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바티칸 공의회와 성경 독서의 이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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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2-07-17 | 조회수3,462 | 추천수1 | |
바티칸 공의회와 성경 독서의 이해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전례 때마다 낭독하고, 멋지게 장식을 해서 행렬 때 들고 입장한다. 성경 한 구절 읽고 삶이 통째로 변화하는 체험도 하고 때로는 꾸짖는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한다. 요즘에는 갖가지 성경학교나 모임에서 성경을 배우고 성경 말씀으로 함께 기도할 수 있다. 각 교구들은 물론 수도회들이 마련한 프로그램도 많다. 고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성경을 가까이할 수 있다. 심지어 통신 성경 공부도 있으니 변명의 여지는 없겠다! 대략 70년대 초부터 신자들을 위한 이런 저런 성경 공부 모임들이 생겨났다. 최근에는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도 성경 독서 방법 중 하나로 많이 소개되어 있다. 이런 현재의 상황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기여한 바 크다.
올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50주년이 되는 해다. 공의회는 새로운 시대를 직면하여 하느님, 교회, 세상의 관계를 다시 숙고하고 고민한 끝에 교회의 쇄신을 결심했다. 여기에는 성경 말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깔려있고 이 주제를 직접 다루기도 했다. 바로 “계시헌장”이라는 문헌이다. 복잡한 신학은 살짝 덮어두고 필요한 내용만 살펴보자. ‘하느님의 말씀’을 대하는 가장 큰 외적 변화는 바로 미사 전례다. 라틴어로 낭독되던 독서와 복음을 자국어로 듣게 되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가 쓰는 말’로 듣게 된 것이다. 이 변화의 이유는 무엇일까? 말씀은 곧 ‘대화’ 예전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하느님의 말씀에는 ‘성경’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른 전통인 ‘성전’이 포함된다. 교회는 이를 오류 없이 잘 보전하고 가르칠 중대한 의무가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귀한 것일수록 밖으로 내돌리지 않는 게 잘 지키는 길이다. 그래서 교회는 성경 말씀을 잘 보관하는 데에 신경을 더 많이 썼다. 죽은 언어라서 뜻이 변하지 않는 라틴어로 된 역본을 오랫동안 보존 해 사용했다. 교회는 성경을 인문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소극적이었다. 성경 말씀에 대한 것은 교회가 조심스럽게 선별해서 들려주는 선포와 강론에 의지하고 있었다. 공의회는 그 목적에 더 비중을 두고 ‘하느님의 말씀’을 고찰했다. 제대로 된 ‘말’이란 의사 전달과 대화가 목적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당신 뜻을 알려주고 싶으셔서 ‘말씀’ 하신다. 그런데 이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려면 누구에게 수준을 맞춰야 할까? 하느님이 하느님 수준에서 말씀하시면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느님은 당신의 수준을 극단적으로 낮추셔서 인간의 말로 의사소통을 하신다. 그렇게 한동안 ‘예언자들을 통해 여러 번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말씀을 하셨다.(히브 1,1-2) 그런데도 우리 수준은 그걸 이해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결국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사람들이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본받을 수 있게 세상에 보내주셨다.(1요한 1,1-4) 그 ‘말씀’이 바로 성령의 힘으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삶에 대해 가르쳐 주셨고, 어떻게 그 뜻에 따라 살 수 있는지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은 필연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맞게 되지만 부활이 뒤따르기에 오히려 새로운 차원에서 무한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속 세상에 계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성경을 읽으면서 고민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떠나셨다. 대신 당신 제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이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다. 이들은 구약의 말씀이 예수님 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성령 덕분에 깨닫게 되었고, 성령의 인도로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선포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결과물이 바로 우리 손 안에 있는 성경이다. 때문에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인격과 삶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과 일치한다. 너희도 나처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라는 것이다. 성경 말씀의 목적은 이것 하나다. 성경 읽기는 다른 모든 신심행위에 앞서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뜻을 더 잘 알고 실천하기 위한 길이다. 말씀은 ‘함께 듣는 것’ 여기까지 공의회의 ‘하느님 말씀’에 대한 관점과 성경을 읽는 목적을 살펴봤다. 그럼 이 목적을 ‘어떻게’ 달성하는지 생각해 보자. 