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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 복음: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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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2-08-18 조회수5,632 추천수1
[요한 복음 안에서 예수님의 친구 되기]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팔레스티나의 광야에 10월부터 3월 사이에 비가 내리면 온갖 풀과 꽃들이 자라 양들에게 훌륭한 목초지가 된다. 그러나 건기가 되면 황량하게 변한다. 물과 먹이가 거의 없고 위험은 사방에 널려있다. 유다의 동쪽 광야지대는 침식에 의해 깎인 절벽들이 있다.

이런 환경에서 유능한 목자가 된다는 것은 시편 23에 잘 나타나 있듯이 먹이(푸른 풀밭), 물(잔잔한 물가), 안전한 이동로(바른길), 그리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줄 장소(저의 원수들 앞에서)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팔레스티나에서 양떼들은 공동우리에서 밤을 지낸다. 밤이 되면 목자는 자기 몸으로 문을 가로막고 자는 것이 상례였다고 한다.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낸 다음, 그는 앞장서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요한 10,1-5).


실제 이야기

1980년대 후반에 있었던 팔레스타인 폭동 기간 동안 이스라엘 군대는 세금을 내지 않는 베들레헴 부근의 한 마을에 벌을 주기로 결정했다. (마을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그 세금은 단지 이스라엘 군대의 점령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휘관은 마을의 모든 짐승들을 모아 가시철조망을 두른 커다란 우리 안에 가두었다. 며칠 뒤 한 여인이 찾아와 자신의 가축들을 풀어달라고 애원했다. 그녀의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그 짐승들이 그녀의 유일한 생계수단이라는 것이었다.

지휘관은 수많은 짐승들이 갇혀있는 우리를 보여주며 자신은 그녀의 가축들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빈정대며 말했다. 그녀는 만일 자신이 자신의 가축들을 가려낸다면 그것을 가져가게 해주겠냐고 물었다. 그는 동의했다.

한 병사가 우리의 문을 열어주었고 그 여인의 아들이 작은 갈대피리를 연주했다. 그는 단순한 멜로디를 반복해서 연주했다. 그러자 곧 양들이 이곳저곳에서 머리를 쳐들었다. 그 소년은 음악을 연주하며 집으로 걸어갔고 25마리의 양들이 그 뒤를 따라갔다(게리 버지, 「요한 복음」, 389-390쪽).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설명

“나는 양들의 문이다.” 할 때 예수님의 역할은 양들이 그를 통해 안전하게 양 우리로 들어가 안전하게 휴식을 취하게 하고, 양들을 풀밭으로 인도하여 풀과 물을 먹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목초지를 제공하고 양들에게 풍부한 생명을 주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또한 “나는 착한 목자다.”라고 선포하신다. “착한”으로 번역된 희랍어 ‘칼로스’는 ‘좋은’, ‘아름다운’, ‘충실한’, ‘모델이 되는’, 또는 ‘고귀한’ 등의 의미를 지닌다.

착한 목자의 중요한 특징은 두 가지이다. 양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것과 양들을 잘 안다는 것이다. 착한 목자는 양떼를 참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살아서 그들을 지키지만 위험 중에는 양들을 위해 기꺼이 죽는다.

그러나 삯군은 오직 개인적 이익에만 관심이 있고 위험이 닥치면 도망간다. 예수님이 착한 목자라는 것은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좋은(칼로스)’ 일을 많이 했다.”는 말씀에서도 드러난다(10,32).


예수님이 이런 비유와 설명을 하고 계실 때는 성전봉헌 축제였다

성전봉헌 축제란?

기원전 175년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4세는 자신을 “에피파네스”(신의 현현)라 칭하고, 유다인들의 종교와 율법을 금하고 제우스에 대한 예배를 강요했다.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 제단 위에 이교 제단을 세워 제우스에게 돼지로 제사를 지내기까지 했다.

이는 유다인들의 저항을 초래했고 특히 유다 마카베오는 안티오키아 군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고 새로 세운 제단 위에서 희생제물을 드렸다(기원전 164년). 백성들은 새 제단의 봉헌을 8일 동안 축하했고 해마다 기슬레우월 25일부터 8일 동안 축제를 거행하도록 선포한다(1마카 4장). 이것이 오늘날 하누카라고 부르는 빛의 축제이다.*

나는 아버지와 하나다

성전봉헌 축제가 유다 마카베오의 영웅적인 승리를 기념하기 때문에 유다인들의 메시아에 대한 이해는 더욱 정치적인 것으로 굳어졌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메시아 용어를 사용하시지 않고 아버지의 일과 말씀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셨다. 그런데도 유다 지도자들은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하시면서 유다인들이 그토록 궁금해 했던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처형하려고 한다.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대적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하신 “좋은 일”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기”(10,33) 때문이라고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유다인들의 반대의 말 속에 예수님의 정체성이 들어있다. 예수님은 시편을 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도 ‘하느님의 아들들’이 된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육이 된 자신이야말로 하느님의 아들 칭호를 받기에 더 합당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신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세상에 보내신 분이다. “거룩하게 하다.”는 것은 어떤 것을 성별 또는 축성하는 것을 뜻한다. 유다 마카베오는 승리한 뒤 성전을 다시 성별한다. “성소와 성전 내부를 복구하고 뜰을 축성하였다”(1마카 4,48). 이로써 예수님은 성전봉헌 축제 동안 거룩한 하느님의 성전이심이 드러난 것이다.

예수님은 더 강한 어조로 말씀하신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10,37-38).


현대의 광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위험하고 황량하다. 우리는 자살, 폭력, 무질서한 성문화, 마약 사용, 정서적 메마름, 그리고 ‘신은 우리 삶과 아무 상관없다.’는 생각 등 현대판 광야 속에 살고 있다. 우리의 환경이 위험하기에 정말 착한 목자 지도자가 요구된다. 이런 시대에서 잘못된 목소리와 올바른 목소리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긴장, 혼란, 위기의 어려움이 닥쳤을 때 누구에게 먼저 도움을 청하겠느냐는 물음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음악을 듣거나 친구들을 찾는다고 대답한다. 착한 목자 이야기는 참된 친구의 맥락과도 통한다. 참된 친구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잘 알아듣고, 위험에 처한 이에게 먹을 것과 거처할 곳을 마련해 주며, 목숨도 바치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사실, 성전봉헌 축제 때 거짓 목자들을 비판하는 에제키엘 예언서 34장이 읽혀졌다고 한다. “나의 양 떼는 목자가 없어서 약탈당하고, 나의 양 떼는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데, 나의 목자들은 내 양 떼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목자들은 내 양 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은 것이다”(34,8). 헬라 시대 동안 성전 지도자들은 어떻게 하여 길을 잃었고 목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를 숙고한 것이다.


기도

주님, 당신은 아버지께서 분부하신 좋은 일을 많이 하시어 좋은(착한) 목자가 되셨나이다. 교황님과 모든 주교님, 신부님들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가 되게 하소서.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라가 생명의 풀을 먹듯이, 저희도 착한 목자의 목소리를 잘 알아듣고 생명을 얻는 착한 양들이 되게 하소서.

* 그 이유는 유다 마카베오의 기름이 하루분의 분량밖에 없었는데 기적적으로 8일 동안 타올라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그리하여 일반적인 촛대는 가지가 일곱 개인 반면에, 하누카 촛대는 여덟 개다.

* 이혜자 인덕마리아 -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석사학위, 로마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요한 복음 전공)를 받았으며, 현재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8월호, 글 이혜자 · 그림 조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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