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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예수님과 다시 새롭게11: 새로운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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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1-11-21 조회수3,641 추천수1
예수님과 다시 새롭게 (11) 새로운 치유


신약성경의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상(像) 중의 하나는 치유자(治癒者, healer)와 구마자(驅魔者, exorcist)로서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을 뿐 아니라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마르 1,34) 구체적으로 그분은 나병환자, 중풍병자, 손이 오그라든 사람, 하혈하는 부인 등을 낫게 하시고, 죽은 이를 살리시며, 눈먼 이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시고,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을 깨끗하게 고쳐주셨다. 이와 같이 치유 기적과 구마 기적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 중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예수님이 여러 기적을 행하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문헌 이외에도 그 사실을 전하는 역사적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유다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기원후 38년경-100년경)가 93-94년에 기록한 『유다 고대사』라는 작품이다. 이것은 천지창조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제1차 유다 봉기(기원후 66-70년)의 발발까지를 서술하는 방대한 작품인데, “플라비우스의 증언”이라고 불리는 18권 63-64에서는 예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 때에 예수라는 현자가 나타났다. 굳이 그를 사람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말이다. 그는 놀라운 일들을 행하는 자였고, 기꺼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이들의 스승이었다. 그는 많은 유다인들과 많은 그리스인들을 끌어 들였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였다. 우리 가운데 앞선 이들의 고발에 의해 빌라도가 그를 십자가형에 단죄하였을 때, 먼저 그를 사랑하였던 이들은 그에 대한 사랑을 그만두지 않았다. 사흗날 그는 다시 살아서 그들에게 나타났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예언자들이 이 일들과 그에 대해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일들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를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는 부류는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는 자”는 예수님을 기적의 행위자로 표현한 것으로서 신약성경에서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사실 역사적 예수님의 여러 모습들 중에서 치유자요 구마자의 모습은 계몽주의 이후 자연 과학적 세계관과 실증주의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는 선뜻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병자, 불구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을 성하게 고치신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찾아보려 한다. 만일 이 부분을 망각하든지 무시하면 예수님이 하신 중요한 일의 한 부분을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와 그것의 구체적인 실현으로서의 치유와 구마를 이해하여야 한다. 예수님 당시의 유다인들은 병자, 불구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을 죄인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부정(不淨)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의 영역에서 배제되어야 했다. 죄인이요 부정한 사람들로 간주된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과 접촉하는 것은 부정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주변으로 내몰렸다. 이와 같이 그들은 하느님과도 다른 사람들과도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

예수님이 병자, 불구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을 고치셨다는 것은 이 단절된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배제되고 사회 안에서 소외된 이들을 성하게 고쳐주심으로서 그들을 다시 공동체 안에 포함시키고 그 공동체를 회복시켜주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예수님의 여러 기적들은 당신이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의 구체적인 실천이요 실현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올바른 관계 회복의 운동이며 새로운 대안적 공동체 형성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다이즘에 따르면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은 메시아 시대의 잔치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그들은 잔치에 초대해야 할 사람들이다.(루카 14,12-14) 루카 7,18-23(마태 11,2-6 병행)은 세례자 요한과 그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 사이의 대화들로 이루어져 있다.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며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루카 7,19)라고 묻게 한다. 이것은 메시아에 관한 질문이다. 세례자 요한의 질문은 예수님이 메시아인지를 묻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신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루카 7,22)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당신의 일을 메시아의 일로 표현하신다. 즉 당신의 일들로써 스스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신다. 사실 루카 7,21-22에 언급된 메시아의 일들은 구약성경의 이사 35,5-6과 61,1-2 등의 예언을 실현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여러 기적들은 그분이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의 치유와 구마의 기적 행위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예수님은 정결(淨潔)과 부정(不淨)의 경계에 의해 배제되고 소외된 병자, 불구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심으로써 그들과 “함께 느낌(共感)”, 즉 “함께 아파하기(compassion)”를 실천하셨다. 예수님에게는 일체의 차별과 경계보다 인간에 대한 연민, 즉 “함께 아파하기”가 더 큰 가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 안에서 얼마나 많은 차별과 경계들로 얼마나 많은 배제와 소외를 행하고 있는지?

예수님의 치유 대상이었던 병, 불구, 더러운 영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가로 막는 일체의 상황, 현상, 경향, 세력, 제도 등을 가리킨다. 이것은 개인적, 신체적, 영적, 인격적인 동시에 공동체적, 사회적, 정치적인 차원을 동시에 가진다. 하느님의 나라는 올바른 관계의 회복이고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 운동이라고 볼 때,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과 함께, 이웃과 더불어 올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하고, 우리에게는 여전히 새롭고 대안적인 공동체가 필요하다. 즉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의 도움과 치유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분의 도움으로, 그분 치유의 손길로 해방되고 변화될 수 있다.

예수님은 “나”의 세계에 갇힌 우리의 삶을 “나” 밖의 세계로 열린 삶으로 바꾸시고,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과 단절되어 오그라들었던 우리네 삶을 소통하고 개방된 삶으로 변화시키신다. 그래서 치유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마음을 가지고, 그분이 하신 일을 실천하게 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함께 아파하기”의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의 눈먼 상태를 고쳐 주시고 시력을 회복시켜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치유 덕분에 그분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분의 진면목(眞面目)을 제대로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그분의 치유의 손길 덕분에 우리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된다.

“다시 새롭게”, “예수님과 다시 새롭게”, 그것은 새로운 치유에로의 초대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치유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분의 치유의 손길은 우리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로, 다른 이웃과 자연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도록 변화시킨다. 그래서 우리를 전인적(全人的)으로 치유된 삶을 살도록 한다.

[월간빛, 2011년 11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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