이 ‘어떻게’야말로 어떤 형태로든지 성경 공부나 기도나 묵상에 참여하는 자세와 직접 연관이 있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서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살펴보는 일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 자체로, 하느님의 뜻을 완전무결하게 사신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면 우리가 지나치기 쉬운 두 가지 면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은 유다인으로, 당연히 회당에 가셨다. 거기서 성경 말씀을 듣고 시편으로 찬양과 기도를 드리셨다. 회당장의 강론에 귀를 기울이셨고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누구이신가를 배우셨다. 공생활 때에도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다. 즉, 예수님은 성 경 말씀을 선포하는 신앙 공동체의 가치를 무시하지 않으셨다. 개인적인 성경 묵상에 앞서 제일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예배 안에서 하는 하느님 체험이다. 예수님 시대라고 회당장이 엉뚱하고 지루한 강론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시편 노래를 엉터리로 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도 없으며, 회당 구성원들이 다 한 동네 사람들이었으니 서로 간에 갈등이 없었을 리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차적으로 당신이 속한 신앙 공동체 안에서 구약 성경의 가르침을 접하고 함께 기도하고 찬양을 드리셨다. 복음 선포를 시작하신 것도 당신의 신앙 공동체인 유대인들 사이에서였다. 나는 나 홀로 신자가 아니고 하느님은 나만의 하느님이 아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믿는 ‘우리’들의 아버지이심을, 함께 성경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실감 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내가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나 혼자만의 행위가 아니라 신앙 공동체에게서 도움을 받아 이루어지고 또 공동체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다. 말씀은 ‘살기 위한 것’ 예수님은 말씀뿐 아니라 행동에서도 매우 실천적이셨다. 하느님에 대한 가르침도 그렇고 그분의 놀랄 정도로 과감한 행동은 말씀에 대한 철저한 묵상, 곧 하느님과의 개인적이고 깊은 대화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님은 공생활 동안 자주 홀로 외딴 곳에 가서 기도 드리셨다. 그렇게 찾아낸 삶의 해답을 행동으로 옮기셨다. 이 지점이 나의 성경 읽기를 평가할 지점이다. 내가 홀로 묵상한 말씀을 통해 깨달은 것을 지금 살아가려고 노력을 다 하고 있다면, 나는 성경을 잘 읽고 있는 중이다. 이 목적으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성경 독서 방법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 반면 내 삶을 예수님의 삶과 같이 변화시키는 결과를 내지 못한다면, 그 방법은 잘못된 것이다. 또 하나, 하느님이 당신의 모습으로 자유롭게 창조하신 인간은 지성과 감성, 정신과 육체를 모두 가지고 있기에 이 모든 것으로 말씀에 다가가야 한다. 보통 기도와 묵상을 지성적인 활동에서 떼어 생각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적어도 초기에는 말씀 묵상이 근거 없는 자기 합리화 내지 몽상이 되어버리거나 뉴에이지식의 몸과 마음의 평화만을 추구하지 않기 위해서, 교회의 가르침이 성경 내용에 대해 객관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정도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 앞에 있는 성경이 무슨 책이며 왜 말씀을 읽고 공부하는지 잊지 않고 성령의 도우심을 빌며 어떤 방법이든지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 꾸준히 계속해 나간다면, 분명히 예수님께서 깨달으신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실 때가 온다. 이때 거룩한 독서나 단순한 성경 구절 묵상, 말씀 낭독을 동반한 정감어린 찬양기도, 생활에서 체험한 말씀 나누기 등 모든 성경 묵상과 공부는 하느님의 말씀을 맛들여 그분 뜻을 실천하면서 살아가게 해 주는 방법이 된다. 우리 손에 맡겨진 말씀 공의회의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는 어떤 것이 성경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인지 콕 집어주지는 않는다. 거룩한 독서? 4년짜리 성경 학교? 통신 성경 공부? 복음 묵상 7단계? 공의회가 한 일은 우리 손에 직접 성경을 들려주었고 우리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을 열어 준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이 우리들을 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어린 아기로 오셔서 우리들 손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신 것처럼, 하느님은 우리 지성과 마음을 신뢰하시면서 우리 손에 당신 말씀을 쥐어주셨다. 다만 위에서 본 것처럼 모든 성경 독서의 최종 목적은 언제나 하나다. 그것은 ‘말씀에 대한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의 실천적 응답’이다. 성령의 인도 속에서 예수님의 삶을 모델 삼아 나와 내 공동체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렇게 해서 ‘하느님의 말씀’에 전심으로 응답하기 위해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한다. [분도, 2012년 여름호, 이현미 보나벤뚜라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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