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성경 속의 인물: 여호수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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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2-10-03 | 조회수2,928 | 추천수1 | |
[성경 속의 인물] 여호수아 (1)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한 위대한 지도자다. 그는 백열 살을 살다 죽었다.(여호 24,29) 그만큼 장수했다는 표현이다. 유목민들은 장수를 가장 큰 축복으로 여겼다. 늘 부족과의 전투 속에서 살아야했기에 오래 사는 사람은 하늘이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호수아의 말뜻은 ‘야훼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본래 이름은 ‘호세아’였는데 모세의 지시로 이름을 바꾸었다.(민수 13,16) 그의 임무가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는 에프라임 지파였지만 모세에 의해 발탁된다. 당시는 레위 지파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그만큼 여호수아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여호수아가 활약할 당시 지금의 팔레스티나 지역은 중앙 통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고을마다 독립된 왕국이 있었고 결속력은 매우 약했다. 그리고 한때 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집트의 세력도 사라진 뒤였다. 여호수아가 가나안(팔레스티나)을 정복하기에 적절한 시기였던 것이다. 여호수아기 3장은 이스라엘이 요르단 강을 건너는 장면을 이야기 하고 있다. ‘계약의 궤’를 맨 사제들이 강물에 발을 담그자 강물이 멈추고 벽을 이루었다. 그 사이를 백성들이 마른 발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전부 강을 건널 때까지 ‘계약의 궤’를 맨 사제들은 강 한복판에 서 있었다. 마침내 ‘계약의 궤’와 사제들이 건너오자 강물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모든 것은 철저한 기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는 지점부터가 ‘약속의 땅’이었던 것이다.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떠날 때는 금방 갈 것 같은 땅이었다. 그런데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다 이제 도착한 것이다. 모세도 죽고, 탈출 1세대도 모두 죽은 뒤에 약속의 땅을 밟은 것이다. 그들은 감회에 젖었다.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배우고 익히는데 40년이 걸렸던 것이다. 그들이 건너온 지점은 예리코 성 맞은쪽이었다. 여호수아는 기적의 강바닥에서 열두 개의 돌을 가져와서는 그곳에 세우게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할례의식’을 가졌다. 군인들 가운데는 광야에서 40년간 떠돌이 생활을 할 때 태어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아직 할례를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할례를 베풀고 그곳을 ‘길갈’이라 부르게 하였다. 길갈의 뜻은 ‘굴러 간다.’는 의미다. 약속의 땅에 들어왔고 젊은이들의 할례가 이루어졌으니 ‘이집트의 수치’는 굴러 가버렸다는 의미일 것이다. 길갈은 예리코 동편 3키로 지점에 있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첫 파스카 축제를 이곳에서 지냈고 오랫동안 작전기지로 삼았다. 훗날 예언자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첫 임금으로 사울을 선택하는데 그는 이곳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그만큼 깊은 의미를 지닌 장소였다.(1사무 11,15) [2008년 9월 7일 연중 제23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삼천포본당 주임신부)] [성경 속의 인물] 여호수아 (2) 여호수아의 첫 등장은 아말렉족과 전투에서였다. 그는 모세의 최측근으로 활약하며 두각을 드러냈다.(탈출 17장) 아말렉족은 이스라엘이 광야의 방황을 시작할 때부터 싸웠던 유목민들이다. 그들의 본거지는 팔레스타인 북부와 시리아에 걸쳐 있었고 아무루(Amurru) 지역이라 했다. 그래서 이들을 아모리족이라고도 부른다.
키가 크고 체격이 장대한 족속이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진입하기 직전 그들과 대규모 교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여호수아는 ‘바산 임금’ 옥(og)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는다.(신명 3장) 60개의 요새화된 도시와 시골 성읍이 있는 땅이었다. 이날의 승리는 가나안 주민들에게 공포심을 안겨 주었고 이스라엘의 존재를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여호수아는 일생을 군인으로 지냈다. 젊은 시절 그는 정탐꾼으로 가나안땅을 밟은 적이 있다. 당시 열두 지파는 가나안 침공을 앞두고 의견이 분분했었다. 그리하여 12명의 정탐꾼을 뽑아 가나안 땅으로 보냈던 것이다. 각 지파에서 1명씩 뽑았고 여호수아는 에프라임지파를 대표했었다. 돌아온 12명중 여호수아와 칼렙은 승리를 장담했지만 다른 이들은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백성들은 술렁거렸고 원망을 쏟아냈다. 당시 가나안은 전차와 신무기를 지닌 막강한 국가였다. 따라서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겨우 벗어난 히브리인들에겐 너무나 벅찬 상대였다. 10명의 판단이 현실적 안목에선 정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 탈출과 광야에서의 생존은 그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러므로 첩보작전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시험대였을 뿐이었다. 그런 까닭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두려워해선 안 된다.”(민수 14,9)고 여호수아는 외쳤던 것이다. 하지만 백성들은 여호수아를 죽이려했고 이집트로 돌아가려 했다. 가나안과의 무모한 전쟁으로 모두 자멸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들은 광야에서 40년을 헤매게 된다. 가나안의 첩보활동이 40일이었는데 그들의 불신 때문에 하루가 1년이 되어 40년을 방황할 것이란 보속을 받은 것이다. 그제야 백성들은 뉘우쳤지만 때는 늦었다. 이후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로 지목된다. 기원전 13세기경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의 시작으로 예리코 성을 공격한다. 이 과정에서 백성들은 ‘야훼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계심’을 확실히 깨닫게 된다. 그들은 전투를 통해 성을 함락시킨 것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무모한 ‘비무장 행진’을 통해 점령했던 것이다.(여호 6,20) 이는 야훼의 명령이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의심 없이 실천했다. 주님께서는 예리코 성의 정복은 군사력이 아니라 ‘야훼의 힘’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려 했던 것이다. 이후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통해 가나안 땅을 차츰차츰 정복해갔다. ‘여호수아서’는 이러한 과정을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다. 여호수아는 110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의 죽음으로 ‘가나안 정복시대’는 막을 내리고 ‘판관시대’가 시작된다. [2008년 9월 14일 연중 제24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삼천포본당 주임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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