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성경과 도덕 해설: 두 개의 원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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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2-09-17 | 조회수4,032 | 추천수2 | |
[성경과 도덕 해설] 두 개의 원칙 2천 년 전에는 유전자 조작이라는 것이 없었고 인간 복제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을 터인데, 유전자 조작이나 인간 복제 같은 문제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지침을 성경에서 찾아낼 수 있을까요?
「성경과 도덕」 제1부에서는 성경에서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하느님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시작하는 제2부는, 현실적인 문제들에서 출발하면서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판단을 위한 기준 원칙들을 도출해 낼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는 모든 도덕 문제를 다루지 않을 것입니다. 두꺼운 세 권짜리 윤리신학 교과서에서도 모든 문제를 다 다룰 수는 없지요. 「성경과 도덕」이 하고자 하는 일은 몇 가지 원칙과 그에 따른 몇 가지 예들을 제시함으로써, 올바른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어려운 과정에서 성경의 계시가 어떤 점에서 오늘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지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2부에서는 먼저 두 가지 근본 기준을 이야기하고, 이어서 다시 여섯 가지 구체적인 기준들을 내어놓습니다. 어떻게 말한다면, 제1부에서 다루었던 내용들을 체계화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그 기준들 가운데 이번 달에는 두 가지 근본 기준을 고찰하고, 다음 달부터 구체적인 기준들을 한 달에 두 가지씩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성경의 인간관과 일치하는가? 어떤 이들은 성경의 윤리적 가르침들이 성경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맞는 말이기도 하지요.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성경을 알지 못하던 여러 민족들도 먼 옛날부터 중요하게 여겨온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도덕적으로 훌륭한 모범은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도덕을 위한 원칙은 인간 이성에만 의지해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어느 선에 이르면 그러한 주장은 타당성을 잃습니다. 성경에는 성경만이 제시하고 있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고유한 특징을 이루는 도덕적 기준들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신앙 없는 사람들의 삶과 달라야 하나요? 여기까지는 “그렇다.”라고 대답하신 분들도, 왜 그러냐고 하면 당황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는, 나름대로 요약해 본다면, 계시를 담고 있는 성경이 그 이상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특징적인 기준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고, 그 가운데 첫 번째 기준이 “성경의 인간관과 일치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어떤 도덕적 판단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1) 창조신학과 일치하는가?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한없이 더 강한 의미에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콜로 1,15)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창세 1,26)이라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시각과 일치하는가? 2) 계약의 신학과 일치하는가? 다시 말해서, 인간이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하느님과 밀접한 친교를 이루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새 인류의 건설에 실제적으로 협력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는 시각과 일치하는가?”(95항) 두 가지 문제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첫째로 생명 문제에서, “살인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3; 신명 5,17)는 계명은 인간 생명의 가치를 주장하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까지도 금지하십니다(마태 5,21-22).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말하는 이러한 성경의 인간관에 따라 그리스도교 도덕은 자신의 생명이든 타인의 생명이든 생명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려는 인간의 모든 시도를 금지하며, 배아, 태아, 장애인 등 어떤 경우라도 그 생명을 존중할 것을 명합니다. 교회가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것 역시,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근본적으로 존엄하다는 인간학적 개념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생태 문제에 대한 인간의 책임은 하느님께서 선하게 만드신 당신 창조물을 돌보는 임무를 인간에게 맡기셨다는 데에 기초합니다. 생명의 근원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생명 존중의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둘째 예는 부부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4; 신명 5,18)는 계명은 가정의 가치를 주장하고, 예수님께서는 이를 더욱 확대시키시어 이혼에 관한 모세의 계율을 훨씬 강화하십니다(마태 5,27-32). 이에 따라 그리스도인 부부는 서로에게 한 약속에 늘 충실하며 서로를 사랑해야 하고, 교회는 혼인의 중요성과 거룩함을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이제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지요. 생명이나 부부에 관한 도덕적 가르침은 성경 밖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생명과 부부를 어떻게 이해하고 이 영역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은 성경의 근본 기준 곧 성경의 인간관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의 인간관은 한마디로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기에, 다른 문화나 종교에서 생명을 존중하는 것과는 그 근거가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에, 때로는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선택까지도 우리에게는 요구됩니다. 앞서 예로 들었던 생명과 부부라는 영역과 관련하여 교회가 낙태나 이혼을 금하는 것은 그것이 성경의 인간관에 위배되기 때문인데, 이 점에서 우리는 많은 이들과 의견 차이를 겪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모범과 일치하는가? 둘째 기준은 고유한 의미에서 더 그리스도교적인 특징을 보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 행복 선언(마태 5,1-12)을 포함한 산상설교의 가르침(마태 5-7장)대로 사는 것이 복음에 따른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제1부에서도 다루었던 것이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당신의 삶과 죽음으로 가르치신 그 삶은, 우리에게 도달할 수 없는 별 같은 이상으로 남는 것일까요 아니면 따라야만 하는 규범일까요? 겉옷을 달라 하면 속옷까지 주라는, 실제로 그렇게 하면 내가 죽고야 말 것 같은 산상설교의 가르침은 나에게도 실제로 요구되는 것일까요? 그러한 가르침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우리에게 무엇인가가 요구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늘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지금 이 세상에서 이미 완성되었을 때의 하늘나라의 모습을 보여주는 삶을 실현할 것이 요구됩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하늘나라와 반대되는 요소들이 아직도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은 때로는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연민을 보이고, 폭력을 되갚지 않으며, 성적 착취를 피하고, 자신의 원수들과도 화해를 해야 한다. 그러한 태도와 행동은 하느님의 ‘의로움’을 반영하고 하느님 나라에서 살아갈 새로운 삶의 특징을 이룬다. 그중에서도 화해와 용서와 무조건적인 사랑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며 산상설교의 윤리 전체의 방향을 설정한다(마태 22,34-40 참조).”고 「성경과 도덕」(102항)은 말합니다. 산상설교 가운데에서도, 너무 요구가 크다고 느껴서 제가 들을 때마다 부담스러워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라는 말씀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가르침들을 이상으로만 여긴다는 말은 결국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실천 없는 믿음이며 죽은 믿음입니다. 이 가르침에 따른 삶은 완성된 하늘나라에서라야 충만하게 실현될 것이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삶의 변화 없이 그저 듣기만 하라고 이런 말씀들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앞부분에서, 어떤 이들은 성경의 도덕적 가르침에 특별한 것이 없고 도덕의 원리는 인간 이성으로 찾아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산상설교와 같은 부분이,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그리스도교 도덕의 특징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삶,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을 드러내는 “너희의 빛”이 될 것이고 이를 보고 사람들은 “아버지를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 안소근 실비아 - 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가톨릭대학교와 한국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성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다.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 총무이다. [경향잡지, 2012년 9월호, 안소근 실비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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