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예수님과 다시 새롭게9: 새로운 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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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1-09-21 | 조회수3,437 | 추천수1 | |
예수님과 다시 새롭게 (9) 새로운 길
“길”은 인생을 표현하는 은유(metaphor)이기도 하다.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찾는 지혜와 종교도 하나의 길로 표현된다. 사실 인류의 역사 안에는 다양한 길들이 존재했다. 행복한 인생을 위한 길, 가치 있는 삶을 위한 길, 그래서 결국 구원을 위한 여러 길들이 모색되고 제시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길”이다. 그리스도교의 길은 역사적 인물 예수님과 관련이 있다. 즉 예수님의 길을 뒤따르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길이다. 그래서 일찍이 예수님의 제자들인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자신을 “길”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사도 9,2)
그리스도교의 길이 인류 역사의 다른 길들과 구별되는 독특함은 바로 역사의 예수님이 걸으셨고 제시하신 길의 독창성에 근거한다. 예수님의 길이 가지는 차별성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 안에 존재했던 다양한 길들과의 비교를 통해 더 뚜렷이 드러난다. 예루살렘의 성전과 율법이라는 큰 두 가치를 중심으로 한 제2차 성전 유다이즘(Second Temple Judaism)과 로마 제국의 통치라는 정치적 질서 안에서는 다양한 길들이 존재했다. 이 길들의 다양성은 하느님에게로 이르는 길, 인간 구원의 길, 이스라엘이 해방되는 길에 대한 각기 다른 해석과 가치 선택에 기인한다. 이처럼 예수님 당시의 유다이즘은 다양성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예수님 당시 유다이즘의 제도들 중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예루살렘의 성전과 사제직이었다. 기원전 587년의 유다 왕국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그리고 뒤이은 바빌론 유배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엄청난 상실이요 위기였다. 그래서 유배에서 되돌아온 유다인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회복과 재건이었다. 이 과제는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통하여 가시화되었다. 그리고 그 성전의 대사제는 유배 이후 유다 민족의 권위 있는 최고 지도자로서의 역할도 함께 했다. 그렇다고 우리는 당시의 유다이즘을 성전과 대사제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조직된 체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피라미드 모양의 조직 안에서 성전의 대사제가 그 정점에 위치하고, 그를 중심으로 통일된 종교 사상과 제도를 가진 획일적인 유다이즘을 상정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 유다이즘에서 율법은 최고의 가치였다. 특히 할례, 안식일, 음식 규정과 정결 규정 등은 유다인과 이방인을 분리하는 정체성 표지(identity badges) 혹은 경계 표시(boundary markers)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유다인들을 아무런 창조성을 가지지 못한 채 단지 과거의 전통만을 고수하는 사람들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들을 엄격한 율법주의의 굴레에 사로잡혀 살았던 사람들로 생각하는 것은 사실에 대한 왜곡이다. 물론 당시의 유다인들은 과거의 전통에 충실하려 하였으나 동시에 새로운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종교적 상황이라는 긴장과 도전 안에서 전통에 대한 역동적인 해석을 통한 응전을 시도하였다.
또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 당시의 유다이즘은 율법에 대한 준수로 구원되는 율법주의(legalism)의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 은총의 선택과 계약의 종교라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백성으로 “들어가기(getting in)”는 하느님 은총의 선택이고, 하느님과의 계약 관계 안에 “머물기(staying in)”위한 수단이 율법 준수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팔레스타인 유다이즘의 종교적 패턴은 “계약적 율법사상(covenantal nomism)”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율법의 행위”는 율법 전체와 그 준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계약의 관계 안에 “머물기’ 위해 필요한 특정한 율법 규정의 준수를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의 종교적 상황을 단수의 “유다이즘”이라기보다는 복수 형태의 “유다이즘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사실 당시의 유다인들 안에는 다양한 종교적 그룹들이 존재했다.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에세네파, 열혈당, 헤로데당 등의 다양한 길들이 공존해 있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정확한 해석과 철저한 준수를 구원의 길로 선택하였다. 그들은 유다인의 전통과 관습 속에서 철저한 정결 규정을 지키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다. 사두가이들은 성전과 제사를 하느님에게로 이르는 길로 선택한 사제들 중심의 그룹이었다. 에세네파는 세상을 떠나 유다 광야에서 율법에 철저한 공동체 생활을 통해 구원에 이르려 했다. 열혈당원은 로마 제국에 대항한 폭력적 투쟁을 통해 이스라엘을 해방하려 했다. 그리고 유다인들 중에는 로마 제국에 편입되어 누리는 평화(Pax Romana)를 이스라엘의 구원으로 여기는 그룹도 있었다. 이와 같이 예수님 당시에는 하느님, 인간 구원, 이스라엘의 해방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실천들이 있었다. 즉 다양한 길들이 존재했다.
신약성경의 복음서들에는 예수님과 반대자들 사이의 갈등이 전해진다. 갈등이란 개인이나 그룹들 사이에서 생기는 생각과 행동의 불일치, 가치들의 충돌이다.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다름 아닌 당시 유다이즘의 대표적인 그룹들인 율법 학자들, 바리사이들, 사두가이들, 헤로데 당원 등이다. 반대자들은 복음서 이야기의 시작에서부터 예수님과 갈등을 일으키고, 이야기의 줄거리가 진전되면서 이 갈등은 더욱 깊어진다. 이것은 결국 예수님과 반대자들 사이의 갈등이 당시 유다이즘을 대표하던 그룹들이 지향하고 실천했던 길들과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 사이의 깊은 갈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갈등을 통해 다른 길들과 구별되는 예수님 길의 독특함이 잘 드러난다.
예수님의 길은 마태 7,13-14에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예수님은 좁은 문, 좁은 길을 생명에 이르는 길로 제시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늘 다니던 길, 오래전부터 관습적으로 다니는 길,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길이 넓은 길이라면, 좁은 길은 사람들이 덜 다닌 길, 대안적인 길, 잘 다니지 않은 길인 셈이다.
예수님은 새로운 길을 제시하신다. 성전과 율법의 넓은 길, 관습적인 길, 늘 다니던 길이 아니라 예수님 당신의 가치 선택을 대안적 길로 제시하셨다. 예수님은 성전과 율법이 아닌 당신 자신을 하느님에게로 이르는 길로 제안하셨다. 그래서 예수님과의 친교(communion)와 새로운 공동체(community)의 형성이 인간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주장하시고 실천하셨다. 그 길은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가로 막는 일체의 경계들을 철폐하는 해방과 구원의 길, 새로운 가치와 질서가 실현되는 대안적 길이었다. 경계 표시로서의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님과의 관계, 그분처럼 사는 것이 바로 새롭고 독창적인 길이다.
“다시 새롭게”, “예수님과 다시 새롭게”, 그것은 새로운 길에 대한 초대이다. 예수님은 늘 다니던 길, 누구나 다 아는 길, 관습적인 길이 아니라 덜 다닌 길, 대안적인 길, 아니 어쩌면 아무도 다니지 않은 길을 걸어가셨고, 바로 그 길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 길은 결국 다름 아닌 바로 예수님 자신이다. 그분 자신이 바로 새로운 길이다. 따라서 새로운 길의 선택은 바로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 예수님처럼 사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월간빛, 2011년 9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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