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요한 복음: 나는 세상의 빛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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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2-07-22 | 조회수8,655 | 추천수1 | |
[요한 복음 안에서 예수님의 친구 되기]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즈음은 불이나 빛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기 어렵다. 스위치만 누르면 불이 들어와 아무 불편이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 40년 동안 불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체험했다.
성지순례를 가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걸었던 광야를 볼 수 있다. 가도 가도 끝없는 광야에 가끔 아카시아나무나 오아시스가 나타나지만, 그런 뜨거운 광야에서 낮의 구름과 밤의 불기둥이 없었다면 그들은 어떠했을까? 하느님의 첫 창조물은 빛이었고,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했다. 그러니 그들이 하느님을 “나의 빛, 나의 구원”이라고 흥얼거린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빛의 축제가 무르익은 초막절 마지막 날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포하셨다. 이 말씀은 요한 복음서에서 서술어가 있는 예수님의 두 번째 자기 계시 선언이다(“나는 ~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당신은 누구이시며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를 나타내는 중요한 7개의 선포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초막절 때 이 말씀을 하셨을까? 초막절이란? 초막절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의 광야생활 중에 그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신(탈출 13,21-22; 민수 14,14) 하느님을 기억하며 가을 나무 열매들과 포도 수확에 대해 감사드리는 축제이다. 초막절이 되면 예루살렘 성전, 여인들의 뜰에 있는 커다란 4개의 금 촛대에 불을 밝히고 8일 동안 매일 물의 의식과 빛의 예식들을 거행하였다. 밤이 되어 그곳에 불이 켜지면 모든 예루살렘이 환해지고 그 밑에서 백성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기쁨과 감사의 축제를 지냈다. 초막절은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추분에 행해졌고, 그 이후로는 밤의 길이가 길어진다. 초막절 마지막 날 예수님은 등잔대 바로 밑에서 당신은 예루살렘의 빛이 아니라 “세상의 빛”이라고 외치신 것이다. 예수님은 빛이신 하느님(1요한 1,5)의 현존의 실현 또는 육화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 복음서에서 열여섯 번 사용된 “빛”이라는 단어 거의 모두가 예수님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눈먼 사람을 고쳐주신 목적 예수님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주심으로써(9장)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 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8,12)라고 말씀하신 것을 실제로 보여주셨다. 예수님이 눈먼 사람을 치유하신 목적은 아버지의 일을 하시기 위해서다.* 아버지의 일이란 예수님을 “세상의 빛”으로 계시하시는 일이다. 예수님의 일은 아버지가 하라고 명하신 바로 그 일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를 보내셨음을 드러낸다(5,36).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분으로 인정하기를 원하셨고(17,8), 또한 사람들이 그를 하느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분으로 알게 해달라고 기도까지 하셨다(17,21).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이 왜 눈먼 사람을 실로암으로 보내시는지 생각하게 한다. 예수님은 침으로 진흙을 이겨 눈먼 사람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신다. 그는 아무 의문도 제기하지 않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온다”(9,7). 실로암은 히브리어 실로아(이사 8,6)의 희랍어 번역으로 “파견된 이”를 의미한다. 그의 치유는 실로암 물로 씻어서가 아니라 보냄을 받은 이와의 만남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는 성전에서의 선포가 증명된 것이다. 점차적으로 알게 되는 예수님 눈을 뜨게 된 이는 점차적으로 예수님을 알게 된다. 그는 처음에 “예수”라는 이름만 안다(9,10).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두 번이나 고백하지만 놀랍게도 유다 당국자들의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점점 더 깊이 예수님을 알게 된다. 그는 예수님을 당당하게 증언까지 한다. 그는 점차적으로 예수님을 “예언자”(9,17), “메시아”(9,22),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9,33)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 뒤 그는 예수님을 증언하다가 죄인으로 몰려 회당에서 쫓겨난다. 예수님은 그가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개인적으로 그를 만나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고 물으신다. 그 사람은 사람의 아들이 누구냐고 묻고, 예수님은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라고 직접 알려주신다. 이에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9,38)라고 고백하며 경배한다. 그는 육체의 시력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고 그의 제자가 된다. 그 결과 핍박과 박해를 당하는 모든 사람의 본보기가 된다. 예수님의 사명 예수님이 누구이신지가 명백히 알려진 뒤에 그분의 사명이 드러난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9,39). 이 말씀대로 눈이 멀었던 사람은 빛 속에서 걷게 되었다. 반면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표징도 보았지만, 빛을 거부하는 죄 속에 머무르며 스스로 선택한 어둠 속에 남아있다(3,19). 빛은 심판의 상징으로 제시된 것이다. 빛은 바리사이들과 그의 영적 상태를 드러냈다. 눈이 멀었던 사람은 빛을 보고 영안(靈眼)이 열렸지만,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지혜” 속에서 눈뜬장님으로 드러났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선언이 주는 의미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선언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하느님의 현존임을, 또한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이심을 계시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려고 사람이 되셨고 생명을 주는 빛으로 나타나셨기에 그분을 믿는 사람들은 빛의 자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가르쳐준다(1,12).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14,6). 곧 예수님은 세상 어둠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하시려고 오신 불기둥이시다. 우리는 바리사이들이 놓치고 있는 것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주장하며 예수님과 이웃, 그리고 세상에 눈을 감고 살아가면 우리도 ‘눈뜬장님’이 된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가면 부족한 우리의 모습이 더 드러나 괴로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눈멀었던 사람처럼 겸손하게 빛이신 예수님께 가까이 가서 우리의 부족함과 죄를 고백한다면, 빛이신 주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며 힘과 용기를 주신다. 필자에게 영적 위기가 있었을 때 빛이 되었던 것은 고해성사였다. 힘들고 괴로울 때면 언제고 고해소로 달려가 고백하고 지도를 받았다. 절망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도록 지금까지 필자를 이끌어준 불기둥은 주님이 함께하시는 교회라는 빛이었다. 지금 필자를 인도하는 빛은 미사 중에 듣는 하느님의 말씀과 성체다. 축제의 어원은 “기억”이다. 옛날의 하느님 체험을 현재화시키는 것이 축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축제를 지냈던 것이고 예수님은 초막절 축제를 완성하셨다. 우리의 축제는 매일의 파스카 축제를 통해 빛이신 예수님의 현존을 느끼고 감사하는 삶이다. 언제나 예수님의 빛 속에서 걷는다면 어둠 속에서도 영원히 예수님의 친구로 남아있을 수 있다. 기도 주님의 첫 번째 창조물은 빛이었습니다(창세 1,3).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주님은 또한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십니다(시편 27,1). 당신의 말씀도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19,105). 저희가 언제나 “세상의 빛이신” 당신 아드님의 빛 속에서 걸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 요한 9,3을 읽으면, 그가 눈먼 것은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기 위해서라고 이해된다. 그러나 9,3의 목적절을 9,4의 주절과 연결시켜 읽으면 오해가 없을 듯하다. “하느님의 일이 이 사람에게서 나타나도록 하려고 우리는 낮 동안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하여야 한다.” 이렇게 목적절이 주절보다 앞에 나오는 예는 다른 곳에도 있다(요한 1,31; 13,18; 14,31; 15,25). * 이혜자 인덕마리아 -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석사학위, 로마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요한 복음 전공)를 받았으며, 현재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7월호, 글 이혜자 · 그림 조수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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