 아브람에게는 침묵으로 일관하시며 양과 소와 낙타 남종과 여종을 얻어 재산을 늘려 떠나가도록 내버려 둡니다.
창세기 저자는 신앙 선조의 부끄러운 모습을 세 번이나 들려줍니다(12장, 20장, 26장). 아브라함은 이집트와 그라르에서 아내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아내를 누이라 하고, 26장에서는 그의 아들 이사악도 같은 행동을 보입니다. 왜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되는 이 얘깃거리를 세 번이나 실었을까요? 성경이 어떤 일을 삼세 번 언급한다면 그만한 까닭이 있을 겁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바오로의 소명이 세 번 나오고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세 번이나 예고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모든 신앙인 안에 있는 약함과 두려움을 표현합니다. 내가 가진 것을 잃을까 봐 끊임없이 불안해하며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을 붙들고 방어하느라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가련한 처지를 불쌍히 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이런 모습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잘잘못을 묻지 않으십니다. 그런 우리를 이해하고 품으시며 당신의 약속을 지키십니다. 한 쪽에는 아브람의 모호한 편법이 있고 다른 쪽에는 하느님의 관용이 나타납니다. 부르심 앞에 단호히 떠났던 믿음의 아브라함과 넘어지는 아브라함은, 같은 신앙의 길을 걷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13장에서는 따져 묻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아브람의 아량이 펼쳐집니다. 자신의 조카와 땅을 가르면서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롯에게 땅을 선택할 우선권을 줍니다. 롯이 선택한 동쪽이 더 좋은 곳 같아 보이지만, 나중에 소돔과 고모라는 그들의 죄악이 무겁다(18,20)며 천사가 한탄한 곳으로 드러나지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만이 하느님의 부요함을 알기에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14장에서 아브람은 전리품을 나눌 때도 “실오라기 하나라도 신발 끈 하나라도 그대의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겠소”(14,23),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소”(14,24)라고 말합니다. 결국 아브람이 차지할 것은 눈에 보이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만으로도 충만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성녀 대 데레사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기도).
[성서와함께, 2009년 3월호, 배미향 수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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