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성경과 도덕 해설: 성경에는 왜 그렇게 계명이 많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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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2-02-07 | 조회수3,338 | 추천수1 | |
[성경과 도덕 해설] 성경에는 왜 그렇게 계명이 많을까? 계명에 연연하던 바리사이와 율법학 자들은 예수님께 비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꼬박꼬박 십일조를 바치고 단식을 한다고 해서,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은 신약성경에도 수많은 계명들이 들어있지 않던가요? 예수님께서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들을 때마다 저는 솔직히 좀 갸우뚱합니다. 유다교 전통에서 “멍에”는 가르침을, 계명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과 계명이 과연 율법학자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보다 가볍던가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는 신약의 계명은 구약의 계명보다 더 편하던가요? 심지어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성경의 계명들을 지켜야 하나? 현대인들은 성경에 들어있는 계명들을 보면서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계명들이 인간을 얽어매는 속박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러”(루카 4,18) 오셨다는 예수님이시라면, 전보다 더 무거운 계명들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 가르치심대로 살기로 한다는 건 우리 삶을 바리사이의 삶만큼이나 맥 빠지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은 우리의 행복을, 인간의 실현을 가로막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애초에, 내가 어떻게 살고 나의 삶을 꽃피워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에 다른 사람의 - 그것이 예수님이라 하더라도 -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거부감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설령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해도, 성경이 과연 지금 우리 시대에 알맞은 삶의 지침을 제시해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로 들어가면 상황은 명백해집니다. 수천 년 전에 기록된 성경이, 예를 들어 인간복제 문제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요? 산업 발달과 사회 변화는 이전에는 없던 많은 문제들을 발생시켰고, 성경은 분명 이러한 현대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성경이 삶의 규범으로서 가치를 보전할 수 있을까요? 나의 삶 안에서 만나게 되는 복잡다단한 순간들에, 그 ‘낡은’ 성경은 과연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을까요? 교황청 성서위원회 문헌 「성경과 도덕」 이런 두 가지 질문에 응답하려 하는 것이 교황청 성서위원회에서 2008년에 발표한 「성경과 도덕 - 그리스도인 행동의 성경적 근거」입니다. 발표된 순서로 말한다면 지난해에 우리가 읽었던 교황님의 「주님의 말씀」이 더 늦게 나왔지만(2010년), 논리적으로 보면 「주님의 말씀」을 읽은 다음에 「성경과 도덕」을 읽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교황님께서 「주님의 말씀」에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우리의 삶이 주님의 말씀을 살아내는 것이 되고 세상 안에서 말씀을 증언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제 「성경과 도덕」은 바로 말씀에 따른 우리의 삶에 대해 고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의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성경과 도덕」은 각각 제1부와 제2부에서 응답을 제시합니다. 앞으로 1년 동안 읽어갈 내용들을 간략하게 훑어본다면, 제1부 “계시된 도덕 : 하느님의 선물과 인간의 응답”에서는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계시된”) 삶의 길(“도덕”)이 먼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선물, 그분의 은총으로부터 시작되고 그에 따르는 도덕적 요구들은 그렇게 먼저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선물에 대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응답임을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제2부, “도덕적 성찰을 위한 성경의 기준”에서는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삶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줍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의 해석 과정이 전제됩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성경이 현대의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개별적인 대답을 제시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성경에서 몇 가지 기준들을 추출할 수 있고 그런 다음 그것을 다른 경우들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예들을 통하여 우리는, 성경이 오늘날에도 우리 삶을 위한 지침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계시된 도덕 「성경과 도덕」의 서론에서는 이 문헌 전체를 위하여 중요한 개념인 “계시된 도덕”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말마디의 의미를 가지고 생각한다면, 그리스도교의 도덕이 “계시된 도덕”이라는 것은 마치 우리에게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도덕규범이 인간들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하늘에서 행동 지침서가 내려왔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알고 보면 “계시된 도덕”이라는 말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도덕이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기준이 아니라 계시를 기준으로 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도덕”이라는 것을 행위의 지침이나 실천해야 할 덕목 정도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성경이 제시하는 도덕을 충분히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계시된 도덕이란 이럴 때는 이렇게 해야 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해야 한다고, 아니면 이런저런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하느님께서 알려주셨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 것입니다. 앞 단락의 첫 문장에서, “그리스도교의 도덕이… 계시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맞는 말이지만, 결정적인 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계시가 행동 지침의 계시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헌장(2항)에서 이미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교의 계시, 성경에서 말하는 계시는 하느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인간과 사귀시고자 친구처럼 말을 걸어오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그 안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께서는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계명들을 알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이 계시로부터, 곧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으로부터 인간 행동의 기준이 주어집니다. 이런 이유에서 「성경과 도덕」에서는, 도덕은 부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의 은총에 뒤따르는 이차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도덕은 하느님 체험에 뒤따르는 것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전적으로 무상의 선물을 주시면서 하게 하시는 그 체험에 뒤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약한 설명이지만 인간적인 관계에 빗대어 생각한다면,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이러저러하게 행동하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그저 외부로부터 부과된 것으로 머뭅니다. 내 안에는 그 말을 따를 동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잘 알고 그가 사심 없이 나를 사랑하고 아낀다는 것을 안다면, 그가 나에게 어떻게 하라고 말할 때에 그것은 다른 힘을 지닙니다. 그의 마음에 감화된다고 할까요? 그것을 따르는 동기는 내 안에 있습니다. 흔히 부모님들의 권고를 따르는 것이 이런 이유에서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들에, 그런 말들을 따르는 것은 내가 그를 알고 있고 그것이 나를 위한 말임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 원리로, 성경에서 도덕은 우선적으로는 인간의 응답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과 선물의 계시이고 인간의 응답은 그러한 하느님에 대한 체험에 뒤따릅니다. 성경의 하느님은 법전을, 계명들을 알려주시기 이전에 당신 자신을 알게 하시는 것이고, 이 하느님의 계시가 인간으로 하여금 생각과 행위에서 하느님의 모범을 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음 달부터 여러 달에 걸쳐 성경에서 그 예들을 보게 되겠습니다. * 안소근 실비아 - 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가톨릭대학교와 한국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성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다.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 총무이다.
[경향잡지, 2012년 1월호, 안소근 실비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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